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국어생활> 제11권 제2호(2001년 여름)

 

 

1. 序

 

국립국어연구원으로부터 “나의 책 나의 학문”이란 제목의 글을 써 달라는 위촉을 받았으나 선뜻 붓을 들 수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먼저 현재의 나의 생활이 너무나 ‘국어국문학 연구’와 동떨어진 생활이기 때문에 일생 한 길을 걸어오시는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원고 청탁과 함께 이미 발행된 <새국어생활>도 뒤이어 받아 보았다.

 

나의 경우는 정년퇴직을 계기로 서울살이를 그만두고 경기도 포천군, 광릉 뒷산인 죽엽산 기슭에 낙향해서 살다가 거기서도 더 나아가서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 다니다가 지금은 충남 계룡산 갑사 대자암에서 불교적 수행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잡지를 훑어보니 오로지 한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계시는 선배 후배님들의 생활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생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정한 수행이란 마음의 문제지 겉모양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불철주야 마음에 들고 있는 그것,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일생을 되돌아볼 때 이 마음에 들고 있는 그 한 물음,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의 근본은 변하지 않지만 내 경우에는 나이를 먹으면서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학문’이란 말의 근본 뜻은 ‘배움과 물음’에 있다. 주어진 글 제목의 ‘학문’도 꼭 좁은 의미의 ‘국어학’으로 제한시키지 않고 “내가 쓴 책, 내가 걸어온 배움과 물음의 길”로 확대해석을 한다면 주어진 제목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다시 붓을 들게 된 것이다.

 

 

2. ‘민족’에 눈뜨기까지

 

사람들은 보통 일생을 4계절로 나누어 보는 것 같다. 한 해를 ‘사철’,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듯이 그렇게 말이다. ‘철’이란 말은 계절이란 뜻과 함께 “철없다, 철들다”의 경우처럼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지각의 힘”의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철(계절)이 바뀔 때처럼 인간의 지각도 ‘철 바꿈’을 하고, 맨 처음 철이 드는 때를 “철난다, 철들다”로 표현하여 인생 제1기인 봄철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봄은 육체적으로도 성장의 계절이라 사춘기를 겪으면서 커다란 변화를 갖지만 정신적으로도 ‘배움’이 그 생활의 중심을 이루어 모든 것에 의문을 갖게 되고, 좀 철이 일찍 들면 소위 최초의 회의기의 괴로움을 겪게 된다.

 

나의 인생 제1기는 일본의 식민지시대 - 그중에서도 일본이 아시아 전토를 지배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때다. 보통학교 5학년 때던가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던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전교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뙤약볕 아래 일본인 교장의 열띤 고함소리를 참고 들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일사병으로 쓰러졌던 기억이 난다.

 

내가 소위 인생에 있어서 ‘철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내 일생 공부(배움과 물음)할 방향을 잡은 20세 안팎이라 하여야겠다. 내가 1920년생이니까, 1940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해서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이 “우리 민족은 어떤 민족이며 민족의 근원은 어디인가?”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국학(國學)에 대해서 백지장같이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에 이전에서 만나 뵈었던 기라성 같은 스승님들, 이희승-박종홍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필자 운명의 출발점이 된 것을 물론이거니와, 조윤제-김상기-김상용-계준태-이태준 선생님 등 - 비록 전공은 달라도 그 말씀 없는 중에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나라와 겨레 사랑하는 마음들은 젊은 날의 필자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특히 나의 경우는 다른 학우들과는 다른 성장기를 겪었기 때문에 자기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과 감격이 남달랐던가 싶다.

 

나의 출생지는 충남 아산(친가)-공주(외가)의 전형적인 유교 가정인데, 만세사건에 쫓겨 고향을 떠나 함경도로 피신하신 아버지를 몇 해 후 찾아 나선 어머니 덕분으로 나의 보통학교 때의 성장지는 함경도가 되었다. 사투리도 다르고 지방의 풍속도 다른 것을 아주 어린 나이에 경험한 것이 훗날 ‘민족’에 대하여 철이 날 때에 생각할 거리가 되었음직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조그만 마을이어서 군청소재지에 있는 보통학교까지 6년 동안을 기차통학을 했다. 본래 허약한 물켕이 체질에 더 먼 거리에 있는 여자중학교까지 계속 기차통학을 할 수 없어서 진학을 단념하고 있을 때, 부모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살던 이웃마을에 생긴 일본인 소학교 고등과(2년제)로 나를 진학시키기 위하여 이사를 하셨다. 내가 후일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연구를 마음놓고 할 수 있었던 근본도 여기에서 길러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심상과-고등과를 다 합해도 전체 학생 수는 100명 안팎이었으니 도서실 책은 모조리 읽을 수 있는 호젓한 독서실이었다.

