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한민당을 필두로 한 단독건국 추진 세력은 유엔위원단의 5월 9일 가능지역 총선거 실시 결정으로 큰 뜻을 이뤘다. 이제 그들에게 최대의 과제는 이 결정대로 총선거가 시행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 선거에서 자파의 승리는 오히려 부차적 문제였다.

 

5월 총선거 실행을 위협하는 적은 두 방면에 있었다. 유엔 결정을 애초부터 반대해 온 좌익은 오래된 적이고 드러나 있는 적이었다. 그런데 다른 방면의 위협이 더 크게 떠오르고 있었다.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건국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미소공위를 함께 반대해 온 김구가 1948년 1월 하순부터 갑자기 발길을 돌려 중간파와 보조를 맞추기 시작하면서 이 위협이 크게 확대되었다.

 

좌익 봉쇄는 미군정과 오랫동안 협조해 온 일이기 때문에 전술상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중간파는 미군정과 나름대로 신뢰관계를 쌓아왔고 유엔위원단 대표들과도 소통이 잘 되는 세력이기 때문에 좌익 몰아붙이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몰아붙일 수 없는 상대였다. 통일건국을 명분으로 한 단독선거 반대에 대처할 논리도 궁색했다.

 

극우세력이 명분의 열세를 무릅쓰고 승리를 바라볼 길은 경찰과 테러조직을 동원하는 폭력밖에 없었다. 중간파의 선거 거부에 공감하는 인민을 선거인으로 등록하고 투표소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조직적 폭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엔위원단은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었고 미군정 당국자들도 이에 상당 수준 호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우세력은 폭력 동원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월 23일 민주의원 성명서는 그런 노력의 한 예다.

 

“유엔조선위원단이 오는 5월 9일의 총선거실시를 원만히 하기 위하여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양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은 우리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교각살우의 우를 연출치 말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경찰을 구속함으로써만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양성할 수 있을 줄 아는 모양이다. 그것은 조선 실정을 이해치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지금 각처에서 야기되는 파괴적 행동이야말로 그 진원을 소련 치하의 북조선에 두는 것으로서 화폐개혁에 의하여 얻어진 휴지의 구 지폐를 무한정으로 남조선에 수송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무(不可誣)의 사실이 아닌가?

 

경찰서 습격, 무기 탈취, 방화, 심지어 식수에 독약 세균까지도 살포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선거를 방해하고 있는 이때에 유엔조선위원단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불사지심(不思之甚)이라고 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정치범 석방을 운운하지마는 불법집회니 삐라 살포니 하는 것도 폭동의 일보 직전의 행동인 바에는 취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도 사실인즉 유엔위원단도 지엽말절에 구애되지 말고 좀 더 안광을 널리 하여 세계 정국을 살피고 참으로 조선 독립을 원조하는 데 노력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점을 유엔조선위원단에게 재삼 부탁한다.”(<동아일보> 1948년 3월 24일, “자유보장도 좋으나 좌익책동도 간과 말라.”)

 

민주의원(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란 1946년 초 우익이 비상국민회의로 집결할 때 그 상설기구로 만들어진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정이 자기네 자문기구로 채용하면서 달아준 간판이다. 미군정의 ‘통역정치’ 폐단이 심했던 까닭은 조선인의 민의 수렴 장치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의원을 채용했지만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모시는 이 기구의 민의 수렴 기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해 말 입법의원이 만들어지면서 자문기구의 기능이 사라졌는데도 극우세력은 민주의원 간판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경찰서 습격, 무기 탈취, 방화 같은 것은 진부한 레퍼토리고, “식수에 독약 세균” 같은 대목에서 약간의 상상력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화폐개혁에 의하여 얻어진 휴지의 구 지폐”란 무엇인가?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다.

