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은 ‘발명된 허구’인가?


이 글에서는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서 쓰겠다. 민족주의를 둘러싼 담론에 혼동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적 현상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을 민족 개념과 관련된 모든 정치현상으로서의 민족주의와 구분해서 표시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비슷한 용어 구분이 널리 행해져 왔다.


내셔널리즘은 근대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정치이념의 하나다. 그 힘이 너무 커서 일으킨 폐단도 컸다. 그래서 유럽 등 ‘선진사회’에서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반감이 크다. 반면 근대문명의 경험이 얕거나 안정성이 떨어지는 사회에서는 내셔널리즘의 힘이 유지되고 있고, 오히려 더 강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에는 민족주의의 힘이 강하고, 그 민족주의 중에는 내셔널리즘의 성격을 띤 요소가 많다. 한국사회의 근대문명 경험이 얕고 안정성이 약하기 때문일까?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한민족의 전통이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 중 가장 큰 호응을 받는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과 에릭 홉스봄 등이 제시한 ‘역사주의(historicism)’다. 내셔널리즘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것으로,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83)와 홉스봄의(테렌스 레인저와 함께 엮은) <전통의 발명>(1983)이 가장 널리 인용되는 문헌이다.


홉스봄과 레인저는 ‘발명된 전통’과 ‘진짜 전통’을 대비시켰는데, 그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과연 두 가지 전통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인지 의문을 많이 품는다. 모든 전통에는 ‘발명된’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모든 전통에 ‘진짜’의 측면도 또한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유럽의 근대국가가 형성될 무렵 문인과 학자, 정치가와 교육자들이 민족의 전설과 영웅,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내고 키워내는 데 큰 노력을 쏟은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발명된 전통’의 측면이 컸다. 한민족사회에서도 이를 본받아 역사와 위인전을 서술하는 사업이 있었지만, 그 노력은 훨씬 적고 효과도 훨씬 적었다. 한민족의 전통은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빚어져 온 것이므로 ‘진짜 전통’의 측면이 크다.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대상은 민족의 범위와 민족의 주권이다. 한 민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확실한 범위가 있으며, 그 범위 안에서 민족이 주권을 가진다고 상상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상상의 영역과 실존의 영역이 확연히 구분되는지 의문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의 범위도 주권도 분명하지 않던 근세 초기 유럽의 상황으로부터 ‘민족국가’를 빚어내는 과정에서는 상상력의 역할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천 년 동안 반도 안에 민족국가를 꾸려온 한민족은 자기 범위와 자기 주권을 생각하는 데 상상력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근대 민족국가들이 자리 잡기 전까지 1천 년간 ‘기독교인’은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유럽인의 정체성이었다. 언어, 지역, 혈통 등 ‘민족’과 관련된 요소들은 산발적으로 부차적인 역할을 맡을 뿐이었다. 근대에 접어들며 유럽 내의 지역 간 경쟁이 격화함에 따라 민족 정체성이 기독교인, 즉 유럽인의 정체성을 밀어낸 것이 내셔널리즘이었다.


그렇다고 유럽인 정체성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근대 유럽인의 마음에는 유럽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 내의 경쟁에는 민족 정체성이 발동하고, 유럽 외부의 정복에는 유럽인 정체성이 동력이 되었다. 나치의 유태인-집시 학살은 유럽인 정체성이 나타난 것이지만, 게르만족으로서 슬라브족을 멸시한 민족 정체성도 그 못지않은 힘을 휘두르며 폴란드인과 소련인의 피해를 증폭시켰다.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탈민족주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다. 하나는 모든 울타리를 없앤다는 코스모폴리타니즘 지향이고 하나는 민족 울타리를 유럽 울타리로 바꾸는 유럽주의 지향이다. 궁극적 지향은 어떻든 현실의 변화는 유럽주의가 민족주의를 대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한국에도 유럽의 탈민족주의 담론을 옮겨와 민족주의 ‘척결’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 주장을 총체적으로 반박할 만큼 세밀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전통의 발명”이니 “상상의 공동체”니 그럴싸한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풍조는 정리해야겠다. 전통에 발명의 측면이 있고 공동체에 상상의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용어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용어를 만든 사람들도 전통과 공동체에 실체와 실존의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홉스봄과 앤더슨의 관점을 ‘역사주의’라 하는 것은 내셔널리즘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유럽의 역사적 현상이란 말이다. ‘민족’의 관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현상으로서 ‘민족주의’는 근대유럽의 내셔널리즘 외의 다른 형태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민족주의를 논할 때 ‘내셔널리즘’과 구분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근대 내셔널리즘만이 민족주의가 아니다.


근대유럽의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의 다른 형태와 구분되는 특성이 무엇인가? 내셔널리즘도 넓은 범위에서 긴 기간 동안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그 특성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기 힘들다. 구체적인 사례를 놓고 설명하는 편이 효과적이겠다.