 

비록 내가 저희와는 다르게 긴 머리채를 그대로 땋고 다니는 ‘조센진’ 소녀이기는 했으나 어린 학생들은 나를 “야사시이 리-상”으로 부르며 따랐고, 졸업할 때 최우등생에게 주는 도지사상도 따돌림 없이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여기서 깨달은 일이 있다. 우월적 민족감정이 드세다는 일본인들도 어려서는 전혀 그런 것이 없는데, 차차 성장하면서 어른들에게서 오염되어 ‘애국’이란 이름으로 집단이기주의자들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1936년 2-26사건으로 일본 군부가 내각을 둘러엎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고등과 남학생들이 성질이 난폭해지고 조선인 차별의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들었는데 그때 나는 통분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해 3월 말에 나는 그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그 한 달 동안에 별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인간은 본래로 착하다”는 성선설과 함께 성장하면서 사회의 악에 물들어간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깨닫게 되었다.

 

학교 졸업 후 이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4년 동안은 나의 독학기가 된다. 와세다대학 강의록의 중등과정과 전문과정(國漢文 전공)을 읽었는데 이화전문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전문학교 입학자검정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경성제대에 입학한 것도 나의 경우는 이 전검 합격으로 지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경성제대에 입학하려면 선과(選科)로 입학하는데 중등과정(4년), 전문과정(4년)을 마쳐야 지원 자격을 주는데 웬일인지 전검 합격자에게도 지원 자격을 주었었다.

 

4년 동안의 독학 기간을 나는 함경도와 충청도(외가) 두 고장에서 지내면서, 책으로 읽는 것은 일본어책이지만, 외조부님 따라 한국식 강독을 병행한 셈이다. 외조부님은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나를 무척 신통해 하셨다.

 

내가 조선어문학을 전공과로 택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때는 완전히 일제 최후발악기로 한국 민족과 한국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이 극도에 달했던 때로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교육은 학교교육에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가 한국어문학을 지망할 수 있었던 것은 정규의 학교교육을 안 받았기에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에 세뇌가 덜 되었고, 그리고 나의 가정적 배경이 유교적 내방문학의 온상이라는 것을 이화전문에 와서 비로소 깨닫게 되어 그 놀라움과 감격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할머니, 고모 그분들이 신학문 교육은 안 받았지만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으시는 내훈(內訓)책이나 옛날 고담 ‘이야기책’이 바로 국문학의 내용이라니! 심청전-흥부전-장화홍려전-홍길동전-춘향전, 그리고 삼국지-수호지-옥루몽 등등. 그 소위 부녀자들이 읽는 ‘언문’책이 세종대왕께서 지으신 ‘훈민정음’으로 써진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것이다.

 

나의 경성제대 시절, 河野六郞(고노 로쿠로) 선생께서 한국어학 전공의 단 한 사람의 교수였고, 나는 상급생도 동급생도 없는 단 한 사람의 학생이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나는 경찰의 가택수색을 받고 나의 일기책, 기타 한국 역사책, 문학서 등을 압수당하고 서대문경찰서에 호출을 받아 심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몇 년 내 한 사람의 학생도 조선어문학과에 지망자가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나를 취조하는 경찰에게 내가 왜 이 자리에서 무슨 범죄용의자로 심문을 받고 있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는 대답을 못했다. 계속해서 나는 만일 내가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려 한 것이 죄목이라면 그 과를 폐지하여 학생 모집을 안했으면 될 것인데, 학생으로 하여금 응모케 하고, 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나에게 왜 범죄인 취급을 하느냐고 항의했더니 일본 형사는 자기는 국립대학 학과의 존폐 문제에 대해 언급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석방되었다.

