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말 시점의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324억여 원이었다. 두 달 전 261억여 원에 비해 약 63억 원, 25퍼센트 가까이 급증한 것인데 추곡수매자금 방출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8일) 추곡수매가 일단락된 후에는 자금 회수에 따라 서서히 발행고가 줄어들어 5월 말에는 286억여 원까지 내려왔다.

 

“조은 발행고 286억 - 아직 30억 감축 예상”

 

조선은행 조사부 8일 발표에 의하면 5월 29일 현재 발행고는 286억 원대를 지속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약 30억 원이 감축될 여지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는 미곡자금 회수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그런데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상반기 내내 이어져 온 발행고 축소가 끝나고 확장으로 돌아서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조은권 발행 증가 경향”

 

조선은행 발표에 의하면 6월 12일 현재 은행권 발행고는 29,396,943,000원으로 전주에 비하여 396,981,000원의 증가를 보이었다고 하는데, 그 원인으로서는 대출금의 증가를 들 수 있으며 앞으로 하곡수집 자금 방출로 인하여 계속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 (<동아일보> 1948년 6월 20일)

 

화폐 발행고는 7월 초에 다시 3백억을 넘어서고 얼마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0월 이후 다시 급팽창을 시작, 연말까지 450억을 돌파하였다. 통화량은 경제운용의 중요한 지표일 뿐 아니라 민생에 직결되는 요소였다. 1948년 8월 15일 <경향신문>에 실린 산업경제연구소 강진국의 기고문에 이 문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

 

“물가조정의 선봉 - 생산 자극과 상품유통의 접근을”

 

어느덧 해방 4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민족의 생활은 극도로 도탄에 빠져있다. 이것을 화폐개혁으로서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나 화폐가 민생의 생활 척도를 측정하는 표준 도구가 되느니만치 이번 행정기구 개혁에 따른 생산 부문의 참신한 개혁과 아울러 화폐개혁을 단행하기 전에는 아무런 혁신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첫째로 관공리가 구두 한 켤레 값밖에 안 되는 봉급으로 오리(汚吏) 노릇을 아니할 수 없는 판이요, 배급에만 의존할 수 없는 노동자가 하루 임금으로 두 끼를 먹지 못하는 형편이니 어찌 마음 놓고 생산에만 매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통화 수량을 적절히 조정하여 화폐가치가 유통경제, 특히 대내적으로는 국민생활의 정상한 가치 측정의 기준이 되고 대외적으로는 비록 금본위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더라도 국내 생산과 어느 정도의 균형을 보유함으로써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니 해방 직전 즉 1945년 7월 조선은행권 발행고 46억9822만 원, 그것도 전 조선 및 만주 영역에 퍼진 것인데 현재 남조선만으로도 289억7338만 원, 약 6배로 팽창해 있다. 따라서 생산 없는 민생경제는 글자 그대로 파탄되고 말았다.

 

우리가 신행정 개혁에 기대하는 바는 먼저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물가조정의 선봉 지도적 역할을 꾀하는 동시에 국내 물자 생산을 적극 제재하여 화폐 수량과 상품 유통량과의 접근을 지향하는 획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민생을 직접 괴롭히는 것은 물가앙등인데, 통화팽창이 물가앙등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은 범인이라도 꼭 주범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요인이 더 큰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방 후 물가 앙등추세는 통화량 증가보다 훨씬 가파르다. 이 점은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부회장 하상용이 1948년 1월 8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통화팽창과 농촌의 현상”에도 지적되었다.

 

통화팽창은 물가의 승낙(昇落)에 대하여 어떤 정도의 영향을 주는가를 고찰해 볼 때 이에 대한 원리적인 학설은 물가는 순환통화의 수량에 좌우된다는 설도 있고 이와 정반대로 물가는 순전히 수요와 공급 여하로써 자율적으로 결정되고 통화의 수량은 부수적으로 증감된다는 설도 있으며 또 이상 양설의 절충설도 있다. 그러나 현상 형태에 있어서는 단순한 원리적인 학설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혼돈한 것이 상례이다.