내가 이 특성을 명쾌하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이 조관자의 논문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였다. 이 논문이 뉴라이트 쪽에서 만든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려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 논조가 뉴라이트 쪽과 맞는 것 아닌가 의심도 받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책에는 좋은 논문도 여러 편 실려 있고, 일본의 필자 한 분은 책의 성격을 모르고 게재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조관자는 이광수의 ‘변절’을 부정한다. ‘내셔널리스트’로서 그의 자세가 ‘전향’ 전이나 후나 일관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민족의 힘’에 대한 욕망이 내셔널리스트의 자세였다. 전향이란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한민족에서 내선일체의 대동아민족으로 옮긴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인의 하나인 이영훈은 이 논문을 ‘민족주의의 모순’을 공격하는 데 이용하려 했다. 뉴라이트에 대한 ‘반민족주의’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문제는 그가 조관자의 논점을 오해하거나 왜곡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대한민국 이야기> 104~105쪽에 이렇게 썼다.


"그가 협력자로 돌아선 것은 적어도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정직하였습니다. 조관자 교수는 그러한 정신세계의 이광수를 '친일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친일을 하는 민족주의자! 이 얼마나 모순된 표현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러한 모순된 표현에서 이광수만이 아니라 식민지기를 살았던 대다수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서 협력과 저항은 신구 두 문명이 격렬히 충돌하는 고통이었으며, 그 속에서 문명인으로 소생하기 위한 실존적 선택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이영훈은 ‘모순’에 집착한다. 민족주의가 원래 모순덩어리인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기준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모순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모순은 이영훈처럼 얕은 차원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조관자는 이광수에게서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조관자가 말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은 아무 역설도 개재되지 않은 명쾌한 것이다.


"‘내선일체’에 대응한 '동조동근'의 혈통과 역사적 전통을 창출하며, 조선인이 제국 일본의 '주체=신민'이 되는 내셔널리즘의 한 형태를 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친일 내셔널리즘'이라 부르고, 최남선과 더불어 그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던 이광수의 논설을 통해 '민족을 위한 친일'이 형성되고 파탄되는 지점을 추적하려고 한다."(527쪽)


"민족 사학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이른바 민족 개량주의의 근대화론자들이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에 이용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들은 근대 문명국가를 욕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일제와 타협하는 생존의 길을 걸은 것이다."(530쪽)


조관자도 ‘역설’을 이야기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존 차원의 역설이 아니라 파시즘 취향의 “낭만적인 수사(修辭)”일 뿐이다.


"'조선심'을 사멸하는 것이 '일심일체'인 상황에서 일본의 '형제'들에게 '조선인의 마음'에 호소해 달라고 하는 역설. 생존의 이익을 도모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의 힘에 대한 욕망을 숨기고 가상된 동포애의 집단 도취적인 희생을 찬미하는 파시즘의 낭만적 수사다. 차별과 억압을 원망하는 조선인, 차별과 억압의 이익을 지키고 싶은 일본인, 길항하는 두 마음을 의식하면서 이광수는 '깨끗한 일본 혼'의 대사를 읊고 '천황의 적자'를 연기한 것이다."(547쪽)


힘의 욕망에 근거를 둔 내셔널리즘은 ‘친일 내셔널리즘’으로부터 ‘친미 내셔널리즘’으로도 아무 모순 없이 ‘전향’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조관자는 지적했다.


"이광수는 미군정이 친일 내셔널리즘을 배제하지 않고 반공주의 국가를 준비하는 것에 안도한다. 미국을 적대시하던 '친일'에서 '친미'로 돌변한 모습을 보고 그를 '변절의 천재'인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다. 적어도 이광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충실했다. 강자의 문명과 패권을 욕망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적'인가, '친일적'인가, '친미적'인가 하는 문제는 상황 변수에 불과하다."(552쪽)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한민족 역사의 중요한 원리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제시했다.(51-57, 190-191, 334쪽) 이것은 근대유럽 내셔널리즘의 배타적, 유아독존적 특성과 대조되는 것이다. 화이부동은 유교 질서의 원리이기도 한 것인데, 근대유럽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대비되는 유기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조관자가 ‘힘의 욕망’을 내셔널리즘의 핵심 요소로 보는 것은 그 폭력적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대유럽의 내셔널리즘은 급격한 기술 발달로 인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다.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맹목적 경쟁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성립된 근대 내셔널리즘은 자원 낭비를 억제해야 하는 정상적 상황에서는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한민족의 민족국가가 1천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주의가 맹목적 경쟁 아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타적이고 투쟁적인 면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기간에 걸쳐 대다수 한민족은 민족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어야 한다는, 따라서 최고의 번영을 누려야 한다는 강박은 갖고 있지 않았다.



3.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


유럽의 근대 내셔널리즘은 대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럽인에게는 고래로 민족정체성에 앞서는 유럽인 정체성이 있었고, 이 유럽인 정체성은 대개 기독교인 정체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십자군운동만이 아니라 중세의 주요 전설들도 이 기독교인 정체성의 발현이었고, 이것이 대항해시대 이후 이교도를 정복 대상으로 보는 관념까지 이어졌다.