 

그러한 경험으로 해서 나는 행동 동기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신앙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기본적인 물음은 이처럼 ‘민족’에 눈뜨게 되면서 민족의 역사, 민족의 근원을 알고 싶다는 순수한 염원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3. 기나긴 여름철 작업, 언어 연구

 

경성제대 시대는 내게 있어서 ‘말’에 대해서 개관하는 언어학의 출발점 시기였다. 고노 선생의 <조선어학개설>, 그리고 <두시언해>에서부터 시작한 문헌어 강독과 방언 조사 실습 등이 진행되는 한편, 나는 도서관과 조선어학과 도서실에서 학외 여러 선학들의 조선어 관계 책을 섭렵하였다.

 

나는 최현배 문법의 그 우수한 체계화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언어학 이론의 불후의 명작인 F. de Saussure의 <일반언어학 강의>의 번역자인 小林英夫 교수의 조용한 강의가 인상적이었고, 그에 맞서서 열을 올리던 <국어학원론>의 저자인 時枝誠記의 일본어학 강의를 기억한다. 그밖에 독일어, 영어, 불어를 위시해서 중국어, 범어, 남방어 등 어학이라고 이름붙은 강의는 이론과 실습 어느 편에 들든지, 청강의 기회를 많이 가지려고 했었다. ‘언어’를 실지로 개관-체험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민족의 기원을 알고 싶은 욕망은 민족어의 기원을 캐는 작업과 일치한다. 언어가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체계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음운론, 어휘론 - 모두가 그 구조의 배후에는 의미적 체계가 있다. 민족어의 역사를 밝히는 계통론은 비교언어학의 방법으로 비교가능한 언어 사이의 음운-문법-어휘의 일치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에서 성립된다.

 

먼저 내외 학자들의 연구사를 더듬은 결과 한국어의 역사를 살피는 계통론적 연구가 너무나 ‘체계’를 무시한 신빙성이 없는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말의 ‘섬’이 일본어의 ‘sima’와 대응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례지만 어휘의 대응례를 ‘일어(一語) 대 일어 식’ 비교로써만 찾는다면 언어가 ‘체계적’이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그리고 대응례의 제시 자체가 아무리 표면 음상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신빙성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는 허전함이 있는 것이다.

 

내가 1985~86년에 쓴 <한국어 어원 연구>(4책)에서 밝힌 것은 대응례를 많이 찾아내었다는 점에서보다 연구방법론에서 종전의 단어 대 단어 식 대응을 지양하고 비교 대상어끼리의 조어 체계를 발견하고 그 위에서 비교를 시도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연구 첫 단계에서는 나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했었다.

 

제1권은 ‘원시한국어의 탐구’라는 부제대로 계통론보다 선행해야 할 것이 어원론이기에 성급하게 얕은 연구단계에서 “어사간(語詞間)의 불일치”로 단정하지 말고, 각 언어마다의 어원 탐색 작업의 기초를 튼튼히 하려는 의도에서 문헌어나 방언형, 현재 우리가 쓰는 모든 어휘자료를 우선 형태 분석하는 데서부터 어근 색출을 엄밀히 한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종래의 문법에서는 단어가 기본 단위였던 것을 형태론에서는 형태소(morpheme)를 기본 단위로 하기 때문에, 단어의 접두-접미 부분의 형태소(접두사-접미사)는 어원 연구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래 문법에서 ‘품사 분류’하던 것을 답습하지 않고 ‘형태소 분류’를 시도했던 것이 석사논문 “한국어 형태소 분류론”(1960)이었다.

 

나는 숙명여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던 1958년부터 석사과정을 이수하면서, 2차대전 후 미국에서 새 언어학으로 등장한 기술언어학(descriptive linguistics)을 익히고, 당시 연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F. Lukoff 교수의 가르침을 입은 것을 감사한다.

