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 앞으로 2월 중순에 보낸 남북협상 회담 제안 편지 이야기를 2월 27일 일기에 썼다. 편지 발송을 비밀로 하고 있다가 3월 초순에 이르러 소문이 떠돌자 발송 사실을 밝혔지만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 편지에 대한 평양 측의 반응이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나타났다.

 

“4월 14일 평양서 남북협상 개최 방송 - 좌중(左中) 계열 대책에 열중”

 

유엔조위에서 북조선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하기로 가결되자 김구·김규식 양씨는 이에 반대하고 남북요인회담을 유엔조위에 건의하는 동시에 북조선에도 이와 동일한 서한을 보내어 그 회답 여부가 주목되어 오던 바 지난 25일의 평양방송은 북조선에서 이 서한 내용을 수락하고 남조선 각 정당 단체에 대하여 4월 14일 평양에서 회담할 것을 초청하였다고 전하였다.

 

이 방송에 의하여서는 맹렬한 준비를 다하고 있다는 바 27일에는 중간 급 좌익 각 정당단체마다 각각 자기 정당 단체 사무실에 요인들이 회합하여 평양방송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리하여 민련에서는 금 28일 상오11시부터 삼청동 김규식 숙소에서 정치 상무 양 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동 문제를 토의하리라 하며 북조선에서 정식 초청이 도착하게 되면 즉시 중간과 좌익의 각 정당 단체 대표가 시내 모처에 회합하며 남북요인회담의 추진방책을 토의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8일)

 

이 반응에 왜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까? 5월 초순으로 예정된 ‘가능지역 총선거’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금쪽같은 상황인데, 평양 측에서 이토록 신중한 반응을 보인 까닭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이정식은 “1948년의 남북협상”(<신동아> 1980년 3월호,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펴냄)372-426쪽)에서 한 가지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 1948년 4월 남북회담의 기획과 실행에 소련의 의지가 1차적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소련 측에서 회담의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동안 김일성과 김두봉 등 조선인들이 자발적인 회답을 보내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소련은 중요한 주체의 하나였으므로 이때의 남북협상에도 소련이 관계했을 가능성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정식은 소련의 역할을 너무 과장하는 감이 있다. “이른바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후에 있었던 ‘4김 회담’은 소련군정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각본에 따라 준비되고 진행된 것이었고 (...) 소련군정은 ‘4김 회담’을 허락하기는 했으나 그 회담의 내용 역시 세밀하게 관리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이북 지도부를 소련의 ‘괴뢰’로 보는 냉전기 시각에 너무 얽매인 것 같다.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정식이 제시하는 것이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소련군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슈티코프에게 이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을 축하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겠다고 건의했다.”고 비망록에 적은 것이다. ‘성공적’이란 말 한 마디를 “소련의 목적을 달성했음”의 뜻으로 해석한 것은 무리한 견강부회로 보인다. ‘성공적’이란 말은 다른 기준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었던 말이다.

 

또 하나의 “명확한 증거”라고 내놓는 것이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전문이다.

 

소련의 한반도정책의 강령적 원칙은 한반도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가 되는 것을 막고, 한반도에서 소련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보장해줄 좌익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의 정확한 실천이라는 원칙하에 반탁세력의 미소공위 협의 참가를 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건을 제기하는’ 정책을 취해 좌익이 우위를 점하는 정부를 수립해서 반데 반봉건적 개혁을 실천할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련은 남북한의 재통합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명확한 증거는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고 내린 지령이다. 그것은 미국과의 협상 결과에 관계없이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기원> 379쪽)

 

이 대목을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한숨을 흘렸다. 이 스탈린 전문은 같은 책 178-214쪽에 수록된 “스탈린의 한반도정책, 1945”에서 스탈린이 이북에 위성국가를 세울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는 증거로 내놓은 자료인데, 그 해석이 석연치 않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이 인용에서 ‘정권’으로 옮겨진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이었을까?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란 것이 소련의 위성국가를 뜻하는 말일 수 있는 것일까?