경제 발달에 따라 유럽인끼리의 전쟁이 확대-심화되면서 기독교인끼리는 미워하면 안 된다는 오랜 관념을 뛰어넘을 필요가 생겼고, 그 필요에서 일어난 것이 내셔널리즘이었다. 근교원공(近交遠攻)에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시대로 옮겨온 것이다. 먼 곳에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이웃나라랑 피터지게 싸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근교원공이니 원교근공이니 하는 말에서 바로 떠오르는 것이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범수(范睢)다. 귀족계급에게 유리한 근교원공 정책을 버리고 왕 중심의 원교근공책을 채용함으로써 중앙집권을 강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범수의 원교근공책이 부국강병의 효과를 거두자 다른 나라들도 이를 따라 채택해서 전국시대 후기의 대세가 되었다.


중국의 전국시대와 유럽의 근대에 어떤 공통된 조건이 있었기에 국제정책의 기조에 비슷한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른 자원 공급의 급격한 팽창이다. 이웃나라끼리의 전쟁은 소모적인 총력전이 되기 쉽다. 일반적 상황에서는 물적-인적 자원의 고갈 때문에 원교근공 정책이 널리 오랫동안 시행될 수 없다. 중국의 철기혁명과 유럽의 산업혁명이 꽤 긴 기간에 걸친 원교근공의 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산업혁명에 따른 자원 공급의 확대가 불러일으킨 여러 가지 ‘근대적 현상’의 중요한 공통분모가 ‘경쟁’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 간의 경쟁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계급 간의 경쟁에, 그리고 내셔널리즘은 민족국가 간의 경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경쟁 주체인 개체의 존엄성을 절대화하는 이 풍조에는 ‘협력’보다 ‘경쟁’을 앞세움으로써 자원 낭비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간사회의 일반적 상황에서는 이런 풍조가 크게 일어나 오래 계속되기 힘들다. 산업혁명의 효과가 지속하는 범위 내에서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탈근대’는 자원과 환경의 한계가 분명해짐에 따라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변화이고, 근대적 ‘경쟁지상주의’의 퇴조가 그 중요한 한 측면이다.


근대적 상황 속에서 부각되었던 경쟁의 주체 중 ‘개인’의 존엄성은 탈근대의 변화에 대해 가장 큰 저항력을 보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계급’은 그보다는 약해도 얼마간의 저항력을 보일 것이다. 사회경제적 관계가 현대인에게 존재의 중요한 양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유럽식 민족국가는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서 그만큼 확고한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내셔널리즘의 퇴조가 본격적 탈근대 변화에 앞서 일어난 것이다.


내셔널리즘의 퇴조에 한 몫을 한 것이 ‘글로벌리즘(globalism)’이다. 굳이 번역하면 ‘세계주의’라 할 수도 있겠지만 ‘세계주의’란 말이 가리킬 수 있는 넓은 의미와 별도로 20세기 말-21세기 초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관련된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글로벌리즘을 생각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와 별도로 내셔널리즘을 생각하는 것처럼.


내셔널리즘의 퇴조에 따라 ‘국민’으로서 사람들의 정체성이 약화되면 다른 층위의 정체성이 확충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확충의 방향에는 넓은 쪽의 ‘세계인’과 좁은 쪽의 ‘개인’이 있다. ‘세계화’란 이름은 인류의 일원인 ‘세계인’으로 넓은 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속의 세계화는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정치적 통합 없이 경제적 통합만이 추진되면서 인간이 권리와 의무를 규정해 주는 정치조직 없이 경제행위의 주체인 개인으로서만 존재하게 하는 방향이다.


지금의 글로벌리즘은 실제에 있어서 진정한 세계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의 극단화다. 이것은 경쟁을 억제하고 협력을 늘리는 ‘탈근대’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신자유주의에서 추동력을 얻는 것이다. 하나의 체제가 해소될 때 해소의 원인이 된 모순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는 일시적 ‘반동’ 현상으로 나는 본다.


내셔널리즘의 퇴조는 탈근대 시대의 큰 흐름으로, 인류가 순응해야 할 변화 방향이다. 그런데 지금은 글로벌리즘이란 역류가 기존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며 개인을 더 큰 위험과 고통에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더욱 악화시키며 인류문명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끌려가는 글로벌리즘이 진정한 세계주의로 방향을 돌리도록 주의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도 길게 보면 근대 내셔널리즘의 뒤를 따라 퇴조할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내셔널리즘 포기가 사이비 세계주의에 휩쓸려 근대적 모순의 극단적 심화라는 파국적 결과로 이어지는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 지금의 당면과제다. 한민족의 민족주의는 원래 근대 내셔널리즘과 달리 튼튼한 뿌리를 가진 것이기도 하거니와, 반동적 신자유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민족정체성을 확실히 할 필요가 또한 있는 것이다.



