인간세상의 어떤 변화에나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하나의 열쇠가 있다. 동심의 세계는 좋은 것과 나쁜 것, 흑백으로 구성될 수 있다. 어떤 좋은 일에도 부담되는 면이 있고 나쁜 일에도 위안이 되는 면이 있다는 사실, 어떤 좋은 사람에게도 어려운 면이 있고 나쁜 사람에게도 아낄 면이 있다는 사실을 자라나면서 차츰 깨우쳐 가며 살아가는 자세를 가다듬다 보면 어른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이럴진대 많은 사람이 모인 사회는 말할 나위가 없다. 한 사회의 어느 정책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양면성을 갖는 것이다. 현명한 정책결정은 시대의 흐름을 읽음으로써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근대화가 마치 절대선처럼 인식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너무나 절실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지고 오래 지켜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치우친 인식은 이 사회의 미숙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한 차례 되돌아보아, 그 필요가 여전히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는 측면은 계속 추진하되, 지나친 측면에 대해서는 자세를 바꿀 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근대화는 원래 19세기 후반 개항기에 개화란 이름으로 떠오른 명제였다. 서양의 발달한 문명을 들여오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일본의 통제력이 확립될 때는 문명화란 이름을 내세웠다. 서양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조선 통치를 통해 전해준다는 뜻이었다. 1919년 일본 통치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일어난 후로는 근대화란 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근대화의 목적은 유럽에서 발달한 근대문명의 도입과 정착이다. 익숙하던 전통문명을 버리고 근대문명을 받아들일 필요성은 부국강병으로 인식되었다. 서양 열강의 군사력에 압도당하면서, 그리고 근대화된 산업국가의 경제력을 부러워하면서, 또 나아가 선진국의 치밀한 제도에 감탄하며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한 것은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열강의 침략과 정복에 직면한 모든 사회에서 그런 열망이 일어났다.

근대화의 구체적 표적은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사회제도였다. 이 표적들은 유럽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산업혁명의 진행과 확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화를 흔히 산업화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표적들이 모두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19세기 초반에 산업혁명이 확산-심화된 것은 당시 그 지역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중부유럽을 거쳐 동유럽까지,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과 일본까지 확산되면서는 산업화의 모순이 제국주의로 나타났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겪었는데도 산업화의 물결이 가라앉기는커녕 전 세계로 번져나간 데는 더 큰 모순이 깔려있었다. 그 끝물에서 근대화를 진행한 우리 사회에서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 중에 이 모순으로부터 파생된 것은 없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은 불평등에서 나온다.

 

근대화가 추구한 근대성이 어떤 것인지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 보면 근대화정책의 타당성을 논할 수 있는 범위가 결정될 것이다. 넓은 지역에서 긴 시간에 나타난 현상이므로 근대성의 정체를 간단히 밝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근대화가 지향한 방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몇 가지 지표가 있다. 논의의 완결이 아니라 출발점 확보를 위해 스케치 수준의 그림을 그려본다.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생산력)은 산업혁명의 직접 산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중심의 정치사회 제도는 산업사회로의 구조 변화에 맞춰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조건은 산업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의 완결은 자본주의체제의 성립을 필요로 했다. 중국에서 1860년대에 서양의 산업기술을 들여오는 양무운동을 벌였으나 1890년대에 한계를 드러내고 변법운동으로 넘어간 데서 체제 변혁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는 경쟁의 심화를 위해 불평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 착취하는 강자와 착취당하는 약자가 모두 있어야 성립하는 체제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 격차가 커야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열강의 경쟁에서 훌륭한 시설과 제도를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착취 대상의 확보였다. 그래서 식민지 쟁탈전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의 세계적 구조에는 강자와 약자의 비율에 한계가 있다. 산업화를 먼저 이룩한 국가들이 열강의 자리를 차지해서 정원을 채워놓으면 그 후에 산업화를 시도하는 국가는 강자의 자리에 끼어들기 힘들다. 그럼에도 강자들은 약자들에게 산업화를 권한다. 약자도 산업화를 시도해야 강자 입장에서 착취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원이 많은 식민지라도 항만, 철도, 공장 등이 없다면 착취가 어렵지 않은가. 열강이 식민지에 대해 문명화를 내세워 체제 변혁을 유도한 것은 자기네 같은 강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먹잇감이 되라는 뜻이었다.

약자인 후발국 입장에서 한계가 주어진 산업화에 나서는 데는 자해행위의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을 처음에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동안 당하다 보면 현실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의미를 깨우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자해행위를 계속하게 하려면 약자의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Divide and rule”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목적을 위해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손해 속에서 조그만 이익을 얻는 매판세력이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이 세력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한국에서 근년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쟁 원리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한국을 불리한 위치로 몰고 가는 것인데, 이를 추진하는 지금의 매판세력이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 과거 매판세력의 입장까지 정당화하려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식민지시대의 매판세력인 친일파가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통해 매판적 역할을 계속해 온 끝에 이제 국제자본에 대한 종속성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과학을 향한 근대인의 신앙

 

1972년의 <로마클럽보고서> 이후 지속가능성이 전 세계적 과제로 떠오른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근대문명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자연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 태도의 바탕에는 과학의 전능(全能)’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과학을 통한 자연의 완전한 정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의 제약에 인간이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을 걱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이런 기술만능주의가 특히 맹위를 떨친 것이 제국주의시대의 사상적 분위기였다.