 

<해방일기> 작업에서 나는 전문 연구자들의 작업성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그러나 냉전에 지나치게 얽매인 시각에는 비판적 논평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정식은 분단건국의 책임을 소련에 미루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무리한 추론을 하는 감이 있다. 1948년 봄의 남북협상 배경에 1945년 9월의 스탈린 전문을 들이대는 데서 다시 이 문제를 느낀다. 설령 1945년 9월에 스탈린이 그가 해석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2년 반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일본 항복 당시 스탈린이 한반도를 ‘중추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정식도 인정한다.(같은 책 182-183쪽) 군정 직접 통치를 꾀한 미군과 달리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를 지원하고 자기 역할을 최소화한 정책은 이 맥락에 맞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방침이 한 달 사이에 스탈린의 마음속에 확정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2년 반 동안 북로당-인민위원회 체제가 착실히 자리 잡아 온 이 시점까지 남북협상 같은 사업을 소련 측이 모두 기획해 줘야 한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소련의 역할보다는 이북 지도부의 내부 문제를 생각할 여지가 많다. 우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로당 측에서 이남의 남북협상파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싶어 했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김구와 김규식이 2월에 보낸 편지는 4김 ‘지도자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3월 25일 평양방송이 전한 것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초청이었다.

 

실제로 4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갔을 때 김구는 대표자 연석회의에 한 차례 나가 인사만 했고 김규식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도자회담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회담’이라 할 때 북로당과 인민위원회를 대표하고 영도하고 있던 김일성과 김일성에 비해 김구와 김규식의 이남 ‘지도자’로서의 무게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북의 총체적 지도자들이 이남 일부 세력의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참여하는 ‘지도자회담’이 남북협상의 보조적 역할은 몰라도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임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선의를 아무리 존중한다 해도 4인 회담에 집착한 자세에는 비판할 점이 있다. 이북 지도부는 선거 등의 절차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 놓은 집단인데, ‘영수’들끼리의 합의만을 통해 남북협상을 진행한다는 데는 명분과 실제 양쪽으로 한계가 있었다. 협상의 주 무대로 대표자 연석회의를 이북 측에서 준비한 것은 타당성 있는 조치였다.

 

남북협상의 무대에서 남로당을 비롯한 이남 좌익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남에서 1947년 11월 단선(單選)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각 정당 협의회(정협)를 통해서였다. 정협에는 좌익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규식 등 중간파 지도자들은 12월에 민족자주연맹(민련)을 결성해서 남북협상 운동의 중심으로 삼았고 정협과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민련 집행부에서 좌익 인사들을 퇴진시켰다.

 

“좌파를 일소, 민련 상위(常委) 개선(改選)”

 

민련 제2차 임시중앙집행위원회는 21일 정오부터 동 연맹 회의실에서 김 박사의 개회사로 개최되었다. 그런데 중집원(中執員) 홍명희 씨 등 27명의 보선과 규약수정안 통과와 상위가 총사직하고 개선한 결과 5당캄파와 민련 좌파인 권태양, 장권, 강순, 성대경 씨 등 5명 대신 민독 계열과 5당캄파 우파인 장자일, 김성주, 신의경, 신숙, 이상백 등 5명과 전 상위 10명이 재선되어 민련 내의 좌파를 일소하였다. 그리고 22일 하오 1시부터 신선출 상임을 열고 23일 하오 1시부터 열릴 중집 속회에 제출할 당면 정치문제 재정문제를 토의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3일)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하나는 단독건국 추진 세력에서 남북협상파를 좌익과 야합했다느니 좌익 책동에 놀아난다느니 비난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제로 좌익의 책동이 조심스러워서였을 것이다. 위 기사에도 나오는 권태양에 대한 송남헌의 회고에서 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

 

김 박사를 회상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딱 하나 있다. 나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권태양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정체를 안 것도 몇 년 전에 출판된 한 권의 책을 통하여서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김 박사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도 내가 추천해서 합류하게 된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

 

누군가 나와 함께 김 박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적당한 사람이 없는지 물색하던 중, 우연히 대구사범 동기인 권태양을 길에서 만났다. 사정을 설명하며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마고 하여 삼청동 김 박사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후 권태양은 삼청동 집에 기숙을 하며 김 박사의 주위에서 이것저것 열심히 챙겨가며 일을 했다. 그가 성실히 일을 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신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그는 뒤에 설명할 성시백과 선을 대고 있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좌우합작의 추진을 비롯하여 삼청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성시백에 보고되었고, 이는 즉시 북한으로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북로당이 좌우합작의 진행 상황을 포함하여 입법의원 대책 등과 같은 사항을 성시백을 통해 훤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모골이 송연함을 느낀다. (...)