4. 한민족의 민족주의


여기서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데 통상 ‘민족의식’이라 하는 것까지 포함하겠다. 굳이 구분한다면 민족의식은 민족주의의 바탕이 되는 재료이며 민족의식이 ‘정치화’한 것을 민족주의라 하는데, 근대 내셔널리즘처럼 극단적인 정치화가 아닐 경우 그 사이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중국에서 조선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민족심(民族心)’이란 말을 쓴다. 정치적 민족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라는 말을 피해서 이 말을 쓰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의식에서 민족주의까지 자연스럽게 포괄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한반도라는 꽤 명확히 구분되는 지역의 모든 주민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국가체제 안에 살아온 것이 적어도 1천년은 된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안정된 민족국가를 운영해 온 민족이다. 확고한 민족의식을 키워내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하나의 국가 안에서 살았더라도 신분 차별이 있었다면 ‘국민’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고, 민족국가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근대 내셔널리즘 기준의 ‘국민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아니더라도 민족국가는 엄연히 존재했다. 개항기 외세의 위협 앞에서 외세를 환영하는 피지배계급의 계급적 움직임이 있었는가? 민족을 배신하는 행태는 굳이 따지자면 지배계급 출신에게서 더 많이 나타났다.


민족의식은 타민족의 인식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민족 간의 접촉은 근대 들어 급격히 늘어난 것이기도 하려니와, 근대 이전에도 한민족에게는 오랫동안 이민족과의 접촉이 특히 적었다. 1천 년간 이민족과의 대규모 전쟁은 몇 차례 되지 않았고, 평상시에 외국인의 방문도 조선(및 고려)인의 국외 여행도 아주 적었다. ‘정치화’의 조건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자기정체성의 한 요소로 갖고 있을 뿐이었다.


앤더슨은 공동체의 상상에서 상상의 구체적 대상으로 공동체의 ‘범위’와 ‘주권’을 꼽았다. 전통시대의 한민족에게 민족의 범위란 더할 수 없이 자연스러운 실체였다. 한편 주권에 대해서는 명확한 생각이 없었다. 배타적 주권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민족국가는 그 존재한 대부분 기간을 통해 중국의 왕조와 ‘사대(事大)’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관계에서 고려와 조선의 주권은 (근대적 기준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유기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천하’체제에는 완벽한 배타적 주권의 개념도 없었거니와, 사대관계가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완벽하지 않은 만큼 유연성을 가진 관계였기 때문에 1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근대 내셔널리즘에 물든 오늘날의 우리 민족주의자들은 혹시 고구려가 잘하면 중국을 정복할 수는 없었을까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을 정복했던 주변민족 중 민족의 실체를 지금까지 우리만큼 지키고 있는 민족이 하나라도 있는가? 완벽한 배타적 주권을 생각하지 않는 ‘화이부동’의 원리가 오늘의 한민족을 있게 한 발판이다.


중국과의 관계에도 수많은 갈등이 있기는 했다. 이 갈등들은 민족주권의 원리가 아니라 천하체제의 원리에 따라 처리되었다. 중국 쪽의 지나친 침해가 있을 경우 대등한 입장에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대-자소(字小)’ 관계의 기준을 들이댄 것이다. 하위의 존재임을 자인하면서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는 이 자세로 중국과의 관계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다른 이민족을 상대하는 데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개항기 조선에 닥친 위협의 1차적 대상이 이 천하체제였다. 동아시아에 앞서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유럽세력에게 중국의 영향력 차단이 중요한 과제였고, 만국공법 체제의 강요를 통한 천하체제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 중국 자체에 대한 침략이 진행됨에 따라 이 작업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단계에서 일본이 조선의 천하체제 이탈을 강요하고 나섰다.


이 강요를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분식했다. 이로써 만국공법 체제의 형태를 갖춘 근대 내셔널리즘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1894-95년 청일전쟁으로 천하체제가 완전히 무너질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범위의 조선인들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근대 내셔널리즘이 이처럼 일본 침략의 도구로 사용된 곡절로 인해 조선인의 민족주의에 균열 현상이 일어난다. 위정척사파는 민족주의의 전통적 형태를 지키려 한 반면 개화파는 일본이 권하는 근대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했다. 소위 개화파 중에는 민족의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근대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틈에 일본의 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도 끼어들었다. 1896-98년간 활동한 독립협회에는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재해 있었다.


장지연(1864-1921)의 이력이 이 혼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으로 불후의 이름을 남겼을 뿐 아니라 1910년에도 황현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게재해서 핍박받았던 그가 1914년 이후의 친일행위로 얼마 전 서훈을 박탈당했다. 그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개인 이득을 위해서만 친일행위를 한 것으로는 상상하기 힘들다. 어느 시점에서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위해 최선의 행동을 찾아서 행한 것으로 나는 본다. 뜻을 가진 사람도 길을 찾기 힘든 시절이었다.


합방 무렵까지 근대 물질문명의 힘을 발판으로 쏟아져 들어온 유럽 근대사상의 위세 앞에 전통적 가치관과 세계관은 힘을 잃었다. 조선인의 민족주의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민족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근대 내셔널리즘은 명확한 진로를 잡을 수 없었다.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민족주의는 신채호의 저항적 태도에서 이광수의 순응적 태도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펼치고 있었다.



