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선생의 책들 중 가장 뚜렷이 기억될 것의 하나가 <혈연의 강들>(상, 하)이다. 엊그제 그 책을 나보다 더 필요로 할 사람을 만나 줘버리는 바람에 발행연도를 지금 적지 못하는데, 아마 1998년경, 연변인민출판사 발행일 것이다. 서재 한 구석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책인데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허전해서 마침 연길 가 있는 아내에게 한 질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저본으로 국내에서도 <만주아리랑>(돌베개 2003)을 냈는데, 국내 시장에 맞추려고 분량을 줄이다 보니 내 보기에는 당나귀 귀 떼고 뭐 뗀 꼴로 보인다.

 

<혈연의 강들>은 1994년경 류 선생이 시작한 답사활동의 초기 성과를 정리한 책이다. 그는 1980년대 중엽 늦은 대학생활 중 민족의식에 처음 눈을 떴다고 하며 이후 작가로서 활동에서 민족의식을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이것은 그와 함께 연변대 조선어문학계를 다닌 우광훈, 리혜선 등 그 세대 작가들이 공유한 경향이다. 1979년까지 강력하게 지속된 문혁 분위기에 억눌려 있던 민족의식이 1980년대 들어 풀려나 자라나기 시작했는데, 그 주체가 된 것이 1950년대 출생 문학도들이었다.

 

그런데 민족의식 측면에서 또래 작가들보다 류 선생이 한 발짝 더 나간 것이 답사활동이었다. 류 선생 앞 세대 중에도 여러 해에 걸쳐 자전거로 만주 지역을 답사한 분이 있었는데, 땅과 사람을 직접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는 류 선생의 선구자다. 류 선생은 그 정신을 계승하면서 보다 체계적인 작업방법을 취했다. 작업 성과를 활용할 길을 넓게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성과 활용의 구상과 작업방법은 단계적으로 진화했다. 최초의 구상은 하나의 '지리지'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 성과가 <혈연의 강들>이다.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과 흑룡강으로 대표된 만주 지역의 조선족 거주 연혁과 실태를 효과적으로 담은 책이다. 중국은 빨리 변하고 있고 조선족의 존재 양태도 빨리 변하고 있다. 1990년대 중엽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 한 단면을 폭넓게 포착한 이 책은 조선족 역사의 가장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

 

이 지리지 작업을 진행하면서 류 선생은 '역사'의식을 키웠다. 처음에 노인들을 취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연혁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차츰 노인들이 겪었던 '시대'에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반공독재 때문에 '시대의 증언'이 많이 인멸되었는데, 중국도 문혁 때문에 많은 자료 파괴가 있었다. 1990년대에는 문혁 이전을 겪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을 때였다. 류 선생은 노인들을 면담하면서 지리적 자료보다 역사적 자료의 의미를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어느 글에 썼던 것 같은데,(어떤 것인지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2002년 3월에 류 선생의 2박3일 답사에 따라간 일이 있다. 두만강변 용연마을의 한 노인을 면담하는 일이었는데, 그의 인터뷰 능력에 나는 크게 탄복했다. 상대방을 그렇게 편안하게 해줄 수가! 우리가 머무는 동안 노인은 내내 잔치 기분이었다. 솥에서는 류 선생이 사 간 개고기가 2박3일 내내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고, 항아리 안에는 노인이 장만해 놓은 독한 술이 찰랑이고 있었다. 60도는 넘는 술이 분명한데, 그 집에서 만 하루를 지내고 나니 내 뱃속에서도 찰랑이고 있었다. 류 선생이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노인 상대의 '술 상무' 노릇을 내가 맡고 있었던 것이다.

 

류 선생은 대학 졸업 후 20년간 연변인민출판사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2001년 내가 처음 만날 때는 직책에 크게 매이지 않고 실제로는 전업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연변에 있을 때(2005년경?) 모교 교수로 들어갈 얘기가 나왔고,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 부임했다. 나는 그가 조선어문학계 교수로 들어갈 경우 노인 면담 작업의 비중이 줄어들게 될 것이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부추겨 한국 국사편찬위원회에 자료 수집 프로젝트 지원을 신청하게 했다. 신청서를 대신 써주기까지 했다. 내 연구비 신청은 1990년 이래 한 적이 없으면서. 그 신청이 국편에 채택은 됐는데, 실행은 되지 못했다. 내가 더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건데.

 

아내에게 책 구해 달라는 전화를 하면서 가능하면 류 선생 부인을 한 번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류 선생이 만든 자료가 어디 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근년 현대사 작업을 하다 보니 그의 자료 범위를 파악해 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지금이라도 그 자료에 접할 수 있으면 남은 <해방일기> 작업에 보탬이 될 것 같고, 현대사 연구자들에게도 활용을 권하고 싶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