 

북조선에서 1947년 12월 6~12일 사이에 화폐개혁이 시행되었다. 이 화폐개혁으로 수거된 구 화폐가 대남공작에 사용될 것이라고 반공세력에서 목청을 높인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이 우려를 하지 사령관도 공유하고 있었다. 좌익에서 일으킨 1948년 2월 7일 소요사태에 대한 하지 성명서(2월 10일)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민주주의적 남조선 건설을 파괴하고 조선국가의 경제를 해할 목적으로 감행된 금반 행동은 민주조선의 적이고 또 틀림없이 작년 12월 북조선화폐개혁에서 압수 혹은 교환한 지폐로 매수당한 1·2백 명의 탐욕자에 의하여 감행된 것입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조선인의 운명을 불행케 하려는 조선 독립의 적이고 또 조선국민을 불행케 하고 생활 곤란에 함입케 하려는 목적으로 철도와 철도운영기관 같은 국가의 부원(富源)과 자본을 불법하게 파괴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조선국민을 혼란 현혹시켜 소수가 대다수를 독재하려는 공산주의자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며 자유국민에 허용된 자유를 이용하여 여러분이 현재 향유하고 있으며 또 향유할 수 있는 자유를 파괴하여 그들의 부정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12일)

 

이북의 화폐개혁으로 수거된 조선은행권 총액은 약 30억 원으로 추정되었다. 조선은행권 통화량은 1945년 초까지 50억 원에 미달하다가 전쟁 말기의 증발로 약 55억 원인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고, 9월 초 미군 진주까지 몇 주일 동안에 약 30억 원이 발행되었다. 1945년 9월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 약 85억 원 중 30억 원가량이 이북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남의 통화량은 1948년 1월 5일 335억 원에 이르렀다.(<동아일보> 1948년 1월 23일) 100억 원이 넘는 1947년도 추곡 매수자금이 마지막 몇 달간 화폐 급증의 결정적 원인이었거니와, 미군정의 수지 적자를 화폐 증발로 꾸준히 메워 온 결과였다. 이북에서는 통화량 증가의 필요를 소련군 군표 발행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화폐개혁은 일제 통치가 끝난 직후에 필요한 일이었다. 미군정이든 임시인민위원회든 행정을 새로 맡은 입장에서 경제 운용을 위해 통화 파악과 통제가 필요했다. 더구나 점령군 진주 직전 몇 주일 동안 기존 통화량의 절반 이상이 발행되었다면 아직 유통되지 않은 뭉칫돈을 파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1945년 중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지 않은 1차 책임은 미군정에게 있었다. 조선은행을 장악한 미군이 화폐개혁의 필요성을 판단할 입장에 있었다. 미군정이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데 이북에서만 시행하는 것은 ‘분단 고착’으로 지탄받을 일이었다. 이북 지도부는 조선 문제가 1947년 가을 유엔에 회부된 뒤에 헌법 제정, 군 창설, 화폐개혁 등 독자적 건국 준비사업을 추진했다. 미소공위 이외의 외부 개입을 배격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북의 화폐개혁에 대한 김성보의 설명을 살펴본다. (<북한의 역사 1>(역사비평사 펴냄) 135-137쪽) 기본 원칙은 구폐와 신폐를 1대 1로 바꿔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폐 소유자의 신분에 따라 즉시 교환의 한도를 정하고 한도 외의 금액은 인민위원회가 정하는 기간 동안 강제적으로 예금하게 했다. 교환 한도는 봉급자의 경우 지난 달 수입 입금액, 농민은 매호 당 700원, 10인 이하 고용 기업가는 소득세와 과세표준액 1개월분의 50퍼센트 이내, 10인 이상 고용 기업가는 지난 달 지불한 임금액의 50퍼센트 이내였다고 한다. 이 조치의 영향을 김성보는 이렇게 정리했다.

