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는 같은 해에 나온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전근대=악', '서구=근대=선'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거부한다.

조선이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저력과 패망의 원인을 아울러 살펴보고자 지은이는, 조선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로 ①중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국제 관계)와 ②유가 정치 원리에 입각한 왕조 정치(국내 정치)를 꼽는다. 한반도에 생겨난 왕조는 중국이 무탈했을 때 안전과 번영을 보장 받았다는 게 ①의 논리로, 당나라가 망하자 통일 신라가 따라 망했고, 원나라가 쇠하자 고려가 쇠했으며, 조선은 청나라가 힘을 잃으면서 일본의 먹이가 됐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딱히 지은이의 것만이 아니라, 언제인가부터 조선의 장기 지속 비결을 해명하는 우리 학계의 익숙한 설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은이가 이 책에서 전력을 쏟은 대목은 ②의 논리다. 이 논리는 높은 수준의 안정과 번영을 누렸던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을, 왕과 군신이 맡은 바 자리에서 서로를 공경하고 책임을 나누어 가졌던 군신공치(君臣公治)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 논리는 서양의 군주가 '봉건적(feudal)'이었던 것과 달리, 유독 동양의 군주는 '전제적(despotic)'이었다는 오리엔탈 데스포티즘(Oriental Despotism : 동양적 전제주의)에 찌든 한국인에게는 쉬이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오항녕은 그의 책 어디에서, 오리엔탈 데스포티즘에 인이 박힌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힐문한다.

(한국인들에게) '전제 왕권' 하면 머리에 무엇이 연상되는가. 루이 14세인가? 태종인가? 단연코 후자일 것이다. (…) 이러한 사고 구조는 현재 우리의 의식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틀고 있다. 일일이 예를 들기가 버거울 정도로 우리는 우리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전제 왕권'이라고 쓰지 않으면 무슨 큰 죄나 짓는 듯이 한결같이 '전제 왕권'이라 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말 그대로 한 사람만이 마음대로 했고, 나머지는 죽은 듯이 살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말 그랬나? (…) '전제적'이라는 관념을 거쳐 (조선) 역사로 들어가는 한, 우리의 역사 이해는 이미 그 현실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 책의 지은이 역시, 우리들 뇌리에 박힌 오리엔탈 데스포티즘을 교정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

'전제 군주제'라 하여 왕이 멋대로 하던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이 많은데, 유교 국가의 실상과 다른 상상이다. (…) 신민이 임금을 공경하는 것은 일방적 예속이 아니었다. 임금도 신하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켜야 했고, 그 존중을 상징적으로 받는 것이 대신이었다. 판서급 이상의 대신이 신상에 관한 일은 절차를 엄격하게 지켜서 처리하는 데 군신 관계 균형의 원리가 있었다. '전제 정치'도 아무 균형 없는 일방적 지배는 아니었다. 균형 없는 정치에는 지속 가능성이 없다.

▲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김기협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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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공화정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동아시아 왕조의 군주가 일방적인 통치권을 가졌던 것처럼 잘못 알고 있지만, 유가적 정치 원리에는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여러 형태의 균형과 견제가 작동했다. 왕은 당론을 조율하는 심판자가 될 만큼만 힘을 가지고 있으면 됐고, '도덕적 엘리트'였던 신하들은 공익을 위해 존재했지 자신의 파당을 위해 사사롭게 처신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었던 조선 왕조의 군신공치는 임진왜란(1592~1598년), 광해군 축출(1623년), 두 차례의 호란(1627, 1636년), 두 차례의 예송 논쟁(1659, 1674년)을 거치며 무너졌다. 거듭되는 난과 사화 속에서 왕권 실추와 사림의 사익 집단화가 가속되었던 것이다. 지은이의 진단에 따르면 '조선의 망국'은 군신의 의리가 무너지고 왕권 실추에 따른 반대급부로서의 왕권의 전제화 그리고 사림의 사익 추구가 동시에 일어난 탓이다.

인용하자면 "조선 후기의 정치의 퇴행은 권력의 사유화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대한제국의 1인 전제 체제는 이 권력의 사유화가 극한에 이른 현상"으로, 군신 사이의 균형과 견제가 사라진 자리에서 왕은 자신의 권력을 사유화하기에 급급했고, 그 퇴행을 비집고 '1인 전제 체제' 주위로 부도덕한 외척과 출세 지향적인 관료들이 꾀어들었다.