 

뒤이어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여 논문으로 쓴 것이 “15세기 국어의 서법 연구”(1970)였다. 이 문제는 중세국어(노라의 -오-) 서술형에서 ‘-오- 삽입모음’으로 일컬어지던 형태소의 논쟁이 이숭녕 선생과 허웅 교수 사이에 몇 해를 두고 되풀이되던 문제인데, 그것을 종식시키는 데(?) 이바지한 논문이다. 문법 범주의 명명은 참으로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를 제1인칭 주어와 호응하는 형태소로 본다면 “人稱”이란 문법 범주가 이 경우 말고도 우리말에서(2인칭-3인칭) 성립되어야지만 입론이 가능하고, 사실상 3인칭 주어에 ‘놋다’로 -오-가 삽입되므로 나는 이것을 정동소(情動素)란 기능을 하는 형태소로 보았다.

 

이리하여 어원 고찰의 첫 시작은 물형 어휘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니 ‘알맹이’의 ‘맹이’, ‘줄거리’의 ‘거리’, 즉 하나는 둥근 것, 또 하나는 긴 것(선조형)부터 다루게 되었다. 그 첫 시도로 원형 어근 ‘맹이’를 가지고 한-일어를 비교한 것이 1973년 파리에서 열린 동양학대회에서 발표된 “Some Notes on Korean-Japanese Correspondence”이다. 종래의 “일어 대 일어” 식 비교가 아니라 한 어근을 중심으로 그 동근파생어군의 비교를 시도한 것이다.

 

<어원 연구> 제1권에서는 앞의 원형어의 어원과 그 대(對)가 되는 선조적(線條的) 개념으로 ‘줄거리, 가운데, 가르다, 가위’ 등 단어의 어원을 살핀 것이다. 제2권은 동사 어휘를 다루었는데 앞에서 살핀 물형어를 근본으로 하여 원형 어휘와 선조어의 파생어군을 살핀 것이다.

 

一. 원형어 동사 어휘도 의미별로 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원곡(圓曲) 개념어(A. 圓曲-屈折 B. 廻轉 C. 蠢動-跼縮)

(2) 내포(內包) 개념어(A. 收藏-陰蔽 B. 膨脹-肥大 C. 內包-核心)

(3) 집단(集團) 개념어(A. 集積 B. 結束 C. 空虛)

 

二. 선조어(線條語) ‘가르다’ 계 -> 동사 어휘

(1) 언어활동

(2) 산법(算法)

(3) 사유(思惟) 작용어

(4) 분리 개념어(A. pt-어두 분리 개념어 B. 분리와 낙하 개념어 C. 분쇄 도약 개념어 D. *kol-도치 어형어)

(5) (邊) 어근 동사 어휘(절단과 整齊)

(6) ‘다’의 파생어(橫-側, 비교, 상대, 병합 개념어)

 

동사 어휘 고찰을 마치고 형용사 어휘의 고찰을 시작했을 때 그때서야 처음 자기가 무엇을 가고 있는지 알게 되어 스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음과 양의 대칭적 의미체계가 우리말에 내재해 있는 조어(造語)체계임을 알고 인접어와의 비교를 시도한 결과, 종전보다 그 대응관계에 대한 확신도가 높아지고 광범위한 대응례를 찾을 수가 있었다. 양(陽) 개념의 대표어는 ‘붉다[赤]’이고 음(陰) 개념의 대표어는 ‘검다[黑]’인데, 가령 ‘구름[雲]’이란 말은 일본어의 kumo이니 종전 같으면 kvr- : kvm- 의 대응에 대해서 그 어형(音相)만 가지고는 확신있게 동근성을 주장할 수 없지만, ‘검다’계 동근파생어군의 어근형 전체를 보면 kvm-, kvr-, hvm-, hvr- 기타 다양한 어근형이 음계 어근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대응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데 신빙성이 높아진다.

 

특히 양 개념을 나타내는 ‘붉다’의 경우는 일본어의 ‘aka’와 너무 동떨어지는 어근형을 보이니 처음에는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밝다(明) : akarusi’, ‘밝다(分明) : akiraka’, ‘붉다 : akasi’ 등 어근형과의 비교에서 우리는 pvlk-인데 일본어는 p- 어두자음과 중간자음 l의 탈락으로 ak-만 남는 꼴임을 알게 된다. 일본어의 분리 개념을 나타내는 Firaku(開)는 일본 고대 어형이 Faraku이니, 본래의 *palk- 어근형의 자음이 남아있는 꼴이며, 우리말에서 ‘발기발기[分裂]’, ‘벌리다(開)’의 *pvlk > pvl- : Fvrvk- 대응형을 보여준다.