 

화폐개혁이 주민에게 미친 영향은 계층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일반 근로대중은 월 근로소득액까지는 새 화폐를 교환받을 수 있었고, 동결된 예금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 지불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으로 과잉화폐가 회수되어 시장물가가 하락함에 따라, 근로대중의 실질임금은 높아졌다. 그러나 상공업자들이 입은 타격은 컸던 것 같다. 이들이 교환받게 된 화폐량은 정상적인 기업 경영에 크게 부족한 금액이었다. 동결된 예금은 차후 지불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지불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점에서 화폐개혁은 자본 일반에 대한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개혁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소련국립은행이 발행하여 유통시킨 군표를 새 화폐로 교환해줌으로써 소련 정부가 부담해야 할 군표 발행과 유통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다. 소련 정부는 이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화폐개혁 이후 북한 주둔 소련군의 유지비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직접 반영되었다.

 

1947년 말의 화폐개혁을 통해 일제 식민지 화폐제도가 청산되고 화폐주권이 실현된 점, 과잉화폐를 흡수해 물가안정을 이룬 점은 밝은 면이지만, 상공업자들의 자본력이 위축되고 북한 인민이 소련군 주둔 비용을 그대로 물려받은 점, 남북 간에 이질적인 화폐 체계가 형성되어 분단구조가 심화된 점은 어두운 면에 해당한다.

 

‘과잉화폐’는 정상적 경제 운용을 통해서도 점진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지만, 해방 당시의 과잉화폐는 몇 주일 동안의 쿠데타적 남발에 의한 것이었다. 해방 전의 조선은행권 제작은 일본 조폐창에서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그 몇 주일 동안의 인쇄는 서울 시내의 민간 인쇄소까지 동원해서 마구잡이로 이뤄졌다. 당연히 인쇄 품질에도 문제가 있어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받기를 꺼려했는데도 미군정이 그 효력을 보장해주었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에서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지만, 이처럼 중대한 문제가 방치되어 있는 데는 불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북의 화폐개혁을 피해 돈을 남쪽으로 보내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제 예치로 돈이 묶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이 큰돈의 교환을 신청할 경우 조사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 구매력이 계속 보장되고 있는 남쪽으로 돈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간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오는 돈의 분량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해방 전 천내리에서(당시는 함경남도, 지금은 강원도) 사업을 하던 외할아버지가 이 무렵 재산을 포기하고 월남할 때 허리에 전대를 두르고 38선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었는데, 화폐개혁의 상황 아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좌익 탄압을 시작할 때 ‘정판사사건’을 터뜨렸다. ‘경제교란’을 목적으로 1천여만 원의 위폐를 찍어냈다는 주장도 믿을 근거가 없는 것인데, 이제 그보다 수백 배 돈이 남한 경제를 무너뜨리러 38선을 넘어오고 있다고 극우세력은 주장했다. 아마 그들은 이북 화폐개혁의 목적이 남쪽으로 ‘돈 폭탄’ 쏘아 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소련영사관 직원이 이북에서 가져온 돈을 물 쓰듯 하며 귀금속 등을 사 모으는 “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장택상의 발표는 이 우려에 부응하려는 것이었다.

 

“북조선서 박탈한 조은권 귀금속 매점에 살포 - 재경 소 영사관원의 탈선”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영사관원 세가이 세메노빗취 슈딘은 북조선 화폐개혁을 기화로 북조선 민중으로부터 박탈한 수많은 조선은행권을 남조선에 가져다가 물 쓰듯 하며 귀금속 등을 사 모으고 있는 놀라운 국제적 사건이 요즈음 수도청에 탐지되어 그 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가 행하는 바 남조선의 경제혼란을 조장할 목적인지 또는 자기 자신의 사복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여하간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제법에 보장되는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 소련영사관원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선량한 이 나라 백성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통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장택상 총감의 특별발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가이 세메노빗취 슈딘은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영사관원으로 현재 그 영사관에 유숙하고 있으면서 북조선에 있는 조선인으로부터 박탈하여 온 조선은행권 약 백만 원을 가져다가 서울서 다수한 귀금속 그 외 여러 가지 물품을 매입하였다. 이 은행권은 월여 전에 환금하여준다 하고 약속 이행치 않은 은행권이다. 이 돈이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있는 남로당에 송금된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슈딘은 이러한 물품을 매입하였다. 이 매입 목적은 혹은 자기의 사유로 만들는지 혹은 본국에 송치하여 고가로 상업목적을 의도하는지 경찰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북조선 민중으로부터 환금하여준다 기만하고 환금 아니 하여 준 돈을 가져다가 남조선에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 소련영사관원이 여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수도경찰은 다행히 이목이 밝아서 비밀 또 비밀리에서 행동하는 이 슈딘의 행사를 잘 알고 있다. 물품매입의 날짜 품명 상점은 다음과 같다. 양심 있는 우리 조선동포는 참고로 잘 보아 주기 바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6일)