갑오개혁과 아관파천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통파 관료의 비중이 계속 떨어져갔다. '개화 관료'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외국어나 기술을 갖고 채용된 사람들, 그리고 왕에게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 세력의 비중이 커졌다. 왕 자신이 전통적 덕목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고, 전통적 덕목을 대치할 근대적 덕목이 갖춰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긴장이 줄어드는 '도덕적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앞서 본 진단에 따른다면, 대한제국이 부흥할 수 있는 방법은 ①군신공치의 회복 ②정치 담당 층(사대부)의 도덕성 회복이다. 그런데 이런 처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먼저, 지은이가 주장하는 바의 유가적 정치 이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왕권 확립'이 우선해야 한다. 물론 지은이가 뜻하는 동아시아적 왕권 확립이 유럽 정치사에서 운위되는 '절대 군주'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당론의 심판자가 될 수 있으려면 지은이가 뜻하는 왕권 확립은 '강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약화'된 왕권, 다시 말해 상징적인 왕권의 효과도 가까이서 목격한 바가 있다.

상징적인 왕권이라면 곧바로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기치로 표상되는 유럽의 입헌군주제를 떠올릴 테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천황제다. 천황제는 왕권의 강화가 아니라, 왕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 '쇼윈도 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왕이 필요한 이유는 조선 왕조 500년의 전통과 근대의 습합이 필요해서거나, 나라에는 왕이 필요하다는 당대 조선인들의 평균적 인식에 맞추고자 해서가 아니다. '국민'을 만들기 위해서다.

아주 흥미롭게도 당시의 조선인들은 왕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대한제국이 망하고 나서 아무도 복벽 운동을 하는 백성은 없었다. 반세기를 지탱한 왕조가 무너졌는데도 한 줌의 지방 양반(위정척사파)을 빼고는, 아무도 왕정 복고 운동을 하지 않았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모순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백성들은 궁궐에 있는 왕, 사대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왕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국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흔히 천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예술 작품'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천황제를 만들기 위해 유럽의 입헌군주제와 왕실 의례를 연구했다. 그런 끝에 구중궁궐에 있던 천황(일왕)을 순행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내어 전국을 순시하게 했다. 백성들에게 용안과 옥체를 내보인 것이다.

천황이 저잣거리의 무지렁이들에게 용안과 옥체를 보여주는 것은, 분명코 위신의 하락이다. 하지만 감히 천황의 용안과 옥체를 본 무지렁이들에게는 '나도 국민'이라는 자긍심과 정체성이 생긴다. 천황의 순행은 백성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일이었다. 메이지의 설계자들은 또 천황 부부를 마차에 나란히 앉혀 도쿄 시가지를 행진하게 했고, 떠들썩하게 은혼식을 올리기도 했는데, 이런 볼거리는 남녀평등과 일부일처를 국민에게 계몽하기 위해 기획된 '쇼'였다.

메이지의 설계자들이 천황제를 쉽게 날조할 수 있었던 것은, 지은이도 말한 것처럼 "외세의 과도한 작용이 없었던"데다가, 애초부터 "천황의 권위와 막부의 권력"이 분리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이와 달리 조선은 반세기 동안 유지된 왕조의 관성이 너무 막대했다. "아무리 군주가 무능하고 조정이 부패했더라도 군주와 조정을 통하지 않는 개혁 시도는 최악의 범죄, '대역(大逆)이었다. 공화제도 입헌제도 긴 세월을 통해 농업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준 문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군신공치와 사대부 계층만으로 이루어지는 좁은 정치 담당층만으로는 밀려오는 외세(근대)를 막을 수 없었다.

근대로 무장한 외세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 왕실은, 조선을 자기 나라로 실감 할 수 있는 국민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1899년에 반포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9개조가 보여주었듯이, 아둔한 그는 주군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만 챙겼지, 어떤 식으로든 국민을 정치적 주체로 불러 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토가 고종에게 을사조약 체결을 겁박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고종이 "짐은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짐의 정부 신료들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들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는 핑계를 대자, 이토는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한다고 하는, 소위 군주 전제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라고 추측됩니다" 하고 면박 주었다. 이를테면 조선은 전제 정치를 하는데 어찌하여 입헌 정치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묻느냐는 것이었다.