5. 한국인의 민족주의


오랜 세월 동안 종주국과의 관계 조절을 통해 적당한 정도의 주권을 누려온 조선인에게 “모 아니면 도”의 절대주권은 벅찬 과제였다. 대한제국기의 ‘외세 줄서기’는 예외적인 매판 자세가 아니라 ‘중국 눈치보기’에 길든 지배층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줄서기나 눈치보기로 적당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완전 독립 아니면 식민지라는 양자택일의 과제였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일단 식민지가 되면 모든 면에서 지배국의 영향을 받게 되고 민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 민족주의는 일본을 통해 배운 근대 내셔널리즘의 틀에 맞춰 새로 빚어지기 시작했고, 1919년경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면서 근대 내셔널리즘이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절대주권이 조선 민족주의의 절대적 요소가 된 것이다.


식민지인에게 절대주권의 과제는 극단적 선택을 강요했다. 식민지배를 부정하든지 민족을 부정하든지. 독립투사의 길과 민족반역자의 길뿐이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 조관자가 본 이광수처럼 민족정체성의 전환으로 ‘내셔널리스트’의 위치를 지키는 길도 있었다.


양쪽 극단을 싫어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어떤 길이 있었는가. 민족의식은 갖고 있지만 현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는 보통사람이라면 일본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되 미래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민족개량주의’라 하여 오늘의 민족주의자들이 경멸하거나 매도하는 자세가 보통사람들의 그런 희망을 담은 것이었다. 식민지배자들이 민족주의의 반발을 얼버무리기 위해 민족개량주의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식민지배자 입장에서도 양보와 타협의 의미가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형성된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해방 후에도 남한에서 관성을 발휘했다. 반미운동이 표면화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지만 그 이전의 반독재투쟁도 실질적으로 신식민지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한편 권력은(재력 포함) 식민지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족의식을 버린 세력의 손에 쥐어져 있다. 그리고 수많은 보통사람들은 미래의 희망으로 현실의 불만을 달래며 신식민지체제 속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식민지체제’라면 통상 독립 후에도 원래의 지배국이 실질적 지배력을 유지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남한의 경우 미국이 일본의 지배권을 거의 그대로 넘겨받았기 때문에 기본 개념이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신식민지의 개념은 식민지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1945년 이후 해방 후의 남한에 신식민지체제 관점을 적용하는 데는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남한 민족주의가 식민지시대 민족주의의 틀을 그대로 지킨 것은 신식민지체제 관점의 적용을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다.


안재홍은 식민지시대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날 필요를 분명하게 제기했다. 해방 한 달 후 발표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에서 ‘신민족주의’의 모색을 제창했는데, 급하게 작성한 탓인지 ‘신’민족주의다운 새로운 내용을 많이 담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향하는 방향은 모두에서 명확하게 제시했다.


민족과 민족의식은 그 유래 매우 오랜 것이니, 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대통일을 요하는 원심적인 민족연합국가, 이를테면 19세기 이전의 독일인의 제 국가와 같은 데 있어서의 지방적 애국주의는 지양 청산을 요하였음과 같이, 근대에 있어 국제적 협동관련성을 무시하는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로서의 주도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 이에 특히 신민족주의가 제창되는 이유이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16쪽)


안재홍은 1931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 여순 감옥에 갇혀 있던 신채호의 글을 백여 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조선상고사> 원고) 신채호의 민족주의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맡았고, 일제 말 전쟁기에는 스스로 역사 연구에 몰두한 사람이다. 그는 근대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의 절대적 형태가 아님을 간파하고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벗어나 국제적 협동관련성을 추구하는 신민족주의를 제창했다.


두 개 측면에서 시의에 맞는 주장이었다고 나는 본다. 외부적으로는 투쟁적 내셔널리즘이 극복되는 세계적 추세에 맞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식민지시대의 피해의식에 얽매여 권리만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에서 이제 독립민족으로서 책임도 생각하는 민족주의로 나아갈 필요를 말한 것이다. 신채호를 존경하고 존중하면서도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만 보는 관점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될 때가 왔음을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후 남한에서는 민족주의 담론이 반공독재체제에 의해 봉쇄되고 말았다. 시대의 요구에 맞추는 담론의 발전이 막힌 상태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이 껍데기는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이용당하기만 할 뿐,(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핑계로 쓰이거나 독점기업의 이익을 보호해 주는 데) 정치적 기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지 못했다.


아직도 민족주의는 한국에서 정치이념으로서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이념이라면 다른 이념과 어울려 정책 형성과정에 작용해야 하는데, “충신 아니면 역적”의 2분법적 인식 차원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이념과의 절충이 어려운 것이다.



6. 21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전망


다른 사회에 비해 한국사회에서 앞으로 민족주의의 역할이 클 것을 두 가지 근거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긴 민족국가의 역사에서 오는 전통의 무게이고 또 하나는 민족 분단 상황이다.