 

밑에 붙어있는 목록에는 2월 25일에서 3월 29일 사이에 이뤄진 27건 매입의 금액, 품명, 장소가 나열되어 있다. 제일 큰 매입이 45만 원에 라이카사진기를 산 것이었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사는 등 2천 원 미만의 매입도 8건이나 포함되어 있다. 1만 여 원짜리 금반지 몇 개와 고급 시계 3개 등 휴대에 편리한 고가품을 개인 수요보다 많이 산 것은 사실이다.

 

슈딘이라는 이 영사관 직원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는 조선은행권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북조선에 있는 조선인으로부터 박탈하여 온” 것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아마 2월 25일에 비싼 사진기를 사는 장면이 포착되자 그때부터 담배 한 갑 사는 것까지 다 미행하며 조사한 모양인데, 그것이 무슨 범죄나 되는 것처럼, 마치 치외법권 때문에 체포하지 못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일 뿐이다.

 

슈딘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남 미군정의 법령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이북 화폐개혁 관계 법령에 대한 범죄일 것이다. 평양에 있는 그의 동료 한 사람이 주변의 조선인에게 조선은행권으로 손목시계나 금반지 따위를 사달라는 부탁을 받아 서울에 있는 슈딘에게 맡긴 것이라고 추측된다.

 

1947년 9월 남조선과도정부 정무위원회가 웨드마이어 특사에게 제출한 ‘시국대책요강’ 중에는 화폐개혁의 필요성이 적시되어 있다.(<경향신문> 1947년 11월 6일) 그러나 이북의 화폐개혁 때까지 미군정은 화폐개혁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북의 화폐개혁 소식이 전해지고 극우파가 ‘돈 폭탄’ 위협을 제기하자 방어를 위해 화폐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왔지만 미군정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폐개혁 없다”

 

북조선 화폐개혁에 따르는 남조선의 인플레를 방지하고자 불원한 장래에 미군정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리라는 외전(外電)과 더불어 항간에는 화폐개혁에 대한 의혹심이 증대한데 중앙청 정무회 화폐대책위원회에서는 이러한 긴급사태에 대처하여 동 문제를 최후적으로 결정하고자 5일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현 단계 화폐개혁에 대한 정부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결국 재무부고문 로렌 씨의 주장인 “현하 남조선의 화폐개혁은 민생을 가일층 빈궁화시킬 것으로 정치문제에 앞서 실시될 수 없고, 북조선 화폐개혁에 따른 구권 회수도 대일 배상에 있어 북조선 재산까지 포함되어 있는 만치 기술적 관계로 실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어 남조선 화폐개혁은 현하 사태에 있어서는 실시 않기로 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10일)

 

분단건국의 책임을 따짐에 있어서 이승만과 한민당 등 이남의 분단건국 추진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이북이 국가 수립을 먼저 진행했다는 주장이 많이 있었다. 1947년 12월의 화폐개혁도 그런 주장에서 많이 지목하는 항목이다. 그런데 이북의 화폐개혁은 시행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시점까지 시행을 참아왔다는 점을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행은 미군정이 장악하고 있었고, 미군정은 1948년 초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를 335억 원까지 늘렸다. 해방 당시 55억 원은 물론이고 진주 당시 85억 원에 비해서도 엄청난 팽창이다. 미군정이 남발하는 조선은행권의 이북 ‘경제교란’을 막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이 일찍부터 필요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