쇠락해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정치 담당 층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성호 이익이 쓴 "농사꾼 중에 인재를 발탁하자"에 나와 있다. 이 책의 지은이가 조선의 정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간주했던 숙종 대에 살았던 이익은 그 글에서 "공경(公卿)들에게 미천한 사람들의 농사일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가려 높여서 등용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숙종 대 보다 후대인 영·정조 시대부터 중인 계층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므로 두 왕이 전력해야만 했던 진정한 정치 개혁은 탕평책보다, 정치 계층을 사림이나 사대부만의 것이 아니라 중인 계층에게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었다. 왕이 직접 백성을 정치 주체로 끌어오는 것은, 사대부 층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고, 십중팔구는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조선 후기의 활로는 정치를 '사대부만의 리그'로 놓아두는 게 아니라, 정치의 진입 장벽을 낮추어 정치 참여 층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자신을 허수아비(상징)로 삼아도 좋다는 왕이나 정치 담당 층을 아래로 넓히자는 데에 동의할 사대부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던 데다가, 조선에는 이토와 같은 식견 있는 '그랜드 디자이너'가 없었다. 다시 말해 조선의 비극은, 군신공치의 해체나 정치 담당 층의 도덕적 해이에 있지 않다는 얘기. 나아가 지은이의 논의에는 근대 민족 국가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국민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다는 얘기.

사족 삼아, 지은이가 안중근의 이토 암살과 관련해서 쓴 대목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아래가 문제의 대목이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자신을 저격한 것이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도다" 말했다는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가야로 설(說)'로 알려진 이토의 유언이 일본 측의 조작이라는 것은, 이미 연구자들을 통해 밝혀졌다. 아마 지은이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설을 사실인듯 언급하는 것은, 지은이가 '이토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그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토의 죽음이 일본의 강경파를 자극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일본 측의 논리를 수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인용한다.

이토는 가급적이면 덜 강압적인 방법을 찾아내려고 여러 단계에서 노력했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능한 한 온건한 방법을 취하는 쪽이 장기적 효과가 좋다고 믿었다.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원했다.

우선, 안중근은 이토를 암살한다고 해서 일제와 조선 사이의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부품(이토) 하나를 고장 낸다고, 제국이 자신의 결정(정한론)을 뒤집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동양 평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극한 처방을 썼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토가 살아 있다고 해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으리란 것도 알아야 한다. 안중근만 아니라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토는 국가의 부품일 뿐이었다. 실제로 한일 병합 과정을 세세하게 추적한 운노 후쿠주의 <일본의 양심이 본 한국 병합>(연정은 옮김, 새길 펴냄)에는 이토의 죽음이 한일 병합을 더욱 서두르게 했다거나, 그 때문에 일본의 여론이 보호국화에서 병합으로 바뀌었다는 식의 설명이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이 책의 원래 제목은 그냥 <한국 병합>이다). 다시 말해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하지 않았더라도 역사는 변함없이 한일 합병으로 치달아 갔을 것이라는 것.

이렇게 단언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이 엮은 <질문하는 한국사>(서해문집 펴냄)에 실린 현광호의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나"에 이토의 진면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글에 따르면, 이토는 청일 전쟁 때 수상으로서 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했고, 1898년 초 러일 협상 때는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만주와 한국을 지배한다는 '만한 교환론'을 꺼냈다. 그가 동양 평화론을 주장한 것은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조선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고종을 협박해서 얻어낸 을사조약은 그의 동양 평화론이 말짱 거짓말이라는 것을 폭로했다.

겉으로는 한국 합병보다는 한국 자치를 선호한 온건파로 알려졌지만, 이토의 실제는 점진적인 한국 합병을 목표로 삼은 인물이다. 그가 통감으로 있을 때,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던 조선 식민지화 과업을 보면, 입이 열 개라도 '이토는 온건파'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가 하얼빈을 방문한 것도 한국 합병에 관한 러시아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라지 않는가.

일본 언론이 퍼뜨린 이토의 바가야로 설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조선이 보호국으로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한국인들이 꽤 있다. 보호국이란 외교·군사의 기능을 후견국에 일임한 채 여타의 나라로부터 안전 보장을 받는 나라를 일컫는다. 보호국은 독립국처럼 보이지만 외교권이 빼앗겼기 때문에 국제법상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 소비에트 시절의 동구 공산 국가를 떠올린다면, 외교·군사는 기본 사양일 뿐, 내정마저 간섭 당해야 하는 보호국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보호국 내지 자치를 차선책으로 여기는 대한제국기의 인사들이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실력을 양성하고, 다른 편으로는 국제 정세를 살피면서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는 길을 모색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준비론과 정세론을 합한 저런 방법으로 일제의 지배 정책을 벗어나 독립국이 되는 길은 요원하다.