 

음-양 사상은 보통 생각하기를 중국 한(漢)민족의 전통적인 고래사상으로 알고 있다. 한(漢)문자사에서 보면 팔괘도란 부호문자시대에 속할 것이니 BC 2384~BC 1383(부호문자시대, 董作賓 설)을 넘지 못하고, 복희씨의 하도역(河圖易)에서부터 주 문왕의 낙수역(洛水易 - 周易)까지, 주역은 완성된 것이 BC 20~10세기를 전후해서 이룩된 사상이다. 그런데 알타이 제어에는 처음서부터 음양 대립의 대칭적 의미체계가 언어 그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면 어느 쪽이 음양사상의 원류인지 자명한 일이다. 팔자가 한-일어의 비교를 통해서 얻은 결과로는 한-일어의 분리 연대를 4370~6470년으로 보았으니 그보다는 더 이른 시기에 황하 유역에 퍼졌던 알타이계 문화와 복희역 사상과의 관계는 더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1973. 12. 31 <국어국문학> 제62-63합병호) 이 음양사상에 대해서 “<訓民正音>과 <方格規矩四神鏡>에 나타난 古代東方思想”이란 제목 아래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 논문은 김일부 선생의 <正易>을 일생동안 연구 신봉하신 이정호 선생님의 역저 <訓民正音의 易學的 硏究>에 붙여서 필자가 살핀 한나라 때의 거울 <방격규구사신경>도 하도복희역의 원리로 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필자는 1972년 봄에 출국하여 약 2년 동안 외유하였던바, 이 논문이 써진 날짜로 보아 1972년 일본에서(7개월간 체류) 박물관과 저술들을 살펴보고 집필했던 것이다. 1973년 파리에서의 동약학대회 때 그 전후하여 구라파에서 박물관을 관람할 때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이 남은 것은 독일 함부르크의 몽고 관계 민속박물관에서 우리의 색동저고리(소매) 무늬와 똑같은 색상 배합을 보았을 때다. 이것도 금목수화토 오행사상 하도역의 동방 고대사상임을 실감했다.

 

나는 <한국어 어원 연구> 이 한 책으로 나의 여름철 작업을 끝낸 셈이다. 거기서 얻은 결론이 우리 민족어의 기원은 스와테슈의 언어연대학의 방법을 도입하여 한국어와 일본어와의 분리 연대가 4530년 내지 6470년이고, 퉁구스어와의 분리 연대는 5127년 내지 7143년이니, 그보다 더 이전에 알타이 제어의 한 가닥으로 몽골리안 루트의 한 갈래로 있다가 부여-한 공통어기로 발전하고 거기서 원시부여어와 원시한어로 갈라졌으니 그것은 한-일 공용어기에 해당되며, 한-일 공통어(원시한어)에서 한반도에는 삼한어가 남고 일본어는 반도에서 분리되어 일본열도에서 원시일본어가 된다고 보았다. 한편 원시부여어에서는 고구려어가 발달하고, 삼한어는 마한-진한-변한어가 각각 백제어-신라어-가라어로 발달하여 북방의 고구려어와 함께 고대한국어를 형성했다가 통일신라 후에는 언어도 통일되어 중세한국어로 발전하고 현대한국어로 되는 것이다.

 

뒤이어 나의 <한국어 어원 연구> 네 권의 내용을 기저로 하여 일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1988년에 일본 學生社에서 출판하였다. 정년퇴직 후 서울살이에서 시골로 낙향하여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동계어를 쓰는 일본인들에게 이 사실을 바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4. 가을을 사는 나의 ‘물음’

 

지금 나는 인생의 제3기 가을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도 계절처럼 4분해서 80세쯤의 나이는 겨울철에 해당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의 겨울은 죽음 이후의 철로 잡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는 80세가 아니라 100세가 되어도 ‘가을’, 황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에서 죽음을 ‘돌아가신다’고 함은 우리가 한 생명으로 모습[相形]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모습이 없어지는 것을 ‘돌아가신다’ 하였으니 어디로 돌아가느냐, 본 생명, 본래로 환원하는 것이 죽음 아니겠는가? 나무를 보라. 가을이 깊어져 나뭇잎이 단풍지고 낙엽 되어 다 헐벗었다 해도 땅속에 있는 나무뿌리는 살아 있으니 죽은 생명이라고 하겠는가.

