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은 1922년 자유당을 제치고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지금까지 보수당과 정권을 다투는 양대정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00년 2월 노동자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 LRC)의 이름으로 출범해 그해 10월 선거에서 2석을 진출시키고, 1906년 2월 총선에서 29석으로 약진하고 나서 지금의 당명 “Labour Party”로 바꿨던 짧은 역사를 생각하면 정치 변화가 느린 것으로 소문난 영국에서 엄청난 고속성장이었다.

 

첫 약진의 계기가 된 ‘태프베일 소송’(1901)은 오늘의 한국에서도 참고의 가치가 크다. 보수당이 의석의 절반 이상을 잃고 정권을 빼앗긴 1906년 총선 패배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노동법체계 발전의 큰 계기가 된 소송이었다.

 

소송의 발단은 열차승무원통합협회라는 노동조합이 태프베일 철도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벌인 것인데, 애초의 분쟁은 회사가 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후 회사가 조합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데 있었다. 제1심에서 회사가 승소하고 항소심에서는 뒤집어졌다. 그런데 최종심을 맡은 상원에서 항소심을 다시 뒤집고 회사 손을 들어주면서 손해액 23,000파운드에 소송비용을 합해 42,000파운드라는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거액을 조합이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에 노동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분노했다. 노동분쟁이 일어날 때 노동자에게 유일한 합법적 투쟁방법이 파업이다. 파업에 따른 손해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파업이라는 투쟁방법마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1906년 총선으로 집권한 자유당은 즉각 산업분쟁법(Trade Disputes Act)을 통과시켰다. ‘가진 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옹호하던 민법의 영역을 넘어선 노동법체계 발전의 큰 계기로 해석된다.

 

보수당의 아성이 무너질 조짐이 느껴지기 시작한 1903년 자유당과 노동자대표위원회는 비밀리에 협약을 맺었다. ‘선거연대’ 성격의 협약이었다. 다음 선거에서 반 보수당 표가 갈라지지 않도록, 노동자대표위원회는 과도한 입후보를 자제하고 자유당은 상대방 후보 출마 선거구 30 곳에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따라 1906년 노동자대표위원회는 50명의 후보 중 29명을 당선시켰고 자유당은 183석에서 397석으로 곱절 이상 불리며 670석 중 과반수를 차지했다. 보수당은 아서 밸포어 당수마저 낙선하며 402석에서 156석으로 몰락했다. 영국 의회사상 가장 ‘혁명적’ 결과를 낳은 선거의 하나로 꼽힌다.

 

노동당의 출발점을 살펴볼 생각이 든 것은 지난 주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격화의 계기를 마거릿 대처 수상 시절의 탄광과 공장의 대거 민영화에서 흔히 찾는 것처럼, 스코틀랜드는 탄광과 공장이 많고 노동운동이 일찍 발달한 곳이었다. 1888년 8월 결성된 스캇노동당(Scottish Labour Party, SLP)은 지금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어 있는 스캇민족당(Scottish National Party, SNP)만이 아니라 노동당의 뿌리 노릇도 했다. 지금까지도 전국선거에서는 스코틀랜드가 노동당의 텃밭이다.

 

스캇노동당의 당수 로버트 커닝엄-그레이엄(1852-1936)과 사무총장 제임스 키어 하디(1856-1915)가 스캇민족당 및 노동당과의 연결고리였다. 커닝엄-그레이엄은 스캇민족당의 전신인 스코틀랜드민족당(National Party of Scotland)의 1928년 설립을 주도하고 스캇민족당이 1934년 세워질 때 초대 당수를 맡았다. 한편 하디는 스캇노동당의 노동운동진영을 발판으로 1893년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 ILP) 결성을 주도했고, 독립노동당은 노동자대표위원회와 노동당의 주축이 되었다. 하디는 1906년 노동당의 정식 출범 때 대표를 맡았다.

 

1888년 민족주의와 노동운동을 대표해서 스캇노동당을 함께 이끈 커닝엄-그레이엄과 하디는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도 기막히게 대조적인 배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디는 광부였다는 생부를 보지도 못하고 조선공인 계부 밑에서 자라나 7살부터 일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도 못 보냈지만 의붓아들이라도 무척 아꼈던 듯, 집에서 읽기, 쓰기라도 공부하게 도와준 덕분에 스무 살을 갓 넘겨서부터 조합운동의 활동가와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892년 스캇노동당 후보로 당선된 후 첫 등원에서 하디는 관례인 정장 대신 평상복을 입고 나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1892~1895년과 1900~1915년 18년간의 의회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의 지원 외에도 누진소득세제, 무상교육, 연금제도, 여성참정권의 도입과 상원 폐지를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평화운동에 진력했다.