먼저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한판의 제국주의 전쟁을 목전에 둔 시대로, 그런 상황에서 조선이 쓸 수 있는 패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곧 만주 사변이고 중일 전쟁이었고 태평양 전쟁이던 와중에 조선에게만 자신의 실력을 쌓을 수 있는 느긋한 시간이 주어질 턱이 없고, 일제 역시 조선이 자신과 똑같은 수준의 근대화를 이루도록 돕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는 철도나 항만 시설과 같은 군사와 수탈을 위한 개발만 허락할 것이다.

재앙은 금세 닥친다. 보호국인 조선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동맹군이 되어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당사국이 될 것이다.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면, 오늘날 우리가 친일 부역자로 손가락질하는 이광수·최남선 같은 민족 지도자들은 36년간 식민지로 있었던 그 시절보다 더 큰 목소리로 미국과 일전을 벌이자고 선동할 게 뻔하다. 그들의 이력을 보면, 친일파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백화(白禍)'에 대한 우려와 공포가 상당했다. 하므로 그들은 일제가 강요하지 않아도 미국과의 한판 전쟁을 '근대의 초극'이라며 반길 게 뻔하다.

불길한 예측이지만, 신채호만 홀로 그 대열에서 낙오할 것 같지도 않다. 만약 사태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실제의 역사처럼 36년 동안 식민지로 신음하는 게 훨씬 낫다. 까닭은 조선이 동맹국이 되어 일제에 힘을 보태더라도 전쟁은 핵폭탄을 가진 미국의 승리로 끝날 승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핵폭탄을 맞는 나라와 도시는 어디일까?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희생양이 됐지만, 지은이의 희망대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또 동맹국으로 일제와 함께 미국과 싸웠다면, 핵폭탄은 경성(혹은 인천)과 부산(혹은 대구)에 떨어졌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미국은 관동군의 배후를 끊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한반도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것인데,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일본과 미국이 조선과 필리핀을 먹기 위한 농간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었듯이 농간을 당해야 할 나라는 이번에도 조선이기 십상이며, 그 둘은 19세기 중반부터 서구를 열광시킨 자포니즘(Japonism)의 위력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일본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던 이유는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 탓이 크지만, '일본 열광'의 저변이 만들어 놓은 숱한 미국인 지일(친일) 인사들의 막후 공작도 한 몫 했다. 반면 그 사이에 조선이 거기에 대응하는 지한 인사들을 얼마만큼 만들 수 있었겠는가? 핵폭탄 두 개가 너무 많다면, 공평하게 나누더라도 최소한 일본과 조선에 하나씩이다. 이 재앙에 비하면, 패전 후에 한국인을 따라다닐 전범국가와 패전국이라는 딱지는 그냥 덤이다.

이 독후감의 첫머리에, 지은이가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 비결로 ①중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와 ②유가 정치 원리에 입각한 왕조 정치를 꼽았다고 썼다. 거기서는 누락 시켰지만, 지은이는 ③물질과 경쟁을 순화하는 동아시아 문명을 추가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 문명은 사민(四民 : 사농공상) 가운데 장사치(商)를 맨 아래에 놓았는데, 이는 칼(武)과 함께 물질과 경쟁을 폭력적인 가치로 여기고 경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국강병이라는 개화의 관념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서구의 근대는 물질과 경쟁을 도덕이나 자족의 가치보다 우위에 놓는 문명이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 가운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은 망했어야 했다, 임진왜란 직후에도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게 비극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고작 조선인들에게 '화승총'을 선보였을 뿐으로, 화승총 따위가 곧바로 문명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조선은 자신의 문명을 지킬 저력이 있었다. 하지만 200년 뒤에 조선을 집어 삼키러 온 일제는, 조선이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초유의 문명이었다. 문명의 전환기에 일어난 이 절대적인 비대칭성은 불가피하게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하게 만들었다.

①·②·③이 가장 열악하게 복합 작용을 하기 시작했을 때, 조선은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위에 집을 지은 대한민국은 비로소 ①·②·③의 해결책을 찾았는가? 지은이의 맺음말은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라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 보게 한다.

ⓒ프레시안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