자연스러운 통합성이 억지로 막혀 있는 상태는 강물이 댐으로 막혀 있는 것처럼 큰 잠재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언제 어떻게 방출되느냐에 따라 이 에너지가 한국 사회에 화가 될 수도 있고 복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결정할 중요한 요인 하나가 민족주의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인해 민족정체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려지는 추세에 놓여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정치이념으로서 민족주의의 역할이 사라질 것을 내다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내셔널리즘이 퇴조한다 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덩달아 사라지기에는 전통의 무게가 너무 크다. 게다가 민족 분단의 상황이 민족주의를 섣불리 무시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 살아있는 한국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민족주의를 정치적 판단의 중요한 한 요소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민족주의가 약한 것이 문제이므로 강화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흔히 갖고 있다. 나는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용을 정비하고 확충하는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목청만 높여서는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기만 좋다.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적 이슈의 하나인 독도 문제를 보자. 일본이 독도를 집적거리는 데 분노하는 한국인 가운데,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할 조그만 근거라도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도 감안해서 종합적 판단을 내리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대방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하고 내 주장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실질적 근거를 따지는 길을 스스로 틀어막고 그저 1 대 1의 대립으로만 제3자가 파악하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런 일방적 태도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상황을 정병준의 <독도 1947> 762-763쪽에서 볼 수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회담 때의 일이다.


한국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 7. 19)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주장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시켰다.


나아가 한미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협의(1951. 7. 19)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정부는 정치적 주장이었던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이후 영토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파랑도를 주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부 스스로 명확한 확증근거를 갖지 못한 지역을 한번 주장해보자는 정도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토인 독도의 불가침성에 대한 진지한 대응과는 거리가 있었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간도는 우리 땅”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민족주의를 양적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 절도를 잃으면 질적인 충실성을 손상시킬 수 있다. 확고한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 땅!”만 외치는 한국인이라면 그들이 외치는 “독도는 우리 땅”까지 근거를 의심받을 수 있다. 60년 전에 “파랑도는 우리 땅”이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지금도 독도 문제를 놓고 “지금은 곤란하다.”고 하여 일본 쪽 주장의 빌미를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영유권의 타당성을 국가원수에게까지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의 문제다.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강화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껍데기만 더 딱딱하게 만드는 경화가 아니라 내용을 잘 갖춰서 스스로 자라나는 힘을 북돋워주어야 한다. 어떤 방법과 기준에 따라 한국 민족주의의 내용을 갖추고 다듬을 것인가? 기존 민족주의의 약점과 함께 시대의 요구를 살펴야 한다.


(1) 경직성을 탈피해야 한다. 민족의식이 강한 이들 중에 중국 조선족을 가깝게 대하려다가 극단적인 반감으로 돌아서는 일이 많다. 문화감각이 한국인과 동일할 것을 기대하다가 실망할 때, 또는 중국인으로서 국가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민족의식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데도 내 경직된 기준에 얽매여 거리를 가지는 것이다.


조선족 사회에서 살아보고 탈북자들과 어울려본 경험으로 볼 때 조선족보다도 북한 주민들의 문화감각이 한국인들로부터 더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분단문제 극복을 위해서는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민족정체성 의식이 필요하다. 이런 의식 변화를 위해서는 분단문제 극복의 목표를 가리키는 데도 ‘통일’보다 ‘통합’ 같은 더 유연한 표현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엄격한 ‘범위’ 관념을 벗어나야 한다.


(2) 권리와 함께 책임도 생각해야 한다. 식민지인의 민족주의는 피해의식을 바탕으로 빼앗긴 권리의 회복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독립민족의 민족주의는 세계 질서와 평화에 공헌까지는 아니라도 손상은 끼치지 않는 기준을 지켜야 한다. 타 민족의 복리를 침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이 우리 같은 태도를 취하더라도 인류사회에 파탄을 일으키지 않을 만한 기준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현실의 변화를 원하는 식민지인은 지속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독립민족은 생각해야 한다.


권리와 책임의 균형감각은 중국의 존재를 생각할 때 더욱 절실한 것이다. 중국의 국가주의는 큰 가변성을 갖고 있다. 한국은 미국, 일본과 함께 많은 중국인들에게 모델로 의식되고 있는 나라의 하나다. 한국의 민족주의 전개 양상이 중국의 국가주의 발전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3) 대립보다 협력을 바라보는 민족주의라야 한다. 대립 위주 근대 내셔널리즘의 성행은 자원 공급에 한계를 느끼지 않는 특수한 상황 덕분이었다. 이로부터 비롯된 부국강병의 무한경쟁이 아직까지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원과 환경의 한계가 드러난 21세기 상황에서 민족주의도 경쟁 완화를 통해 자원 낭비를 막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 개선에 공헌하는 역할을 찾지 않는다면 순조로운 발전을 바라볼 수 없다.


근년 진행되어 온 ‘세계화’는 인류 공영을 향한 진정한 세계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극단화하는 글로벌리즘으로 향한 것이다. 이것이 권력을 쥔 소수의 이익을 위한 반동적 현상이라는 사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99%의 항의’로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정치적 세계화를 외면하고 경제적 세계화만 추진해 온 데 문제가 있다. 인류 구성원 모두의 권리와 책임을 조직하는 정치적 세계화를 통해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빚어내지 않으면 닥쳐올 파국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민족주의도 대립보다 협력을 중시함으로써 정치적 세계화에 공헌해야 한다.