 

여름철 나의 물음의 주제는 ‘민족’이었다. 이제 물음은 다 끝났는가? 아니다. 이제야말로 “나는 누구인가?”의 본원적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의 근본 물음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 차원의 “나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인간 그 자체, 그리고 인류 전체의 삶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이 계절의 특성을 ‘깨달음’에 두었고, ‘깨달음의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날에 일기를 쓰던 버릇이 남아서 <佛光>이라는 불교잡지에 나는 1987년부터 달마다 수필을 연재케 되었으니 ‘일기’ 아닌 ‘월기’가 된 셈이고, 그것을 묶어서 두 권의 수상집이 나왔다. 이것이 제3기의 ‘나의 책’이다. <두메산골 앉은뱅이의 기원>(1991). <여든 살의 연꽃 한 송이>(1999).

 

인생 제2의 계절은 ‘논리’의 계절이요 ‘언어’의 계절이었지만, 이제 제3의 계절은 영성(靈性)의 계절이요, 무언(無言)-무상(無相)-무념(無念)의 계절이다.

 

깨달음의 어근 ‘깨다’ - 잠깨다, 꿈깨다의 어원은 ‘다’에 있다. ‘’ 명사는 태양이며, 단군의 ‘檀’은 ‘박달’나무 단 字이고 ‘달’(光明의 땅)이 바로 우리나라 광명의 땅이다. 우리를 ‘배달’민족이라 함도 ‘달’에서 ‘ㅣ달’로 ‘ > ㅣ’의 변화를 일으켰을 뿐, 같은 말이다.

 

‘깨다’의 또 다른 뜻은 ‘깨부수다’와 같이 단단한 것을 부수는 뜻인데 이것은 문헌에 ‘밤qtrkk다[剝皮]의 예로 보이니 밤껍질 ’벗기다‘ 또는 ’발기다‘의 뜻이다. 이 분리 개념도 양 개념에 속함은, 새벽<새>이 되어 동이 트는[開東] 것도 천지가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 제2기의 말의 뿌리 캐기 작업을 그만두고 무언-무념의 제3기로 들어간 데는 실로 오랜 준비기간이 있었다. 참으로 세종대왕의 은혜는 형언할 수 없이 크시다. 만일 5백년 전에 훈민정음을 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문자 없는 민족이 되어 우리가 오늘 세계 속에 살아가는 데 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 어떻게 힘을 얻었겠는가? 나의 제2기의 말의 근원 캐기 연구도 5백년의 기록이 있기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언어연대학(어휘계통학)적 고찰을 통하여 6-7천년의 역사의 복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나의 제3기의 삶에 있어서도 교단을 물러서자 ‘무소유’와 ‘친자연’을 동경하여 서울살이를 집어치우고 산골살이를 시작했던 것인데, 그 밑바탕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수십 년 동안 나의 신념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 부처님의 가르침조차도 나는 ‘훈민정음’에서 얻어졌으니!

 

세종께서는 현실을 다스리는 정치면에서는 당시에 융성했던 유교 주자학의 학자들을 등용하여 새로 세운 조선조의 국가이념으로 확립시켰지만,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으셨으니, <훈민정음> 지으시고 첫 번째 하신 일이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완성이다. 그리고 곧이어 세종의 아드님인 수양대군이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석보상절>을 지으시고, 위의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월인석보>가 된 것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석보상절>을 읽기 위하여 날마다 국립도서관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 국보급 귀중도서라 특별취급을 하는 책이었다. 현존본 4책(그 당시) 중에 맨 처음에 나오는 제6권을 읽고 첫밗에 한 대 얻어맞은 물음이 있다. 그것은 석가모니의 부인 야수다라가, 어린 아들 라후라를 출가시키려고 부처님이 보낸 목련존자에게 퍼붓는 항의인데, 그것은 부처님이 자신의 아들마저 출가시키려는 것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었다. 다음으로 이모 大愛道를 보내어 야수다라를 타이르려 하지만 이 역시 한 마디도 못하고 돌아서 나온다. 물음의 형식을 취하는 그 항의의 말이 너무나 정당하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야수다라의 편이었다.

