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일전을 빕니다."

 

오늘은 편지지 아닌 한글파일로 메일을 씁니다. 지난 주 메일 받고 바로 답장 쓰고 싶은 걸 꾹 참았어요. 이 선생에게 메일 쓸 때 생각나는 대로 내 얘기만 하기 바빴는데, 한 번쯤 차분하게 이 선생 입장에 생각을 모아보고 싶어서요.

 

근대라는 잣대를 거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나는 ‘탈근대’ 추세를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별로 안 읽어봤어요. 딜레탕트 습성이 깊이 배어서 아무리 중요한 공부라도 억지로 힘들여 하는 공부에는 손이 안 가요. 재미있는 공부가 얼마든지 있는데, 억지로 뭐가 되려고 애쓰기보다 생긴 대로 노는 게 ‘건강한 공부’라고 우기고 싶어요.

 

그래도 가끔 뒷골이 당겨 조금씩 읽어본 결과는 피상적인 인상 정도인데, 근대성을 비판한다는 담론 방법이 근대적 방법에 묶여 있다는 데서 일어나는 부담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전환기의 선지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짐일까요? 그래도 선지자들의 고난과 희생 덕분에 형편이 좋아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분명히 ‘탈근대’를 의식하면서 글을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의지하지 않고도 독자들에게 생각을 전할 수 있는 길이 넓어져 감을 느낍니다.

 

근대와 거리를 두려 애쓰면서 ‘친중파’로 읽힌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죠. 근대 이전의 ‘전통’이 근대 이후의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전통의 밑천을 제일 잘 갖춘 것이 중국이니까. 내용도 풍성하고 정리도 잘돼 있죠.

 

근데, 친중파 아니라고 뻗댈 필요가 뭐 있나요? 그 말이 가진 의미의 스펙트럼 중 나쁜 쪽에만 매달려 방어 자세에 묶이기보다, 다른 쪽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러 나서는 편이 더 실속 있는 전략이 아닐까요?

 

담론의 성패가 과학적 승부로 집약되던 근대적 상황이 바뀌어간다고 봅니다. 갑이 틀렸으니까 을이 옳다고 우기기보다는, 갑보다 을의 관점에 더 많은 사실이 더 많이 담길 수 있다는, 요컨대 을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는 주장이 더 효과적인 담론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사학도 ‘역사과학’보다 ‘이야기역사’로 흘러가는 추세를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에서 제시한 것으로 봅니다.

 

“아는 것의 8할만 말하라”는 것은 참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지식 중에는 믿음의 등급에 큰 편차가 있는데, 그 등급을 의식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서 파악하고 있는 범위는 얼마 안 됩니다. 아는 걸 다 털어놓으려는 강박에 몰리면 이 등급 차이를 표현할 기회가 없죠. 발언을 줄이면 지식 중 일부만 선택해서 내놓게 되고, 이 선택 과정에서 등급 차이가 저절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지식 중 확고한 믿음이 뒷받침해주는 범위가 발표되고, 듣는 사람, 읽는 사람들은 힘과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선생께 충고랄까 조언이랄까 드린다면...

 

아는 걸 다 말하려는 욕구를 없애려 들지는 말기 바랍니다. 내 취향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나름의 장점이 있는 취향이 분명해요. 그냥 생긴 대로 노시되, 조금 다른 영역, 말과 글을 아끼는 영역도 하나 따로 만들어 별도로 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말하기, 글쓰기의 목적에 따라 몇 할 정도 내놓는 게 좋을지 저절로 감이 잡혀갈 것 같아요. 사실 나는 8할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체질과 취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죠.

 

이 선생 편지 다시 읽다가 “어른 흉내”란 말에서 다시 피식! 웃음이 나오네요. 예전 같으면 ‘중년’으로 통할 연세인데... 요즘 ‘연세 인플레’가 심하죠? 글자대로 하면 ‘중년’이 딱 맞는 말이죠. 청년의 측면과 장년의 측면에 양쪽으로 접해 있는 나이.

 

그러고 보니 방금 말한 표현의 두 가지 영역을 청년과 장년의 양면에 대응시킬 수도 있겠습니다. 맞아요. 확신이 서지 않아도 생각나는 대로 말 막하다가 두들겨 맞는 청년의 열정과 한 번 정색을 하고 나서면 누구도(국정원 직원과 일베충 말고)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장년의 위엄 어느 쪽에도 적어도 당분간은 묶이지 않기 바랍니다.

 

며칠 전 유시민 선생 만나 자료에 대한 설명 좀 들었는데, 노무현재단에 확보되어 있는 자료가 내게는 충분할 것 같네요. 아마 다음 주 중 재단에 찾아가 자료 검토를 시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재단 위치가 편리한 위치라 다행이네요.

 

노무현 관계자료 외에는 현대사 자료를(문서 등) 적극적으로 파고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연구자들이 정리해 낸 범위만 참고하려고요.

 

내 서술은 노무현 개인의 성장과 전 세계적 변화의 추세를 두 축으로 삼고, 두 축 사이를 노무현의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을 통해 맺어 나가려 합니다. 이정우 교수나 유시민 선생과 얘기하다 보면 역사에 관한 노 대통령의 언급에 대한 회고가 불쑥불쑥 나오는데, 역사 생각을 참 많이 한 분 같습니다. 연설문 등 관계자료에 꽤 많이 나타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음 주부터 자료 검토를 시작하면, 한 달 내에 구체적인 작업계획을 뽑아낼 수 있겠죠. 작업기간과 원고 분량을 빨리 판단해야 프레시안 연재 계획부터 세울 수 있을 텐데, 내년 초 집필을 시작해서 주 60매씩 2년간 총 4~5천 매로 맞출 수 있으면, 생각합니다.

 

여름이 다가오네요. 계획대로 베트남으로 옮겨가게 되는지? 그렇게 되면 한국에도 얼마간 들르겠지요? 한 번 만나서 느긋하게 얘기 나눌 기회도 갖고 싶네요.

 

김기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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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도 배달 실패... 무슨 문제인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