 

권태양 말고도 음으로 양으로 북로당과 선을 대고 있던 인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소앙의 비서인 김흥곤을 비롯하여 인민당 총무부장 대리를 하던 최백근 등이 그런 부류로 한통속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론이고 김 박사도 이들의 정체를 전혀 모른 채 그들과 중간파의 진로를 상의하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는데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세상물정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56-159쪽)

 

권태양의 역할에 대해서는 남로당 고위간부 출신 박병엽의 증언도 있다.

 

“성시백은 47년 10월에 접어들면서 반탁진영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중경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있으면서 지하공작을 했던 터라 김구-김규식 등 우익 지도자들의 측근과는 모두 연계가 돼 있었습니다.

 

예컨대 김규식의 비서였던 권태양은 ‘윗선’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성시백 선이었어요. 성시백 밑에 있던 강병찬과 서완석이 권태양-다른 모 비서와 직접 연결된 비선이었습니다. 강병찬과 서완석은 각각 남로당 결성시 반 박헌영계였던 강병도-서중석의 친동생이었지요. 그런데 권태양과 다른 비서는 자기들이 공작원과 연결됐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비선의 횡적 연계는 철저히 금지됐기 때문입니다.

 

김규식의 민련 간부로 일하던 박건웅이나 임정 계통의 김찬 등도 성시백 사람이었지요. 박건웅은 원래 중국공산당원 출신이었으나 중경에서 민족진영으로 돌아섰습니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부터 막역한 사이여서 성시백이 46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면서부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지요.”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320쪽)

 

이남의 남북협상파가 이남 민의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반민족적 분단건국 추진 세력은 내놓고라도, 좌익까지는 포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남북협상파가 좌익을 배제하거나 최소한 전면에서 후퇴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은 좌익과 신뢰관계 구축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움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좌익의 주축 남로당의 연합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자기네가 이남 민심을 장악하고 있다고 이북 지도부에게 장담하고 있었다.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 남북 노동당 연석회의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현 단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박병엽의 회고를 1948년 2월 8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그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2-7 구국투쟁’을 결행했던 것이다.

 

박헌영의 1946년 10월 월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가 월북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체포령은 미군정 비난이 이유였고, 비슷한 혐의로 당시 체포된 이주하는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그때 체포되었다면 너무나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이 따를 포고령 위반죄로 재판에 회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북로당의 국내파 중에는 원래 박헌영을 지지하며 김일성에 반대하는 흐름이 있었다. 나는 박헌영의 월북과 이북 체류가 북로당의 국내파 지분을 지키고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남북협상 국면에 이르고 보니, 북로당 지도부의 대남 정책에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에도 큰 비중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구-김규식의 편지를 놓고 북로당 내 소련파와 연안파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는 박병엽의 증언이 있는데, 남로당 역시 이 논쟁에 끼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 서한은 외교 경로와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북한에 공식적으로 전달됬습니다. 그러나 북로당은 민련의 2월 4일 결의, 김구의 성명, 심지어 김구-김규식의 편지내용까지 미리 입수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공작원 성시백이 민련과 한독당에 끈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동향은 북로당 중앙에 무전으로 즉각 타전됐습니다. (...)

 

북로당은 2월 18~20일 이례적으로 사흘간 남측의 협상 제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지도부의 관심은 민련이 대북 서한을 띄우기로 한 배경이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허가이 등 소련파는 김규식의 협상 제의를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협상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의 ‘입김’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들은 그 근거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들이 뻔질나게 김규식의 사무실을 들랑거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맞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는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김일성-김책 등 빨찌산파도 연안파를 지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같은 책 326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