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령 조작 사건은 이동복이 혼자 저지른 일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집단의 범죄행위가 드러났을 때 “개인의 일탈”로 미뤄버리는 ‘꼬리 자르기’는 통상 사용되는 수법이다. 정말로 개인의 일탈로 인한 단독범행인지, 조직범죄를 감추기 위한 꼬리 자르기인지는 범죄의 동기와 수단을 검토하면 대개 판별된다.

 

예컨대 윤창중 추행 사건은 동기가 개인적인 것이고 조직의 도움 없이 혼자 저지른 것이므로 단독범행이 분명하다. 반면 청와대 직원들의 검찰총장 ‘찍어내기’ 관여는 동기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불법 조사를 각 개인의 힘만으로 행한 것이 아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조직범죄의 의심을 벗어나기 힘들다.

 

회담 결렬을 목적으로 한 이동복의 훈령 조작을 소신 관철이라는 개인적 동기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짓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훈령을 차단하고 조작하다니. 이보다 더 심한 ‘국기 문란’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그 결과인 남북관계 파탄이 몰고 올 국가적 규모의 이해관계 변동은 한 개인이 바라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이동복의 범죄는 혼자 힘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연 안기부장과 엄삼탁 기조실장이 할 일을 않거나 안할 일을 해줘야 회담 결렬을 위한 조건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부수적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동복이 결국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것도 범행의 진짜 주체인 배후세력의 힘 덕분일 수밖에 없다.

 

이 조직범죄에 참여한 사람의 대부분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맡은 반면 이동복은 현행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감출 수 없는 방법으로 저지르는 역할을 맡았다. 총대를 멘 것이다. 그에게 총대를 메워준 것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이 범죄가 너무나 대담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미국의 네오콘 세력과 CIA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국, 특히 부시 정권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여 가면서까지 북한의 고립을 풀어주지 않으려고 기를 쓴 사실을 놓고 볼 때, 미국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 떠오른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 해소로 인해 네오콘의 기세가 가장 수그러들었을 때였다.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를 돕기 위해 1992년 팀스피릿 훈련까지 취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선거 와중에서 적극적 공작이 어려울 때였다. 특별한 증거가 없는 한 미국의 입김이 이 사건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가능성에는 고려할 여지가 크지 않다.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동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더 많았다. 앞에서 소개한 임동원의 회고도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연 당시의 김영삼 세력이 진행 중인 고위급회담의 결렬을 바라고 있었을까?

 

그 시점까지 김영삼이 냉전체제 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에 관해 전향적 태도를 보인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완상을 통일부총리에 임명하자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는 평화주의자들이 큰 기대를 걸었다.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도 김영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한완상이 부총리를 할 때에 통일정책 평가위원으로 위촉된 것을 계기로 하여 93년 4월 13일에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리영희는 스스로 “‘문민시대’라는 말을 되풀이해 사용”하면서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에 상당한 신뢰”를 보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관은 이전 정권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 확산 금지조약 탈퇴라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인모 씨 북송을 결정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편 1권 268쪽)

 

그러나 김영삼이 평생의 라이벌로 여긴 김대중이 남북관계 해결에 신명을 바친 진지함에 비하면 그의 남북관계 이해는 피상적인 것이었고 그와 관련된 태도는 정략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김대중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를 반동적인 태도로 몰고 간 측면도 느껴진다.

 

(김영삼은) 93년 12월 한완상을 물러나게 했으며, 이후 대북정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오락가락 문제와 관련, <문화일보> 기자 김교만은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적 기반이나 장기적 비전이 없었다”며 “따라서 누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가에 따라 대북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한완상의 퇴진은 그가 영국에서 귀환한 김대중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선물로 보낸 게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영삼이 화를 냈다는 것이다. 한완상의 경질은 김영삼의 통보가 아니라 경질 1시간 전 비서실장 박관용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이루어졌다. (강준만 위 책 337쪽)

 

1990년 1월의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 내에서 벌어진 노태우와 김영삼 사이의 갈등과 힘겨루기에 관해서는 당시에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었거니와, 20년 넘게 지난 이제 그 마지막 단계의 양상을 노태우의 회고로 다시 확인해본다.

 

나는 대권 후보가 너무 일찍 부각되는 것은 우리 현실로 보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김 대표 측에서는 대권 후보가 조속히 가시화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합당을 했으면서도 우리 측을 확고하게 믿는 자세는 아닌 듯했다. ‘이용만 당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버림을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직접간접으로 김 대표를 차기 대권 후보로 보장받으려고 했다. 국민들에게도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애썼다. (...)

 

합당 목적에 있어서도 서로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와 여당은 국정을 원만히 수행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차기 정권을 담보받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노태우 회고록>(조선뉴스프레스 펴냄) 상권 500-501쪽, 밑줄은 필자가.)

 

합당 2년 후인 1992년 시점에서 노태우는 정국 주도권이 차기 후보에서 넘어가는 것을 늦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밑줄 친 단어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근 2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노태우의 의식 속에서 ‘그들’과 ‘우리 측’은 구분되어 있다.

 

김영삼은 여당 대표로서, 그리고 1992년 5월 이후에는 여당 대통령후보로서 현직 대통령과 별개의 권력 거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후보 선출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노태우의 ‘우리 측’과의 대립을 통해 입지를 확장해 왔고, 후보가 된 후에도 노태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힘썼다.

