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2일 저녁 무렵 동파키스탄을 강타한 사이클론 볼라 호는 20세기 최대의 자연재해 중 하나였다.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인접한 인도 벵골 지역도 영향권 안에 있었으나 피해가 훨씬 적었다. 사이클론 중심부가 그 지역을 향한 까닭도 있지만, 준비가 부족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인도에서는 그 전날부터 경계를 발동하고 있었는데,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야 경보를 발령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당시에는 동파키스탄이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무슬림 집거지역이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했는데, 파키스탄은 인도 동북부의 동파키스탄과 서북부의 서파키스탄 두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두 지역 중 면적은 서파키스탄이 훨씬 넓지만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더 많았다. 그런데 독립 후 국가권력을 서파키스탄에서 독점했기 때문에 동파키스탄에는 피해의식이 쌓여 있었다. 근거 있는 피해의식이었다. 독립 이래 동파키스탄에서 집행된 국가예산은 서파키스탄의 30~40% 수준이었다.

 

참혹한 재난을 맞은 동파키스탄 주민들은 인도의 인접 지역과 비교하며 자기네가 국가로부터 방치되어 있었다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심을 더욱 굳혀준 것이 정부의 무성의한 구호활동이었다. 예컨대 정부는 구호활동에 수송기 한 대와 경비행기 몇 대만을 내놓고 서파키스탄에 있던 헬리콥터는 보내지 않았다. 언론에서 지적이 있자 인도에서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아서 못 보냈다고 둘러댔다. 믿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해도 재난 구호를 위한 헬리콥터 이동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인도 정부가 즉각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구호활동에 별 쓸모가 없어서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런 와중에 총선거가 닥쳤다. 1956년 영연방을 벗어나 공화국이 된 후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군사독재 아래 있다가 이제 의회민주주의를 시작하려고 첫 총선거를 치른 것이다. 1970년 12월 7일 시행된 이 선거에서 동파키스탄의 지역당 아와미연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극도에 이른 동파키스탄인의 불만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300석의 지역구 중 162석이 동파키스탄에 있었는데 아와미연맹은 그중 2석을 빼놓고 석권했다. 10석의 여성 대표와 3석의 비 이슬람 대표까지 의회 총원 313석의 과반수였다. 줄피카르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이 81석으로 제2당이 되었다. 다른 당은 10석을 넘기지 못했다. (등록 유권자 56,941,500명 중 31,211,220명이 동파키스탄 주민이었고, 아와미연맹은 39.2%의 득표율을 올렸다. 파키스탄인민당의 득표율은 18.6%였다.)

 

예상 밖의 선거 결과 앞에서 파키스탄의 ‘민주화’ 일정에 급제동이 걸렸다. 건국 이래 파키스탄의 정치적 주도권은 군부건 민간이건 서파키스탄의 권력엘리트가 쥐고 있었다. 군사독재를 끝내는 ‘민주화’ 조치도 서파키스탄의 주도권 유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구가 많은 동파키스탄의 ‘선거 반란’으로, 서파키스탄에서는 한 석도 얻지 못한 동파키스탄 지역당이 정권을 쥐게 되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파키스탄 독립의 역사에서도 동파키스탄은 소외된 존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 독립운동이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이슬람 지역의 분리 독립을 추진하는 운동이 전 인도 이슬람연맹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힌두 인도인과 이슬람 인도인을 구분하는 ‘두 개의 민족’ 이론을 제창한 이슬람연맹은 1930년 “서북 인도의 무슬림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파키스탄 구상’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건국운동을 공표한 ‘파키스탄 선언’을 내놓았다. 그리고 1940년에는 건국방략을 구체화한 ‘라호레 결의’를 채택했다.

 

‘파키스탄’은 우르두어로 “순결한 자들의 나라”란 뜻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처음 나타난 1933년의 파키스탄 선언에서는 ‘PAKSTAN’으로 표기되었다. 이것은 무슬림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서북 인도의 다섯 개 지역 이름을 조합한 것이었다. 펀자브(P), 아프가니아(A), 카시미르(K), 신드(S), 발루키스탄(TAN). 벵골(동파키스탄)의 ‘B’는 없었다.