 

현하 남조선의 고물가 현상을 타진함에 있어서는 필자는 절충설에 논거함이 가하다고 생각하며 또 이것을 비중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생산부족 공급부족에 치중함이 가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를 들면 1937년에 비하여 금년 7월의 조선의 발행고는 약 백배인데 평균 도매물가는 약 5백배로 약진하고 있으며 한편 일본의 현상은 발행고는 약 60배인데 평균 도매물가는 약 20배라는 것을 보더라도 일본의 공업생산력이 조선보다는 우월한 까닭이라고 실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세간의 상식적인 견해는 고물가 원인은 주로 통화팽창에 있다고 속단하고 또 통화팽창에 대하여서는 물가와 관련적으로 그 이유는 생산 혹은 공급부족은 숫자로 파악하기 어려우나 발행고는 계수의 파악이 용이하여 인심에 직각적인 충격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3년 동안 통화량은 4배 늘어난 데 비해 도매물가지수가 30배 이상 늘어난 것을 보면 그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하상용의 추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통화팽창이 물가앙등을 그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기본조건의 하나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파탄의 다른 측면들도 통화팽창에 기인한바 컸다는 사실은 통화팽창이 비교적 억제된 이북 경제상황과의 비교에서도 확인된다.

 

1945년 9월 27일 일기에서 통화팽창 문제를 처음 언급했다. 8월 15일의 일본 항복 선언으로부터 9월 8일의 미군 진주 사이 조선은행권 발행고의 급팽창(약 50억 원에서 약 85억 원으로)을 지적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이제 발행고가 3백억 원대에 이르고 보니 당시의 증발 액수 35억 원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과 24일간에 통화량 70퍼센트 증가라는 폭발적 팽창이 가진 의미는 변할 수 없다. 악조건에 빠진 조선 경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과 같은 짓이었다.

 

미군 진주 이후의 4배 가까운 팽창은 어디에 이유가 있는 것이었나? 1948년 2월 29일자 <동아일보> 제3면을 채운 김용갑의 논문 “금융 동태와 인플레 대책”에 간단 명쾌한 설명이 나와 있다. (1948년 10월 3일자 <동아일보> “세제개혁위회 위원도 결정” 기사에 따르면 김용갑은 동아일보 사원으로 있다가 재무부 세제개혁위원으로 위촉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전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약 50억, 일제가 경제교란을 목적으로 방출한 발행고가 약 40억, 합계 90억이었는데 현재 3백억을 넘으니 2백억 원의 방만한 방출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 국고의 적자지출이 1947년 9월 한 달 동안에 약 4억 원, 민간에 대한 대출초과가 약 7천만 원이니 이 비율로만 본다면 해방 후 난발(亂發)된 210억 중 6분지 5는 국고의 적자지출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또 이 비율을 가지고 국고의 부채액을 추산한다면 175억이다.

 

물론 당국으로부터 국고 부채 총액에 대하여 전연 발표가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신빙할 만한 정보를 종합하여 본다면 170억 원 정도로 추정이 된다. 17일 중앙경제위원회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작년도 재작년도 양년에 걸친 국고의 부채가 150억이라 한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국고 부채의 총액이 적어도 170억은 넘을 것이다.

 

이 170억의 적자재정이 불환화폐를 발행하지 않았으X 생산을 병행하지 않는 이 거대한 지출과 방대한 구매력은 악성 인플레를 도발할 것이며 따라서 남조선에서 인플레를 조장한 책임을 추구한다면 그 책임이 정부 자신에 있을 것이다. 이 근본 원인을 발본색원적으로 삼제하지 않는 한 폭리취체 물가행정 등으로 백방 대책을 세운다 하더라도 전부가 실패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 이와 같이 조선의 금융 문제는 자금유통에 있어 6분지 5를 점하고 있는 적자재정의 1점에 귀결될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물가를 단속한들 폭리를 취체한들 매점을 금지한들 더 나아가서는 폐제(幣制)를 개혁한들 그 전부가 인플레를 조장하여 결국은 수포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1947년 4월 6일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인터뷰에서 당시 짜고 있던 1947회계연도 예산을 언급한 일이 있다. 세입 전망은 155억 원인데 각부의 세출 요구액 합계는 550억 원을 넘었다고 한다. ‘균형예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군정 내내 계속된 이 전폭적 적자 상황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김용갑이 말하는 “생산을 병행하지 않는 이 거대한 지출과 방대한 구매력”이다. 미군 진주 당시 통화량 85억 원 중 40퍼센트인 35억 원이 최근 24일 동안 찍은 새 돈이었다. 이 무렵 일본인 예금이 28억 원 인출되었는데, 조선은행권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도 금지되었고 일본에서 가져가도 쓸 수가 없었다. 이 돈이 어느 집단의 수중에 남아있었고, 요정의 성업도 사치품을 들여오는 마카오무역의 성행도 이 돈 덕분이었다. “생산을 병행하지 않는” 구매력의 출발점이었다.