 

문제의 제8차 고위급회담이 진행 중이던 9월 16일에 회담 대표로 평양에 가 있는 정원식 총리의 경질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 시점에 그런 주장을 내놓다니 주장의 타당성에 관계없이 김영삼의 악착스러움을 보여주는 일이다. 노태우는 이틀 후 민자당 탈당으로 이에 응수했다. 훈령 조작이 저질러지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의 일이다.

 

9월 23일의 고위전략회의에서 훈령 조작 사건 중 최소한 이동복의 범죄 행위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응분의 조치가 취해질 수 없었던 것은 대통령선거 상황 때문이었다. 권력을 참월당한 노태우 입장에서도 민자당의 선거 패배를 불러올 조치는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자당 탈당을 통해 극단적 조치의 위협을 풍기기는 했지만 그 위협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도끼 가진 자가 바늘 가진 자를 못 당하는 법인가 보다.

 

김영삼이 훈령 조작의 물의에 불구하고 이동복을 계속 기용한 것을 보면 이동복의 범죄에 김영삼 측의 비호가 있었을 개연성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김영삼은 1992년 가을, 대통령선거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고위급회담의 결렬을 정말로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에 정략성이 있었다고 하는 강준만의 지적은 옳다. 그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내세우고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 한 정략적 의도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세가 전적으로 헌신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세계적 변화에 부응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발전을 바라보았다는 점을 평가해 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략적이기는 했어도 반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도 북방정책에 대한 기본자세는 노태우와 같은 틀이라고 나는 본다.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발전해 준다면 그것을 자기 공로로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정략성이 도를 지나쳤다. 노태우가 북방외교의 성과를 다 따 먹는 것을 가로막아야 자기 몫이 늘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동복의 훈령 조작을 비호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김영삼이 당시 남북관계를 파탄내야 한다고 작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당장 진행 중인 고위급회담에 일시적으로 제동을 걸 정략적 의도 정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의 파탄을 더 분명히 원하는 세력이 김영삼의 정략적 의도를 이용함으로써 훈령 조작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세력이었을까? 군부와 안기부의 대결주의 세력이 얼른 떠오른다. 그런데 이번에 이동복의 이력을 검토하면서 새로 떠오른 생각이 있다.

 

1937년생의 이동복은 한국일보 기자로 활동을 시작했고,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2년부터 10년간 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부대표를 지낸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끌어들인 것이라 한다.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년간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지내고 1991년에 안기부장 특보로 들어가 대북정책에 다시 종사하게 되었다.

 

1971년 이래 대북정책 전문가로 활동해 온 이동복의 경력 중 특이한 대목 하나가 이번에 내 눈길을 끌었다. 통일원 대화사무국장을 그만둔 1982년부터 1988년 총선 출마 때까지 6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대목이다. 1993년 6월 10일자 <시사저널>의 “돌아온 ‘남북회담 실세’” 기사에 이렇게 나와 있다.

 

중앙정보부 남북대화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를 약화시키는 차원에서 대화사무국을 통일원으로 편입시키자 초대 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이범석 국토통일원장관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그는 보따리를 싸서 나와버렸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당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었다. 이회장은 영어를 잘하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강한 이씨를 그룹회장 고문으로 앉혔다. 이후 그는 삼성항공 부사장, 삼성의료기 사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기업인으로 지내는 동안에도 남북회담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삼성에 있으면서도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삼성에 있으면서도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 쪽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영어를 잘하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강한” 일반 인재들에게 바랄 수 없는 그만의 채용 자격이었을 것이다. 당시 대기업도 사업전략 결정을 위해 남북관계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2년 당시 경쟁기업 대우와 현대가 대북관계 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던 데 반해 삼성은 큰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후 남북관계의 퇴행은 대우의 몰락과 현대의 쇠퇴를 위한 배경조건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오늘날 삼성이 누리는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는 데 1992년 이후의 남북관계 파탄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때는 대기업이 국가 중대사에 주동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때였다. 쟁쟁한 재벌이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해체되어 버리는 것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정권의 비호만을 업고 재벌의 꿈을 부풀리는 사업가들이 난무하고 있던 때였다. 재벌을 권력에 기생하는 존재 정도로 당시 사람들은 보고 있었다. 이동복의 경력 중 ‘삼성 6년’이 눈에 띄어도 무심히 지나치기 쉬웠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실토하는 세상이다. 삼성 엑스파일과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보며 누구도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다. 삼성의 철저한 ‘인맥 관리’가 20년 전에는 없었겠는가? 6년간 삼성 임원을 지낸 이동복이 1992년에 삼성과 아무런 커넥션이 없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1987체제’ 안에서 제일 큰 권력을 획득한 것이 대기업이다. 이제 돌아보면 1992년 시점에서도 삼성, 현대, 대우의 3대 재벌은 국가권력에서 풀려난 상황을 각자 나름대로 활용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현대와 대우는 남북관계 전개에서 맡을 역할에 기업의 명운을 걸고 있었고, 정주영은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서서 비록 스스로 당선을 바라보지는 못하더라도 판세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선출된 권력의 향배에 관해서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많이 있다. 하물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움직임에 관해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도 못 된다. 군사독재가 끝난 대한민국의 진로에 대기업이 작용한 몫에 비해 그 실상은 너무나 가려져 있다.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이동복과 삼성의 커넥션 같은 것은 그 개연성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