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안 명예가 걸린 얘기니까 주인공 이름을 '모아무'란 가명으로 부르겠다. 모아무는 명문가 자제로 어릴 때 문장과 서화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신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소년 시절 주색잡기에 천재성을 드러내면서 일찍이 인생 뒷골목에 들어섰다. 나이 스무 살이 되면서는 과거가 있어도 남의 일로 여기고 기방과 골방에서 주색과 잡기에 몰두할 시간을 아끼게 되었다. 집안에서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아 궁색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사치와 향락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니 본인도 괴롭고 주변사람들도 괴로운 인생이 되었다.

 

어느 해 장안 거부 황아무가 이름난 명장을 시켜 병풍 틀 하나를 마음먹고 만들었다. 당대 명인의 작품을 얻어 후세에 길이 남을 명품을 만들 생각으로 작가를 수소문했다. 그 무렵 노름빚과 외상 화대가 쌓여 꼼짝도 못할 지경에 있던 모아무가 그 소문을 듣고는 인생의 돌파구를 여기서 찾을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아무를 찾아가 자청하고 나서니 그의 소시쩍 명성을 기억한 황아무는 기이한 인연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응락했다.

 

모아무는 황아무의 집 별채에 거처를 정하고 모처럼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십여 년 내팽개치고 있던 서화에 손대려니 준비기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심신을 가다듬는 데 한 달, 붓 다듬는 데 한 달, 먹 가는 데 한 달, 석 달 동안 산해진미와 계집종의 안마 서비스로 칙사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더 이상 늦출 핑계가 없어졌을 때 모아무는 드디어 작품 제작에 나섰다. 맑은 날 새벽 별채 앞마당에 병풍 틀을 펼쳐 세우고 한쪽 옆에 먹물을 담은 물통과 빗자루 같은 붓들을 갖춰놓았다. 황아무의 가족과 하인들이 '역사의 현장'을 구경하러 둘러서 있었다.

 

모아무는 여러 날 동안 궁리해 둔 행동에 나섰다. 제일 큰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병풍의 왼쪽 끝에서부터 한 일 자를 쭈욱~ 그어나갔다. 그어나가면서 발걸음을 가속시키다가 오른쪽 끝에 이르자 붓을 내던지고 같은 방향으로 내달려 재빨리 담을 넘어 도망치려 했다. 다년간 노름빚에 시달리면서 몸에 익힌 삼십육계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담 꼭대기를 딛은 발이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석 달 동안 사기꾼을 헛대접하고 병풍 틀까지 망친 황아무는 손해가 막심했지만, 장사꾼답게 손해를 받아들일 줄 아는 위인이었다. 모아무의 장례를 박하지 않게 치르도록 도와주고 병풍 틀은 창고에 처박아두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 지났을 때 청나라의 저명한 박물군자 동아무가 황제 사절의 부사로 한양에 왔다. 저녁무렵 객관 마루에서 바람을 쏘이고 있는데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서 유심히 바라보니 저쪽 어딘가에서 서기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위치를 유념해 뒀다가 이튿날 아침 역관을 앞세우고 찾아가 보니 황아무의 저택이었다.

 

진짜 칙사를 맞아 황송해 하는 황아무에게 동아무가 청했다. 이 집에 빼어난 보물이 있는 것 같은데 구경 좀 시켜달라고. 황아무는 어리둥절했다. 제딴에 모은다고 모은 게 좀 있기는 하지만 천하의 동 대인 눈에 찰 만한 건 없다고 대답했다. 동아무는 지나친 겸손이시라며 거듭 청했고, 황아무는 가장 아끼는 물건 몇 가지를 보여줬다. 역시 천하의 동 대인 눈에 차는 물건은 없었는데, 동아무는 창고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창고 문을 열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망쳐진 병풍 틀을 펼쳐보기에 이르렀다. 병풍을 펼치자 동아무는 옷깃을 여미고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허, 참... 사람 목숨 하나 들었군."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