 

이슬람연맹의 주도권을 쥔 것은 펀자브와 신드 사람들이었다. 무슬림 주민이 많은 지역을 무슬림국가에 넣는 방침을 이슬람연맹이 이끌어냈기 때문에 동파키스탄은 수동적으로 파키스탄에 들어갔고, 건국 후에도 국가 운영에서 소외되었다. 파키스탄의 극심한 동서 불균형은 마치 지배국-식민지의 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건국 직후 우르두어를 국어로 지정하면서 동파키스탄 주민 대다수가 쓰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한 반발로 벵골어 운동이 일어났다. 아와미연맹은 중앙정부를 지배하는 이슬람연맹에 대항하는 정치조직으로 이 운동 속에서 세워졌고, 중앙정부의 동파키스탄 착취를 비난하며 자치권 확대를 계속 요구했다.

 

이제 의회제 도입을 위한 첫 선거에서 동파키스탄이 ‘표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서파키스탄의 권력엘리트 집단은 사실 민주화의 동기가 별로 강하지 않았다. 국제적 압력 때문에 의회제를 도입하려는 것인데 동파키스탄 지역당에게 정권을 내주는 것 같은 구조적 변화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 군사독재자인 야히야 칸 대통령과 부토 인민당 당수의 입장이 일치했다. 그들은 동서 양쪽에 별도의 수상과 정부를 두고 국가를 연방체로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 아와미연맹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당수는 1966년에 요구했던 ‘6개항’을 다시 요구했다. 6개항의 요지는 동파키스탄의 독립성, 특히 경제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의회 개회가 예정되어 있던 1971년 3월 25일까지 상황은 갈수록 험악해져 갔다. 아와미연맹은 3월 7일부터 불복종운동을 주도했고 중앙정부는 동파키스탄의 병력을 증강했다. 3월 10일부터 3일간 파키스탄항공은 일반 운항을 전면 중단하고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시작되었다. 파키스탄 판 ‘화려한 휴가’였다.

 

서치라이트 작전의 목표는 이런 것이었다. (<Wikipedia> "Operation Searchlight")

 

1.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동시에 작전을 개시할 것.

2. 정치가, 학생운동 지도자, 문화운동 지도자, 교육계 지도자를 최대한 검거할 것.

3. 다카에서는 작전의 백퍼센트 성공을 기할 것. 다카대학을 비우고 수색할 것.

4. 주요 도시 장악에 화력의 무제한 사용을 허가함.

5. 전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지역 내 및 국외와의 통신을 모두 차단할 것.

6. 벵골인 병력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여 전투력을 박탈할 것.

7. 야히야 칸 대통령은 부토 씨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대화를 계속하고 요구를 수용할 것처럼 아와미연맹을 속일 것.

 

작전 개시 직후 아와미연맹의 라만 당수는 체포되었지만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를 피해 인도로 도망했고, 즉각 방글라데시 독립을 선언했다. 정권 측은 한 달 이내에 벵골인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목표였다. 야히야 칸은 “3백만 명쯤 죽이면 나머지는 꼼짝 못할 거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리한 목표였다. 당시의 동파키스탄 계엄사령관 시에드 모하마드 아산 장군과 주둔군 사령관 샤하브자다 야쿠브 칸 장군을 비롯한 핵심 지휘관 몇 명이 민간인에 대한 공격에 반대하며 사임하거나 교체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벵골인은 12월 16일까지 9개월 가까운 독립전쟁을 통해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에 성공했다.

 

파키스탄 정권의 무모한 작전은 또 한 차례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부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12월 3일 인도에 선제공격을 가한 ‘칭기즈칸 작전’이었다. 이를 빌미로 인도군의 전면 진군이 시작되었고 불과 13일 후 동파키스탄에 배치되어 있던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방글라데시 독립군(무크티 바히니) 앞에 투항함으로써 방글라데시 독립이 결정되었다. 9만3천 명의 전쟁포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규모였다고 한다.

 

2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이 독립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의 잔인성을 대표한 인물이 티카 칸 장군이었다. 서치라이트 작전 기획의 중심인물인 티카 칸은 작전 실행을 위해 3월 7일 동파키스탄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 밑에서 일한 아밀 압둘라 칸 니아지 장군은 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3월 25일 밤 티카 장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평화스러운 밤이 비명과 울음과 불길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티카 장군은 길을 잘못 든 자기 동포가 아니라 원한 쌓인 적군을 대하는 것처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공격수단을 동원했다. 그 군사행동은 칭기즈칸과 할라쿠 칸의 부하라와 바그다드 학살보다 더 노골적인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티카 장군은 민간인 살해와 초토화를 전투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땅’이라고 말했다.”

