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합국의 조선 독립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선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약속은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출발했다. 그에 앞서 1941년 8월 영국과 미국이 작성한 대서양헌장에서 조선을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하는 연합국의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카이로선언의 배경이 되었다. 대서양헌장과 카이로선언이 나온 시점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헌장과 선언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1941년 8월 14일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의 플래신셔 만에 온 처칠 수상이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 오거스타 호로 옮겨 타 프랭클린 대통령과 만났다. 수상과 대통령으로서 첫 만남이었고 2년 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첫 만남이기도 했다.

 

유럽을 휩쓰는 추축국의 위세 앞에 영국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였다. 독일이 그 동안 미뤄뒀던 소련 침공을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판단 아래 결행한 것이 달포 전의 일이었다. 소련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앞에 처참하게 밀리고 있었고, 영국에게는 의지할 만한 연합국이 없을 때였다. 미국은 영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뉴펀들랜드 섬의 대서양회담은 영국이 미국의 참전을 간청하는 자리였다.

 

대서양헌장은 미국에 대한 영국의 항복문서였다. 피압박민족의 독립, 자원과 무역의 개방 등 연합국 전쟁 목적의 새로운 규정으로 영국이 식민제국으로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고비였다. 미국 여론과 의회를 참전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했던 영국의 양보였다. 옛 슈퍼파워 영국 대신 새 슈퍼파워 미국이 원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기본 원리가 대서양헌장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4개월 후 미국이 정식으로 참전했다. 참전의 직접 계기는 진주만 습격이었지만, 그 습격도 대서양헌장 발표 이후 미국의 영국 지원이 강화된 결과였다. 미국이 일본의 자원 획득 활동에 강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회피하던 일본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2년 후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이 열렸다. 소련과 미국의 참전 이후 추축국의 위세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고 1943년 들어서는 연합국의 공세가 추축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와의 정전협정은 연합국의 궁극적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의 끝은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일본 문제를 다룬 11월의 카이로회담과는 일본과 교전하지 않고 있던 소련이 빠졌고, 독일 문제를 다룬 12월의 테헤란회담에는 중국이 빠졌다.

 

카이로회담의 조선 독립 약속에는 한편으로는 대서양헌장의 민족자결주의 실현이라는 뜻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이 아직 독일군 장악 아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이 전세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어준 최근의 경험이 있었다. 추축국의 내부 결속을 와해시키는 전략은 그 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도 성과를 거두는데, 조선 독립의 약속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본제국의 결속력 약화를 노리는 목적이 있었다.

 

 

2. 조선과 오스트리아, 신탁통치 결정의 의미

 

카이로선언이 조선 독립을 약속한 의미를 바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 그 몇 주일 전의 모스크바선언이다. 미-영-소 3국 외상회담에서 작성된 이 선언에 “이탈리아에 관한 선언”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선언”이 들어 있는데, 후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연합왕국과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아메리카합중국 세 나라 정부는 히틀러 침략의 첫 희생물이 된 나라인 오스트리아가 독일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에 합의한다.

 

3국은 1938년 3월 15일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강제한 합방을 무효로 간주한다. 그 시점 이후 오스트리아에 일어난 변화에 3국은 구애받지 않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가 복원되고, 그럼으로써 오스트리아인 자신과 그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이웃 여러 나라 주민들이 항구적 평화의 불가결한 근거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향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3국은 함께 희망함을 선언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는 피면할 수 없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인 스스로의 노력이 최종적 처리에서 감안되리라는 사실을 오스트리아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카이로선언에서는 연합국의 전쟁 목적이 영토 획득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밝힌 다음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영토의 반환(대만과 만주 포함)과 함께 조선 독립 방침을 밝혔다. “조선은 필요한 과정을 거쳐 자유와 독립을 얻을 것”(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이라는 간단한 내용이다. 이 간단한 내용에 연합국의 어떤 뜻이 얹혀 있던 것인지, 오스트리아 독립에 관한 모스크바선언 내용이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연합국의 눈에는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위치가 비슷하게 보였던 것이다. 두 나라는 합방을 통해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일부가 되어 있었는데 독일, 일본과 다른 자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연합국이 승전할 때 두 나라를 독일과 일본에서 떼어내는 것은 두 전범국의 약화를 위해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방침을 미리 천명할 경우 두 나라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을 촉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연합국은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연합국의 이런 희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하지만, 연합국 눈에는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다. 소련-영국 등 연합국 군대에 백만 명 이상 종군한 폴란드인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임정 주석 김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 소식에 오히려 가슴을 쳐야 했던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조선 국내에서도 일본제국 해체를 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도 조선도 “최종적 처리”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10년, 조선은 5년의 신탁통치가 부과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군소리 없이 신탁통치를 감수하고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거센 반탁운동 때문에 미-소간 합의가 깨어지고 1948년의 분리 독립을 거쳐 내전을 치렀다. 내전 후에도 조선민족은 두 개 국가로 갈라진 채 서로 적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3. 미국과 소련, 조선 점령의 의도

