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오전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폐원식이 창덕궁 비원에서 열렸다. 1946년 2월 어울리지 않는 ‘민주의원’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이 군정사령관 자문기구는 1946년 12월 입법의원이 설립된 후로는 기능이 사라졌는데도 형식상 존속하고 있다가 이제 제헌국회 출범을 앞두고 문을 닫은 것이다. 폐원식에는 “이승만·오세창·김준연·김도연 등 제 의원을 비롯하여 사무국원 등 40여 명이 출석”하였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30일)

 

며칠 전(5월 20일)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폐원식은 이보다 성대했다. 41명 의원이 참석했고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이 축사를 했다. 이튿날 <조선일보> 기사에는 의원 이동상황이 집계되어 있는데, 정원 90명 중 사직 27명, 제적 19명, 별세 4명, 피살 1명으로 51명 감소에 보선 8명의 증가로 폐원 당시 재적 47명이었다고 한다.

 

5-10선거로 선출된 의원들이 구성할 기구는 ‘국회’라는 이름만을 갖고 있었다. 이 국회를 통해 만들어질 국가의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 아닌 그냥 ‘국회’로 출발했던 제1기 국회가 후세에 ‘제헌국회’로 불리게 된다.

 

의원들이 선출되어 있는 이 국회를 누가 소집하고 구성할 것인가. 선거 시행의 주체가 미군정이었으므로 소집과 구성의 주체도 미군정일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 기구인 국회선거위원회(국선위)가 ‘최초의 집회’ 소집 공고를 5월 25일에 내놓았다.

 

◊ 국회선거위원회 공고

 

단기 4281년 5월 10일에 선거된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를 단기 4281년 5월 31일 상오 10시에 국회의사당에서 행하기를 결정하였으므로 이에 차(此)를 공고함.

 

단기 4281년 5월 25일 국회선거위원회위원장 노진설

 

이 공고는 같은 날자 하지 사령관의 “국회에 관한 포고”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1. 1947년 11월 14일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와 1948년 2월 27일부 국제연합소총회의 결의로 확인한 제의와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하여 조선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조속 달성함에 관하여 국제연합임시조선단과 협의하고 또 국회를 조직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할 국민대표를 선거키 위한 선거가 본년 5월 10일에 국제연합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 하에 시행되었음.

 

2. 선거의 결과 당선인에 대한 당선통지와 일반공고가 완료되었다는 통지를 접하였으므로 본관은 재조선미국주둔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이에 재기(在記)의 권한을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장에게 부여함.

가. 수도 서울시에서 거행될 국회의원의 최초 집회 일자를 결정 공고할 것.

나. 최초 집회를 소집할 것.

다. 국회가 의장을 선출하여 그 기구를 결정할 때까지 그 회의를 사회할 임시의장으로 최고령의원을 지명할 것.

 

3.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 제43조에 의하여 선거구 선거위원회는 당선통지서를 당선인에게 발하도록 규정하였으므로 해 당선통지서는 당선인에 대한 신임장이 되고 또 국회의석을 갖는 자격을 인정하는 증서가 됨.

 

1948년 5월 25일 재조선미주둔군사령관 육군중장 존·알·하지 (<동아일보> 1948년 5월 26일)

 

포고 중 2-다항 내용에 잠깐 생각이 머문다. 임시의장을 최고령자로 하는 기준까지 사령관이 명시해준 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새로 결성되는 기구의 첫 집회에서 최고령자가 임시 사회를 맡는 것은 유력한 관습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당선자 중 최고령은 이승만인데, 하지는 포고를 통해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지명한 셈이다.

 

그런데 이 포고가 나온 뒤에 이승만은 다른 경로를 통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월 27일 열린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였다.

 

국회의원 예비회의는 27일 오후 2시부터 국회의사당에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의원 141명 참석 하에 신익희 사회로 개최되었다. 국기경례 묵념이 있은 다음 국회준비위원 김상돈·김도연·장면 3씨의 경과보고와 이에 대한 질의문답이 있은 후 임시위원 선거에 들어가 무기명투표의 결과 재석 141명중 119표의 다수로 이승만 박사(독촉)가 선출되었으며 차점은 신익희(독촉) 13표, 김동원(한민) 3표, 김약수(조선공화), 이청천(대청), 김도연(한민), 이윤영(한민), 백관수(한민) 등 5씨가 각각 1표 무효가 1표이었다.

 

임시회의장에 선출된 이승만 박사로부터 간단한 취임사가 있었고 (1) 개회식 일자에 관한 건 (2) 선서문 통과의 건 (3) 초대장문 통과의 건 (4) 국회 식순 통과의 건 (5) 국회 임시사무소 설치에 관한 건 (6) 기타 사항 등 안건을 토의하였는데 31일의 전체회의에서 추후 승인을 받기로 하고 준비위원회의 보고를 기초로 각 의원의 의견을 참작하여 약간 수정한 것을 준비위원회에 일임 통과하고 동 5시 반 산회하였다. 그리고 내빈초청은 장소관계로 미국요인·국련조선위원단·재경 각국 영사·과정 각부처장·각도지사·각도선거위원회에 한정하기로 되었으며 동회에서 수정 통과한 선서문은 여좌하다. (...) (<조선일보> 1948년 5월 28일)

 

이 회의가 5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제1차 국회준비위원회’ 또는 ‘국회소집 제1차 준비위원회’란 이름으로, 이튿날 <경향신문>에는 ‘국회준비회(의)’란 이름으로 보도되었다. 참석의원 수도 기사에 따라 ‘130여 명’도 있고 ‘142명’도 있다. 이 회의는 제도적 근거가 없는 모임이었다. 이승만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신익희가 사회를 본 것은 입법의원 해산 때 그가 의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입법의원과 새 국회 사이에는 아무런 공식적 관계가 없었다.