7. 21세기 한국에서 <친일인명사전>의 역할


한국 정치에서 민족주의는 아직도 의제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어용 민족주의의 조작 외에는 민족주의의 발전과 표현을 일체 가로막고 있던 기나긴 반공독재 시기의 유제(遺制) 속에 한국인들은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이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한 차례씩 냄비처럼 끓어오를 뿐, 민족주의 가치가 다른 가치와 지속적인 경쟁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같은 민족을 뿔 달린 괴물로 보라는 정권의 요구에 대해 순응과 거부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던 반공독재 시절에 민족주의의 관념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민족을 아끼는 사람은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해야 했고, 자기보다 민족을 ‘덜’ 아끼는 사람들과 대화의 길을 찾기 힘들었다. 식민지인의 방어적-피해망상적 민족주의와 같은 틀이다. 해방 후 40년 이상 한국 상황을 나는 이 점에서 ‘신식민지 체제’로 본다.


관념화-절대화된 민족주의는 정치 외부에서 정치를 간헐적으로 뒤흔들기만 할 뿐, 정치 내부에 들어가 지속적 의제의 역할을 맡지 못한다. ‘yes-no’ 질문에만 대답할 뿐, ‘wh’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번영”을 위한 경제성장 주장에 대해 관념적 민족주의자는 현실적 판단을 하기 힘들다. 경제성장에 따르는 여러 가지 현실적 득실을 “민족의 번영”이란 가치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념화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흑백론, 진영 논리의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만의 것이 아니다. 관념화는 온전한 책임과 권리를 갖지 못한 식민지-신식민지 사회의 일반적 풍조이고, 모든 정치적 의제가 관념화되어 다른 의제들의 현실화를 서로서로 가로막는 경색 상태를 이룬 것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다.


이 경색 구조를 해소하는 작업이 1987년 이후 진행되어 왔는데, 이 작업에 큰 잠재적 역할을 갖고 있으면서 아직 역할을 제대로 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민족주의라고 나는 본다. 민족주의가 현실 상황에 맞는 자세를 갖출 때, 다른 여러 가지 의제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좌표계 역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한미 FTA, 빈부 양극화, 과도한 개발정책 등 현안 문제들에 대해 민족주의가 가진 잠재적 함의와 현실적 작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 사회를 해치는 많은 행위들이 널리 자행되고 있는데, 현실적 민족주의가 존재한다면 이를 억제하는 데 일반적 도덕 기준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친일파보다 더 심한 ‘민족반역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개인, 집단, 계층이 이 사회에 널려 있다. 민족반역죄만 단속해도 현존하는 사회악의 대부분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가 과거의 민족반역죄는 성토하면서 현재의 민족반역죄는 방치하는 까닭이 민족주의의 관념화에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한국 민족주의의 현실화를 위한 인프라작업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KBS의 백선엽 드라마에 대한 항의 사태를 생각해 보자. “친일 했으니까 나쁜 놈”이란 관념적 비판도 없지 않았겠지만, 민족주의를 그리 중요시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 사전을 조금 훑어보면 “친일파라고 다 나쁜 건 아니라도, 이 사람은 좀 너무하잖아?”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 민족주의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다.


한편 이 비판을 받아들이는 쪽 입장을 생각해 보자. “친일파건 뭐건 권력자의 환심만 사면 되지.” 하는 사람들이야 <친일인명사전> 있거나 말거나겠지만, 그래도 양심을 아주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전을 들여다보고 “어이쿠, 이 사람은 좀 심했군.” 반성할 수 있다. 이 사전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도 “에이, 민족주의 타령이 또 나오네.” 귀를 닫아버리기 쉽다. 민족주의의 힘이 확대되는 것이다.


앞서 제4절에서 언급한 위암 장지연의 경우를 보자. 그의 서훈이 몇 달 전 취소된 일을 나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말년의 몇 해 동안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고 사전에 수록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1914~18년의 암담한 시기의 시세를 거부하지 못한 문필활동이 “시일야방성대곡”의 가치를 훼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의 서훈 취소가 마땅하다고 여기는 의견이 꼭 틀린 것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전 수록을 곧 단죄로 보는 시각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유감스러운 것이다.


서훈 취소는 보훈처의 요청으로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확인되면 독립유공자에서는 제외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으며(<뉴시스> 2011. 6. 8), 김황식 총리는 “친일 행적과 별도로 독립운동을 위한 공도 인정되는 만큼 그 부분을 별도로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서훈이 취소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한겨레신문> 2011. 4. 5) 서훈 취소는 <친일인명사전>이나 민족문제연구소에게 아무런 권리도 책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훈 취소에 반대하는 많은 논설은 장지연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을 서훈 취소의 필요충분조건처럼 인식했다. 장지연의 사전 수록 자체가 종래 통념으로는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훈 취소 이후의 언론보도에서 이 문제에 관한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견해가 소개된 것을 보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장지연의 서훈 취소를 민족주의의 승리로 여기며 흐뭇해하고만 있는가? 서훈 취소 결정에 책임이 없으니 관련된 입장을 밝힐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들의 민족주의는 당신들만의 것이다. 그 민족주의가 이 사회를 위해 좋은 역할을 맡아줄 것을 기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지연에 대한 내 의견을 빚어낸 것이 <친일인명사전> 덕분이란 사실이다. 이 사전의 도움 없이는 엇갈리는 두 측면 사이의 의혹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친일의 측면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김황식 말대로 “종합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종합적 판단을 나와 다른 쪽으로 내린 현 정부 국무위원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장지연만이 아니라 식민지시대 ‘친일’의 실제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사전 덕분이다. “항일은 좋은 것, 친일은 나쁜 것”의 관념을 뛰어넘어 인간적 현상과 사회적 현상으로 친일의 현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민족주의 관점을 통해 개인의 도덕적 문제보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민족주의 발전의 열쇠는 힘의 확장이라는 양적 측면보다 현실에의 적응이라는 질적 측면에 있다. 식민지-신식민지 시대에는 질적 성장을 위한 자양분 확보에 한계가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발간을 위한 많은 분들의 노고가 민족주의 발전의 기반을 만들어준 데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8. 덧붙임


