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형벌의 주종은 징역이다. 징역보다 심한 형벌로는 사형이 있지만 숫자가 적을 뿐 아니라 제도 자체가 폐지돼 가는 추세다. 가벼운 것으로는 벌금형이 있지만 그리 심각한 형벌로 인식되지 않는다.

 

감옥살이가 형벌의 주종이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자유’의 가치가 확립됐기 때문에 그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징벌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전의 감옥이란 죄수를 대기시키는 장소일 뿐이었다. 목을 자르든 귀를 자르든, 곤장을 치든 종아리를 때리든, 신체를 손상시키거나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진짜 형벌이었다. 유배 같은 자유의 제약은 지배층에만 적용됐고, 형벌보다 징계의 의미가 강했다.

 

형벌의 목적을 복수(復讐)에서 교화(敎化)로 옮겨간 인권사상의 발달이 17세기 이래 징역형의 일반화를 가져왔다. 그 후 감옥의 발달은 산업혁명에 발맞춰 진행됐다. 산업사회 형성에 따라 폭증하는 범죄를 처리하기 위해 형벌의 계량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품의 계량화가 대량생산 체제에 필요했듯 형벌의 계량화는 대량재판 체제를 뒷받침해 줬다.

 

그런데 근년 미국에서는 징역형을 다른 처분으로 대신하는 ‘대안판결’이 유행 중이다. 몇 주 전 마이애미의 슈퍼볼경기에 참가하러 간 풋볼선수가 성추행혐의로 입건됐을 때 에이즈검사를 자진해서 받는 등 에이즈 퇴치운동 홍보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풀려난 일이 있다.

 

상습적 성범죄자에게 거세효과가 있는 약물을 복용케 하는 판결은 이제 흔해졌다. 절도범의 집에 도둑맞은 사람들을 보내 마음대로 물건을 집어가게 한 판결도 있었다. 마약사범에게 범죄사실을 적어 넣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게 한다거나 폭력범 집에 ‘맹견주의’ 대신 ‘폭력범주의’ 팻말을 붙이게 하는 등 ‘주홍글씨’식 망신을 주는 방법도 인기다. 물론 본인이 집행유예의 대가로 선택할 때 내릴 수 있는 처분들이다.

 

이런 추세에 우려도 있다. 판사의 재량권이 너무 커서 재판의 공정성이 지켜지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대안판결이 흔히 노리는 수치심의 유발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창의적 처분이 죄인 자신이나 사회를 위해 틀에 박힌 징역형보다 좋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받고 있다.

 

웬만하면 사람을 감옥에 보내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진정한 법치를 생각한다면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다. 당장 모든 뇌물범만 잡아들여도 감옥을 지금의 열 배는 지어야 할 형편 아닌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