 

정확한 참석자 명단은 물론 있을 수 없다. 한민당과 독촉 중심의 이승만 옹립세력 모임으로 보인다. 5월 22일 독촉 회의실에서 열린 45명 당선자의 ‘간담회’ 이야기를 그 날 일기에 적었는데, “국회 소집을 자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하여” 모인 그 간담회에서 “27일경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회 소집에 대한 국회의원 사이의 준비 협의를 하기 위하여 준비위원 12명을 선출”했었다. 그렇게 추진한 결과가 5월 27일의 모임이었다. 이승만 옹립세력이 아닌 당선자 중에도 사람 많이 모이니까 멋도 모르고 참석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세 과시’의 성격을 가진 이 모임에서 이승만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틀 전 하지 사령관의 포고로 내정되어 있던 인물을 이 모임에서 투표로 ‘선출’했다니 우스운 모습이긴 한데 그냥 웃기에는 좀 뒷맛이 씁쓸하다. 임시의장은 기능상 필요한 역할인데 아직 구성이 되어 있지 않아 투표로 의장을 뽑지 못한 상황에서 큰 반대가 없을 만한 방법으로 선정해 맡기는 자리다. 그런데 일부 당선자의 임의적 모임에서 임시의장을 ‘선출’하다니. 가식적인 ‘자주성’이기에 입맛이 씁쓸한 것이다.

 

결국 국선위 공고대로 5월 31일 오전10시에 열린 ‘국회의원의 최초 집회’에서 노진설 국선위 위원장은 하지의 포고대로 최연장자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추천하고 이 추천이 만장일치(박수)로 받아들여졌다. 이승만이 사회를 본 오전 집회에서 이승만이 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이 부의장으로 선출된 후 오후 1시20분경에 폐회하고 오후 2시에 국회 개원식이 열리게 된다. 오전 회의에 관한 6월 1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옮겨놓는다.

 

“의장에 이 박사, 부의장 신익희 김동원 씨 피선 - 1차 본회의”

 

조선사상 초유의 민주독립국가 수립의 산실이 될 국회는 드디어 5월 31일 오전 10시 의사당으로 배정된 중앙청 대홀에서 막을 열었다. 먼저 국회선거위원회 사무총장 전규홍 씨의 사회로 개회되어 애국가 제창, 국기 경례, 묵념, 의원 출석보고가 있은 다음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장 노진설 씨로부터 국회 소집에 관하여 간단한 인사가 있고 임시의장 추천에 들어가 최고연령자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할 것을 부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이 박사는 의장석에 등단, “오늘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은 무엇보다 감격에 넘치는 바이며 우리는 먼저 감사의 뜻을 하나님께 기도드리자”는 발언으로 이윤영 의원의 인도로 “하나님께 의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맹서의 기도를 올리었다.

 

이어서 앞서 준비위원회에서 초안한 국회구성과 회의준칙을 접수한 다음 축조검토에 들어가 제3항의 부의장 1인을 2인으로 증원할 것을 동의 가결 채택하고 제4항의 임시의장 건에 대하여 삭제 혹은 보류 등의 동의 개의로 한참동안 질의응답이 있은 후 원안대로 두기로 가결 통과하고 제6항의 의석 배치 문제로 들어가 도별로 하느냐 추첨으로 하느냐에 관하여 상당한 논전이 있었으나 결국 시간관계로 정식 의장 부의장 선출 후 재토의키로 하였다.

 

그리고 제 7, 8, 9항은 일괄 통과시키고 의장 선출에 들어가 무기명단기투표를 시행한 결과 총투표 수 198 중 이승만 박사 188, 이청천 4, 김약수 2, 신익희 2, 이윤영 1로 이 박사가 정식 의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부의장 2명 선출에 있어서도 동일한 투표방법으로 시행한 결과 신익희 씨 76표 김동원 씨 69표가 나왔는데 과반수 부족으로 결선투표 결과 신익희 씨가 당선되었고 다음 투표 역시 처음에는 김동원 77표 이청천 73표로 과반수 부족이었던 관계로 결선한 결과 김동원 101, 이청천 95의 격전으로 결국 김동원 씨가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이어서 의장 이승만 박사는 부의장 신익희 김동원 양 씨를 각 의원에 소개한 후 오후 1시20분 제1차 회의를 마치었다. 그리고 국회 개원식은 주식 후 오후 2시부터 거행하였다.

 

한민당과 독촉은 힘을 합쳐 이승만을 의장으로 밀었고, 김구도 김규식도 없는 국회 안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부의장 선거에서는 한민당과 독촉이 맞섰는데, 독촉이 먼저 제1부의장 자리를 확보해 놓고도 나머지 한 자리까지 차지하려고 들었다. 의장 이승만이 국가원수로 빠져나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부의장 선거가 치열했던 것이다. 이 첫 번째 힘겨루기에서 한민당이 보인 약세가 대한민국 제1야당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개원식에 참석했는지는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누가 참석 않았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런데 참석하지 않은 사실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다.

 

위원단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상해로 떠나면서 6월 초순에 돌아온다는 예정을 밝혔다. 아마 선거 후 한 달 내에 국회가 개원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개원 전에 선거에 대한 위원단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기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위원단이 떠나 있는 동안에 개원 일정을 결정하고 실행했다. 유엔을 대표해 5-10선거를 감시한 위원단은 그 선거로 만들어진 국회의 개원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거가 유엔이 납득할 만한 자유분위기 속의 공정한 선거였는지, 위원단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