 

如來께서 태자이시던 시절에 나를 아내 삼으시니 태자를 섬기되 하늘 섬기듯 하여 한번도 소홀한 일이 없었는데 妻眷 된 지 삼 년이 못 차서 세간을 버리시고, 성을 넘어 도망하시어... 鹿皮옷 입으시고, 미친 사람같이 산골에 숨어서 여섯 해를 고행하셔서 부처님이 되어 나라에 돌아오셨어도 친하게 대해주지 않으시며, 전의 은혜를 잊어버리시고 길가는 사람같이 여기시니, ... 우리 母子가 외롭고 혼미하게 되어 인생의 즐거운 뜻이 없고 죽음을 기다리니 목숨이 무거운 것이므로 손수 죽지 못하여 ... 비록 사람의 무리 속에 살아가도 짐승만도 못합니다. 서러운 人生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으리오! 이제 또 내 아들을 데려가려 하시니... 태자가 道를 이루시어 당신이 자비를 베푼다고 하시나, 자비는 중생을 편안하게 하시는 것이거늘, 이제 도리어 남의 母子를 여의게 하시니 무슨 자비가 계시는 것입니까?

 

내가 후일 이 대목을 10년 후에 교단에서 국어학 강독 시간에 가르치면서도 석가모니 출가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어서 “聖人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숙대일보>에 3번 연재의 글을 썼었다. (1957년경) 그로부터 내외 불교 관계의 책을 섭렵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야수다라의 문제는 그 후에 다시 한번 <한국 여류 수필선>에 그전보다는 조금 철난 소리를 쓴 기억이 난다. 목련과 대애도가 야수다라의 항의에 혼이 나서 물러간 후에 야수다라에게 공중에서 석가모니 음성이 들려온다. “그대는 나와의 전생 인연을 모르는가?” 이 한마디에 야수다라는 눈물을 흘리고 자기 운명을 깨닫는 것이었다.

 

전생 인연이란 <월인석보> 1권에 나오는 善慧수자와 俱夷아가씨의 이야기다. 선혜가 당시의 부처님 錠光佛께 바치려고 꽃을 구하는데 俱夷女가 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자기에게 꽃 팔기를 청하니 여자는 世世生生에 “그대의 가시[妻] 외어지이다”라는 조건부였다. 선혜는 나는 출가자라, 남이 나라를 달라면 나라를 주고 처자를 달라면 처자를 주는 무소유의 입장임을 밝힌다. 그래도 俱夷는 그런 줄 알면서도 꽃 일곱 줄기를 주며 다섯 줄기는 그대의 몫으로 두 줄기는 내 몫으로 부처님께 바쳐달라고 부탁을 한다.

 

우리는 살아나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삶의 대전환기를 맞이할 때가 있다. 야수다라는 공중에서 들려온 석가모니의 음성을 듣고 자기 운명을 순간에 깨닫는다. 그야말로 생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야수다라는 시이모인 대애도와 함께 여자로서는 첫 번째 출가자가 된다.

 

나에게도 이와 방불한 마음의 대전환의 순간이 있었다. 1973년도에 대만에서 음력설을 지내고 2월에 인도에 들러 부처님이 성도하신 부다가야에 들렀을 때, 내 일생에 있어서 종교적 회심(回心)의 계기가 된 중요한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종교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받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자기 무지와 오만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 쏟아지고 그 감사의 마음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깨달음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무지해서 몰랐던 것을 일시에 환하게 알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무수한 다겁(多劫)의 생을 깨달아 가면서 살아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깨달음을 향하여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하안거 철이다. 모두 “이 무엇고?”의 화두를 들고 하루 네 번(한 번에 두 시간씩), 여덟 시간의 참선을 위주로 하고, 틈틈이 뒷산과 계곡길을 포행하는 그 순간에도 이 물음을 계속 놓지 않는다. 어둠을 깨치고 광명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계절. 지구 위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밝음이 일시에 오기를 기원한다.

 

 

['아래아'가 이 프로그램에서는 서포트가 안 되는 모양. 그 때문에 제대로 옮겨놓지 못한 대목이 있는데, 방법을 찾으면 바로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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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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