 

이제 종전 시점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독일은 1945년 5월 8일에 항복했고 일본은 8월 15일에 항복했다. 일본과의 전쟁에는 미국과 중국이 주역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전쟁 수행능력이 약했기 때문에 승리의 주역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제국 처리의 칼자루를 쥐는 데 다른 연합국의 이의 제기가 별로 없었다.

 

일본제국 처리를 놓고 미국의 주도권에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연합국이 소련이었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겪으며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라였고 일본제국과 국경을 접한 나라였다. 그리고 종전 당시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다. 또한 소련은 사회주의국가였기 때문에 이미 유럽의 전후 처리에서도 사회주의 확산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는 양상이 시작되어 있었다.

 

1943년 말 카이로와 테헤란의 정상회담에서 추축국에 대한 기본전략이 정해졌는데, 독일을 꺾는 데 우선 연합국의 역량을 집중하고, 그 다음에 일본을 요리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다가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일본에 개전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독일과의 전쟁에 소련의 역할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일본 쪽 부담은 지우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그 방침에 따라 소련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 진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렸고, 일본은 곧 항복했다.

 

우리는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 항복의 직접 원인인 것처럼 배워 왔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소련군 참전을 일본 항복의 더 중요한 계기로 보는 관점이 연구자들 사이에 확산되어 왔다. 그 관점에 따르면 미국의 원폭 투하 의도도 일본 항복의 재촉보다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에 있었다고 한다. 종전 당시 미국의 공식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통파’ 관점과 대비해서 이 새로운 관점을 ‘수정주의’ 관점이라 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소련의 적화 야욕을 강조하는 ‘정통파’와 미국의 역할을 중시하는 ‘수정주의’ 사이의 대립과 평행한 것이다.

 

수정주의 관점에 따르면 일본 항복은 시간문제였는데 그 항복을 앞당김으로써 일본 처리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이 커질 시간을 없애는 데 미국의 원폭 투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원폭 투하의 시점에 비추어 타당성이 큰 관점으로 보인다. 소련의 전후 처리 참여가 만주와 북조선 점령에 그친 이유는 실제 전투 지역이 넓지 않았다는 점과 원자탄을 독점 보유한 미국과 충돌을 꺼렸다는 점 두 가지로 이해된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분할점령 등 더 많은 요구를 소련이 내놓았을 것이다.

 

대서양헌장 이래 연합국은 새 영토를 획득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표방했다. 식민지 형태의 제국주의가 끝난 이제 이데올로기 대결 형태의 냉전체제가 펼쳐질 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은 영토가 아니라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점령권이 되었다. 소련은 동유럽에 점령을 통해 공산권을 만들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 구 일본제국을 영향권에 끌어들이면서 한반도를 소련이 구축하는 공산권을 가로막는 보루로 만들었다.

 

미군도 소련군도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조선 민족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을 권리를 가진 주체인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국민 중에는 자기네 손해를 무릅쓰면서까지 조선인에게 잘해주고 싶어 하는 착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겠지만, 두 나라 정부에게는 그런 뜻이 없었다. 조선 점령을 국익 신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뜻이 절대적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