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로 받는 치료를 위해 일전에 전인한의원에 들렀을 때...

침 놔주던 황 의원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안 하던 일을 해봤네요."

외국인 환자가 혼자 왔는데, 통역 없이 그럭저럭 진료를 해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영어에 웬만큼 익숙한 사람도 몸에 관한 대화를 하기는 쉽지 않은데?"

실물을 가리키면서 얘기하니까 충분히 소통이 되더라고 한다.

치료 끝난 후 카운터에서 약 탈 때 그 외국인과 마주쳤다. 차분한 인상의 아가씨였다.(새댁일지도?)

내 앞에서 약 받고 계산을 끝냈는데, 내 약이 나올 때까지도 볼일이 끝나지 않았다.

간호사 박 선생이 뭔가 사연이 있는데 풀리지가 않는 듯 쩔쩔매고 있다.

내가 "도와드릴까요?" 슬쩍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서 황 의원을 찾는 듯 안으로 뛰어간다.

내 약을 내주던 다른 간호사가 말해준다. "다음 예약을 잡으려고 그래요."

아! 그 정도야 내가 도와드릴 수 있지! 마리아나에게 내가 말했다.

"They want to know when you would come again."

마리아나가 반가운 기색으로 대답한다. "I thought they would tell me when."

이거 그대로 옮겨줄 필요 없다. 언제 와야 될지는 의사가 정해주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하는 뜻까지 뭐하러 전해주나?

그래서 간호사에게 말했다. "적당한 때를 정해주면 거기 맞춰서 오겠대요."

그러자 간호사가 예약장부를 보며 말한다. "화요일... 두 시면 좋겠는데요."

이건 즉각 옮겨줄 게 아니다. 간호사가 예약장부만 보고 날짜를 정해주면 너무 권위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간호사에게 필요없는 질문을 했다. "이분이 오늘 몇 번째 오신 거죠?"

차트를 들여다보며 몇 번째 오신 거라고 대답한 뒤에 다시 통역 일로 돌아왔다.

"Say, what about next Tuesday? Something like two o'clock?"

그 시간 좋다고, 그때 다시 오겠다고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옮겨줄 필요도 없었다.

 

해방공간 군정청의 '통역정치' 폐단을 비난해 왔지만, 원래 통역 일에 '정치성'이 얼마간 필요하다는 점은 감안해야겠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중석 선생 퇴임잔치 소감  (3) 2013.06.11
통영학교 답사기 / 2013. 5. 17-18  (0) 2013.05.21
우리도 관광 가요~  (8) 2013.04.16
번역  (7) 2013.01.08
오랜만의 강연, 그리고 외출  (0) 2012.11.30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