위의 원고를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민족문제연구소로 보냈는데 담당자 박수현 님이 곧 메일로 자료 몇 편을 보내줬다. 마지막 절에서 장지연 문제에 관한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견해가 소개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 문제를 보완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 자료들을 보고 원래의 원고를 고칠까 하다가 과문(寡聞)의 허물은 그대로 둔 채 더 떠오르는 생각을 덧붙이기로 한다.


새로 받은 자료 중 장지연 문제를 직접 다룬 것으로 조세열의 “시일야반성대곡”(<한겨레신문> 2011년 4월 30일자)과 이용창의 “위암 장지연의 친일 행적 재론”이 있었다. 두 글 모두 장지연 등의 서훈 취소 후 장지연의 명망에 기대어 서훈 취소를 격렬하게 비판하던 일부 세력에 반박하는 의미에서 입론이 다소 치우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세열의 글에서 “보훈처는 설령 독립운동의 공적이 있더라도 흠결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서훈대상에서 일단 제외 또는 보류하는 신중한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해왔기 때문”에 서훈 취소가 마땅한 일이었다고 한 데 나는 생각을 달리한다. 흠결이 있으면 서훈에서 제외한다는 보훈처의 방침은 앞 절에 인용한 보훈처장 박승춘의 말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바람직한 원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그만 흠결이 있어도 서훈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은 서훈자의 공과를 주체적으로 판단할 국가의 책임을 외면하는 형식적 기준이며, 실제로 보훈처의 서훈 사업에서 편의적으로 적용되어 온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기준보다 훨씬 엄격한 ‘흠결’ 기준이 적용되어 왔고, ‘선 친일 후 항일’의 의미도 고려되지 않았다. 이런 형식적 기준을 채택해 온 사실 자체가 ‘친일’의 의미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있던 이 사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와 있는 2011년 시점에서는 이 편의적 ‘원칙’이 척결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용창의 글에도 반민규명위원회의 조사 범위와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범위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져 있는 것처럼, 국가기관과 민간 연구단체의 활동 범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훈처는 이 사전을 활용해서 서훈 심사 대상자의 공과를 전보다 훨씬 엄밀하게 파악할 수 있으므로 지나치게 형식적인 기준을 벗어날 수 있다.


장지연 같은 인물의 서훈 취소에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측면이 있다. 보훈처와 국무회의가 자기네 결정의 이유를 <친일인명사전>에 미루는 감이 있다. 장지연의 서훈 취소를 아쉬워하는 나 같은 사람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사이의 이간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이 논란이 일어났을 때 <친일인명사전> 관계자 쪽에서 장지연 수록의 타당성은 확인하되 현 정부의 조치와는 거리를 두고 비판할 점은 비판하는 논설이 나오기 바랐다. 조세열과 이용창의 글은 이 점에서 아쉽다.


앞 절에서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장지연의 서훈 취소를 민족주의의 승리로 여기며 흐뭇해하고만 있는가?” 물었다. 나는 그런 이들과는 민족주의의 대열에 함께 서고 싶지 않다. 상식 차원에서 소통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어 민족주의가 이 사회 안에서 고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장지연의 서훈 취소를 아쉬워하는 까닭을 설명하겠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문제가 되는 시기의 성격을 생각하는 것이다. 제4절에서 장지연 얘기를 하며 “뜻을 가진 사람도 길을 찾기 힘든 시절”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절 중에도 1910~1918년의 기간이 특히 캄캄한 시절, 아무리 눈 밝은 사람도 발길을 제대로 딛기 어려운 때였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막연하게나마 ‘대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껏 대한제국의 복벽이나 생각하던 시절에 “그 형편없는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민족 지배를 당분간 겪으면서라도 미래를 향한 확실한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나라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뒤늦은 친일 청산 작업을 수행해 나가면서 언젠가 또 청산 작업에 나서야 할 ‘친미행위’가 쌓여가고 있는 현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1945년 이후 이 땅에서 펼쳐져 온 친미행위 중에는 악질 친일파 못지않게 범죄적인 것들이 있다. 일체의 친미행위 자체를 근절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친미행위의 범죄화를 최대한 억제하는 데는 친일행위의 비판에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 놀릴 데가 없다(刑罰不中 民無所操手足)”는 공자 말씀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