 

한편 남조선의 산업은 형편없는 침체에 빠졌다.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인해 조선 경제가 겪은 악조건에는 남북의 구분이 없었지만 이를 극복하는 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1948년 4월 24일 평양에 체류하던 이남 대표단이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는데, 거대한 공장이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충격적인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홍명희를 비롯한 중간파 여러 사람이 이북에 주저앉는 데도 이 시찰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정태헌은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역사비평사 펴냄) 202-203쪽에서 미군정의 경제정책을 ‘부재(不在)’ 한 마디로 평가했다.

 

해방 후의 급선무는 각종 자원과 노동력, 생산력을 고갈시켰던 식민지자본주의 유산을 극복하고 재건정책을 통해 일제하에 억압되었던 잠재력을 평화산업으로 집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점령당국인 미군정이 세계 냉전체제에 대응하고 동아시아의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남한을 일본 등에 비해 주변적 변수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따라서 남한의 경제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

 

게다가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이 기계시설이나 재고원료를 팔아치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고,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켜 공장가동에 나서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방임된 초인플레 속에서 생산적 투자보다 물자난에 편승하여 생산시설과 자재를 불법으로 내다 팔아 축적을 꾀하는 투기꾼들이 날뛰어서, 경제재건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원조물자’가 들어와도 생산적으로 활용되기 어려웠습니다.

 

1946년 11월 현재 휴업 중인 390개 사업장의 휴업원인은 대부분(70%) 원료난이었습니다. 물가지수를 감안한 1946~1948년간의 생산감소율은 80% 정도나 되었습니다. 만성화된 물자부족으로 1945년 8월 말 기준으로 도매물가는 1945년 말 2.5배, 1946년 말 14.6배, 그리고 1947년 말에는 무려 33.3배나 뛰었습니다.

 

위에 일부 인용한 김용갑의 논문에는 조선 금융의 구조적 문제가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만들어지고 미군정에 의해 방치된 사실도 지적되어 있다. 식민지시기에 일본 금융기관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돈 백수십억 원은 묶여있는 채 조선에서 일본인의 예금은 대부분 인출되어 조선에 ‘저축과잉’의 기형적 인플레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해방 후 조선 금융 동태의 본질을 구명한다면 저축과잉을 내포한 인플레이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인플레의 전형은 투자과잉에 있으며 또한 그것이 경기변동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의 금융 사태는 그와 같은 원칙적인 면모와는 다르다.

 

즉 현재까지 판명된 조선의 각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일본 공사채 주권 등이 106억에 달한다. 이 거액이 조선에서 저축을 형성하여 그것이 일본에 가서 채권화하였으니 우선 조선에서 축적된 자본이 일본의 산업을 개발하는 데 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금융 면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이 얼마나 식민지적인 태세인가를 알 수 있다. (...)

 

금융조합과 같은 서민금고를 조선 전역의 방방곡곡에 동원하여 저축을 강제하여 형성된 예금은 대부분을 일본에서 채권화하여 조선의 산업개발을 압박하였으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대(對)일본 위체(爲替)계정의 청산을 사보타주하였다는 것은 금융사상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금융수탈은 그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제가 항복하자 대일 환끝은 청산하지 않으면서 대일본정부 청산자금으로 13억, 귀국 일본인을 위한 예금인출 22억, 기타 합 40억 원여의 급격한 방출로서 지폐를 난발하였으니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일 채무는 해방을 계기로 하여 청산을 강요당하였으며 그 채권은 아직 청산하지 못하여 이 변태적인 저축과잉이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해결되지 못한 채, 대내적으로는 생산상의 악조건으로 인하여 투자할 기회를 갖지 못하여 화폐 면과 생산 면이 불균형 상태에 방치되었다.

 

통화팽창은 미군정 하의 남조선 경제가 엉망이 된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김용갑 논문의 서두에 임금지수 17,000, 물가지수 119,000, 발행고지수 19,000으로 표시되어 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기준시점부터 1948년 초 사이에 임금은 170배, 물가는 1,190배, 통화량은 190배 늘어났다는 것이다.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의 7분의 1에 불과한 것이다. 민생이 어떠했겠는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