 

티카 칸과 아밀 니아지 두 사람의 이후 향배가 흥미롭다. “벵골의 백정”이란 별명을 얻고 곧 동파키스탄을 떠난 티카 칸은 서파키스탄에서 인도군과 대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애초부터 서치라이트 작전에 반대하던 니아지 장군은 동파키스탄의 지휘권을 티카 칸으로부터 물려받고 7개월 동안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가 인도군-독립군에게 항복했다. 인도군의 본격 진공을 불러온 칭기즈칸 작전을 니아지 장군은 통보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밀 니아지(1915-2004)는 1년 이상 방글라데시에 포로로 잡혀있었고, 돌아온 후에는 항복했다는 사실로 권력엘리트에게 소외당했다. 부토 정권의 조사단은 사태의 많은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니아지는 이에 불복, 군사재판을 청원했다. 군사재판에서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있던 티카 칸은 허락하지 않았다. 부토 수상은 그의 계급, 훈장과 연금을 박탈했다. 울분 속에 살던 니아지는 1998년에 이르러 회고록 <동파키스탄의 배신>(Betrayal of East Pakistan)을 발간했다. 방글라데시 분리 독립의 책임을 야히야 칸, 부토, 티카 칸 등에게 묻는 내용이었다.

 

한편 티카 칸(1915-2002)은 부토 수상 밑에서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내다가 1977년 7월 쿠데타 때 부토와 함께 체포되었다. 1979년 4월 부토가 처형된 후 풀려나 인민당 사무총장으로 당을 이끌다가 1988년 베나지르 부토가 집권하자 펀자브 주 지사에 임명되었고 1990년 부토의 실각에 따라 물러났다. 부토 부녀와 영욕을 함께 한 것이다.

 

1971년의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부토 일가 영욕의 큰 출발점이기도 하다. 1970년 12월 총선거 이후 사태 악화의 큰 책임이 아와미연맹 정권을 거부한 부토에게 있었다. 그런데 폭력사태가 확대되자 부토는 야히야 칸 대통령과 군부에 책임을 미뤘다. 야히야 칸과의 갈등이 깊어진 끝에 반역죄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전쟁이 최악의 결과로 끝난 며칠 후 야히야 칸이 하야하고 대통령직을 부토에게 넘겨서 부토 시대를 열었다.

 

파키스탄 몰락의 길을 살펴보며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같은 민족이면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분리 독립의 길을 걷고, 같은 종교를 가진 벵골인의 신앙이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라며 차별하다가 방글라데시 분리 독립을 보게 되었다. 그 파탄의 원흉인 서파키스탄 패권주의를 반성하지는 않고 패전의 책임을 군부에 씌우고는 패권주의의 주동자 부토를 지도자로 받들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사회에서 사이클론 볼라 호와 같은 참사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위기 속에서 기회만을 찾은 부토 정권이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부토 정권은 앞서 말한 것처럼 1977년 쿠데타로 전복되고 줄피카르 부토는 2년 후 51세 나이로 처형당했다. 그 딸 베나지르 부토가 그 뒤를 이어 인민당을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5년간 정권을 장악했으나 2007년 12월 54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부토 부녀의 정치적 지도력은 파키스탄에 축복이었을까, 재앙이었을까?

 

독립을 달성한 방글라데시의 진로도 순탄치 않았다. 무지부르 라만 아와미연맹 당수가 초기 정권을 이끌다가 1975년 8월 암살당한 후 정치의 불안정이 계속되고 방글라데시는 빈곤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런데 부토의 딸이 부토의 뒤를 이은 것처럼 라만의 딸 셰이크 하시나도 라만의 뒤를 이어 1981년부터 아와미연맹을 이끌면서 1996-2001년, 그리고 2009년 이후 수상직을 맡고 있다. 금년 초 아와미연맹의 총선 승리로 그의 수상직은 계속되고 있다.

 

군부의 힘이 강하기는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나 큰 차이 없다. 그런데 셰이크 하시나가 베나지르 부토에 비해 문민정치에 더 큰 성공을 거두는 까닭이 무엇일까? 민의를 받아들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베나지르 부토가 1993년 두 번째 수상에 취임했을 때 지지자들은 그에게 ‘철의 여인’(Iron Lady)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영국의 대처 수상 못지않은 강인한 여성정치가로서 규제 완화, 국영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 대처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본받은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런데 이 별명을 대처에게 붙여준 소련 기자가 ‘불통’의 의미를 그 별명에 담은 사실을 베나지르 부토의 지지자들은 알고 있었을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