 

하디의 1895년 재선 실패는 지나치게 감정을 담은 의회 연설 때문이었다고 한다. 1894년 웨일스의 폰티프리드 탄광에서 폭발사고로 251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은 일이 있는데 마침 황태자(훗날의 에드워드8세) 탄생으로 의회에서 축하 메시지를 채택하려는 참이었다. 하디는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는 말을 이 메시지에 넣을 것을 제안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심슨 부인과의 ‘세기의 사랑’을 예언한 것이었을까?

 

“이 아이는 이제부터 간신과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나겠지요. 자기가 월등한 존재라는 믿음을 갖도록 가르침을 받겠지요. 언젠가 자기가 통치하게 될 사람들과 그 자신 사이에 선이 그어지겠지요. 또, 지금까지 선례가 확립되어 있는 대로 세계일주 여행에 나서겠지요. 그리고 아마 그 여행으로부터 그가 평민 여성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새어나오겠지요. 이 모든 일의 중요한 점은 이 국가가 그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는 겁니다.”

 

한편 커닝엄-그레이엄은 이국적 배경까지 가진 부유한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 어머니가 스페인 귀족 출신이어서 영어보다 스페인어를 먼저 배웠다고 한다. 퍼블릭스쿨(해로우)을 다닌 뒤 브뤼셀에서 유학하고 아르헨티나의 목장을 경영하며 모험가로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등 20대까지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살았다. 그런데 1883년 부친 사망으로 귀국한 후 사회주의자가 되고 진지한 정치가가 되었다.

 

진지한 정치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유분방한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1886년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한 커닝엄-그레이엄은 이듬해 공식 발언에서 욕설을 썼다는 이유로 최초로 정직 당하는 의원이 되었다. 상원에 대해 “Damn!”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Wikipedia> "Robert Bontine Cunninghame Graham") 같은 해 11월의 ‘피의 일요일’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6주간 구류까지 살았다. 그는 1992년 자유당을 떠나 스캇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이래 의회로 돌아가지 못했다.

 

커닝엄-그레이엄이 오랫동안 큰 정치적 영향력을 누리면서도 의회활동을 오래 하지 않은 것은 재미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의 일류 미술가들을 후원하고 일류 작가들과 교류하며 살았는데, 체스터튼은 그를 “서문(序文)의 대가”라 칭했고, 버나드 쇼는 그의 인생이 “너무나 환상적인 것이라서 소설 내용을 그렇게 쓰면 독자들이 곧이듣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중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복간되는 것이 있다.

 

이번 주민투표에서 같은 뿌리를 가진 스캇민족당과 노동당은 찬성과 반대로 맞섰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두 당은 ‘스코틀랜드 자치 확대’라는 공동의 목표를 함께 이뤄냈다.

 

2012년 영국 보수당 정권이 주민투표 시행 방침에 동의할 때 여론조사는 독립이 “택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3년 8월 방침이 확정되고 11월에 스코틀랜드 정부가 ‘독립 백서’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장래>를 발행하자 찬성과 반대 사이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고, 투표가 임박해서는 역전 가능성이 짙어졌다. 불안을 느낀 영국 정부는 독립 찬성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자치의 대폭 확대 약속을 쏟아냈다. 보수당 내에서 “이것은 항복이 아니냐?”며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스캇민족당의 당수이자 스코틀랜드 수석장관인 알렉스 새먼드는 찬성이 44.7%에 그친 ‘실패’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많은 양보를 끌어냈다는 사실과 85% 가까운 경이적 투표율을 놓고 이번 주민투표를 큰 ‘성공’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노동당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고든 브라운 전 수상의 막판 분전이 각광을 받으면서 스코틀랜드 민심과의 끈끈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에 관계없이, 그런 주민투표를 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에게도 스코틀랜드인에게도 큰 승리요, 성공이다. 투표 결과에 따라 엇갈리는 득실을 놓고 마음 졸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결과든 감수할 수 있는 것이기에 주민투표를 시행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민족의 장래를 허심탄회하게 토론할 수 없는 상황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커닝엄-그레이엄의 유머러스한 말에서 배울 것이 많다.

 

“스캇 민족주의의 적은 영국인이 아니다. 영국인은 훌륭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며 정의의 외침에 지체 없이 응답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바로 우리들 가운데 상상력 없이 태어난 사람들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