과학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의 전능에 대한 믿음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의 과학에 대한 믿음은 신앙차원이었다. 이런 깊은 믿음은 보편성에 대한 확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신앙의 교리라 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가 원자론이었다.

19세기 벽두에 돌턴이 제출한 원자론이 근대문명의 보편적 원리가 되었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원자론은 19세기 유럽인에게 과학의 전능, 나아가 인간의 전능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원자를 탐구하면 물질세계의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19세기에 발생한 사회과학도 원자론 관점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사회까지 확장한 것이었다.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사회도 독립적 개인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초창기 사회과학자들은 보았다. 원자의 탐구가 물질세계의 완벽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처럼 개인의 연구가 인간사회의 완벽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그들은 믿었다.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미시적 탐구가 완벽한 이해를 가져온다는 환원주의 경향으로 쏠렸다.

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재편성에도 원자론 관점이 적용되었다. 근대 이전의 국가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지만, 지역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의 중층적-복합적인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개중에는 중앙집권화가 비교적 많이 이뤄진 국가 형태도 있었지만, 근대국가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든 구성원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직접 상대하는 근대국가는 산업화와 함께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원자론의 세계관은 심리적으로는 개인주의, 제도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유행시켰다. 자유주의는 한쪽으로 개인의 경쟁을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를, 또 한쪽으로 개인의 권리를 중심에 두는 민주주의를 뒷받침했다. 19세기 말에 서양인이 자랑스러워하고 동양인이 부러워한 근대문명은 이 몇 가지 원리를 핵심 요소로 가지고 있었다.

원자론의 영향력이 절정에 올라 있던 19세기 말 과학계에서는 원자론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자기와 방사선 연구를 통해 원자 이하의 물질세계로 창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는 쪼개지지 않는(a-tom)’ 원자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사회를 원자론의 관점으로 보는 학술과 사상과 제도는 힘을 잃지 않았다.

물질세계도 인간사회도 유기체적 특성과 원자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직관으로 아는 것이다. 문명 발생 이래 대부분의 사회조직 원리는 두 가지 특성을 함께 감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19세기의 근대인은 유기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봉건제를 비롯해 모든 문명사회에서 나타났던 현상들을 야만으로 경멸했다. 이 극심한 사상의 편향성은 아주 특별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나타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인류사회가 처한 조건이 당시의 조건과 달라진 것으로 인식한다면 이 편향성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말은 바로 근대화의 종말

 

자본주의체제에 주기적으로 위기를 일으키는 모순은 어떤 것인가? 자본주의체제는 착취 대상으로서 저개발 상태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 발전 초기에는 산업화를 이룬 소수의 열강이 나머지 세계 모두를 착취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아무런 절제 없이 자본주의 원리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열강의 국내에도 미개발 노동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내 노동력이 개발과정을 통해 조직력을 키우면서 일방적 착취가 어렵게 되자 해외식민지에 의존하게 되고, 경쟁하는 열강의 수가 늘어나면서 식민지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말의 큰 위기가 제국주의시대와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원리를 완화하는 노력이 널리 일어났다. 유럽의 사회보장 발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노력을 가장 소홀히 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내부자원도 넉넉한 편인데다 냉전체제의 패권 위에 신식민지체제(neo-colonial system)를 통한 외부착취를 원활하게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특수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세계 평균의 5배를 넘는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미국 혼자만 절제 없이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과거의 열강이 모두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은 꽤 오래 잠복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로마클럽보고서>가 나오고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또 한 차례 큰 위기가 드러났다. 19세기 말의 위기가 산업화세력들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번 위기는 산업문명과 자연 사이의 충돌을 통해 더 근본적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 모순의 기본 양상은 불평등에서 동력을 얻는다는 데 있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열역학의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평형상태로 움직여가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체제 도입 초기에 착취 대상이던 대중은 체제 안정에 따라 중산층을 향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가 자연에 대한 착취를 격화시키는데, 그 한계가 1970년대부터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은 드러난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격화시킴으로써 패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반동적 선택이었다. 신자유주의 노선은 이전보다 더 큰 시장과 더 철저한 착취를 필요로 한다.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는 이 필요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권 붕괴 직후 어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다. 완벽한 해답이 존재한다는(그리고 그 해답이 실현되었다는) 근대적 신앙을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세계적 경제위기의 심화를 볼 때, 그런 신앙고백이 그처럼 힘차게 다시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자본주의체제를 대폭 수정하거나 대안을 마련할 필요를 아직까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노선에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개항기의 개화운동 이래 한국인은 자본주의국가로서 발전할 길을 150년간 찾아 왔다. 이 사다리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위만 바라보며 기어오르는 데만 몰두했다. 식민통치자와 독재자들은 한국인이 이 믿음을 떠나지 않도록 독려했다. 이 믿음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한 차례 냉철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굴기가 재검토를 더욱 재촉하기도 하고 참고의 대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왕후이(汪暉)는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근년 발전정책 성공의 열쇠였다고 주장한다.

 

비록 타이완해협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지만, 중국은 주권을 확립하고 고도로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정치적 위상을 찾아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정치적 위상을 바탕으로, 국민경제와 공업에서도 고도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체제를 형성했다. 이런 자주성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중국의 개혁개방의 길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1989년 이후 중국의 운명도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혁개방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에는 이미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민경제 체제가 존재했다. 이것이 개혁의 전제였다. 중국의 개혁은 내재적인 논리를 갖춘 자주적 개혁이고, 능동적 개혁이다. (<탈정치시대의 정치>(성근제-김진공-이현정 옮김) 19)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