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지이 다케시 선생 만났을 때 듣지 않았다면 이 행사가 있는 줄 모르는 채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사람 많은 자리 싫어하는 줄 아는 서 선생이 내게 일부러 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참석하겠다는 뜻을 후지이 선생에게 전해듣고는 아마 꽤 기뻤던 모양이다. 행사 전의 연락이나 행사장의 예우에서 그의 제자들이 내게 깍듯했던 것은 그로부터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미리 부탁받은 '말씀'을 위해 이런저런 지난 일을 한 차례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 것도 좋은 계기였다. 서 선생과 내가 사뭇 다른 길을 걸어 왔고 함께 한 일이 많지 않지만, 막상 차분히 생각해 보니 공유하는 것이 적지 않다. 역사 공부와 민족사회에 대한 생각을 나랑 제일 많이 공유하는 분이 서 선생 같다. 그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좌담 중 자기 아버지의 세계관을 많이 물려받았다는 얘기를 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아버지와 내 얘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사람 많은 자리에 나가 새로 만난 사람들도 많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생각 외로 반가운 마음을 많이 느끼고 불편한 마음은 별로 없었다. 앞으로는 사람들 더 많이 보면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마음속의 자격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구실 제대로 하며 산다는 자신감이 없다는 사실이 사람 만날 때 불편한 마음을 많이 일으켰던 것이 아닐까.

 

"해방일기" 작업이 역사학계 안에서나 밖에서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처럼 널리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역사학계 안에서의 평가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후한 것 같다. 앞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데 지금까지보다 좋은 여건을 기대할 수 있겠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떠오른 생각이 많았는데, 마구잡이로 적다가는 실례되는 일이 많을 것이고, 연회장에서 가까이 앉았던 몇 사람 기억만 적어둔다. 내 왼쪽에 유인태 의원, 맞은편에 강창일 의원, 국회의원들이 공교롭게 몰려 있었다. 유인태 의원과는 어린 시절 같이 살던 동네에서 만났는데(초등학교부터 선배다) 학생시절 풍모가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대학 몇 년 후배인 강창일 의원과는 서로 살짝 삐딱한 사이인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내 오른쪽에는 정창현 교수가 앉아 중앙일보 시절을 잠깐 회고할 수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천희상 선생이었다. 천 선생은 참 묘한 인연인데, 나를 지나치게 떠받들어 주는 것이 때로 불편할 정도다. 강연장에 막 들어갔을 때도 원혜영 의원을 내 자리로 모셔와 인사를 시키는 바람에 좀 민망했었다. 원 의원이 문리대 몇 해 후배니 내 자리로 와서 인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아무 타이틀 없는 사람에게 일국의 국회의원을 끌고 와 인사시키다니, 참 천 선생다운 행동이다.

 

천 선생 옆에 있던 정현백 교수와는 잠깐이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 만난 일이 없고 1999년 역사학대회 때 그의 발표에 감명을 받았고, 그 발표 중 한 대목을 내가 글에 써먹은 일이 있다는 얘기를 하니까 여걸답지 않게 얼굴을 살짝 붉히며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시냐며 즐거운 기색이다. 독일에서는 민족사 교육이 없다는 점이 통일을 쉽게 만들어준 조건으로 지목된다는 얘기였다.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이지만, 내 일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현백 교수의 동생 정용욱 교수였다. 그의 책 <존 하지와 ...>를 <해방일기>에서도 많이 이용해 왔는데, 한국현대사에서 미국의 역할을 크게 보는 관점을 나랑 공유하는 사람이다. "노무현 전기" 형식으로 작업을 생각한다는 얘기를 하자 무척 재미있어 한다. 자주 만나면 도움을 많이 얻을 만한 친군데 서울대학이 너무 멀어서...

 

어제의 주인공 서중석 교수, 내내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교수직에서는 퇴임이지만, 그의 작업에는 한 차례 중간결산의 계기일 것이다. 그의 경력 중 제도권 밖에서의 공부의 의미에 관한 생각을 일전에 적었는데, 퇴임 후 다시 제도권 밖의 조건을 많이 누릴 수 있게 되기 바란다. 그런다면 나도 지금까지보다 많이 어울려 놀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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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