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2009년 11월 27일

그날의 정경은 모든 것이 선연하다. 큰 대야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배추 11포기, 초절이가 잘돼서 무척이나 흐뭇했었는데... 진한 김치양념향이 온 방에 매콤하게 감돌 그 시간을 앞에 두고 핸드폰벨이 울려서 해살이 가득한 남쪽 창가로 다가갔었는데...
“그 눔, 안 좋은가봐.”
우광훈씨답지 않은 우울한 목소리...
“누구?”
담배를 피우는지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들려오는 그 낯익은 이름... 우선생에게도 나에게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친구...
그냥 “안 좋은가봐”라는 그 말에 나는 벌써 속이 철렁했었다.
“나더러 리선생을 일러가지고 얼른 오라고 하던데...”
그리하여 나는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렸다. 오후 2시 45분... 그 얼굴이 왜 벌써 낯설어지려고 하는지. 봄볕에 그을은듯이 늘 검붉은 색이었던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빛만 남은 얼굴, 벌써 병색이 보였다...
며칠전, 장춘으로 회의하러 떠난다고 하면서, 박영재교수님과 함께 만났을 때 식사를 아주 조금 하면서 감기기가 있다고 하더니, 감기기의 정체가 이것이었단말인가? 다른 때에는 기름이 아까워 어찌 실어다주겠느냐, 그렇게 롱담을 하면서 아득바득 차에 탔던 나지만 이날만은 어서 집으로 곧게 가라고 사양했었는데, 그런데도 기어코 집까지 실어다주며 “요즘 정말 다리가 떨린다는 말 실감했습니다. 진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이 나이가 되면 가끔 보약을 먹어야 한답디다. 저도 가끔은 먹는데 몸에 맞는 보약 좀 들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라는 엉터리제안을 했었는데...
정말로 그답지 않게 환자복차림으로 입원실에 앉아서 자신도 다소 당혹했던지 집식구들이 들을까봐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나는 마음을 비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래서 진설홍씨가 선배답게 버럭 화를 내며, 왜 그런 소리 하냐, 상해로 가서 잘 검사하고 퍼뜩 털고일어날 궁리는 안하고, 라고 꾸짖었던 그날... 그래도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내가 병원에서 오진받았던 일들을 1차, 2차, 3차까지 털어놓으며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려고, 자신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려고, 그리고 실제로 암이 아니고 그냥 오진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던 그날...
그래도 곧 그답게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은
“암이라니까 얼마나 시름놓았는지 모릅니다. 암은 그래도 정리할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간괴사라고 하니까 정말 당혹했습니다, 금방 죽어버릴테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제는 내가 누구에게 빚진거 없느냐,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부랴부랴 적었는데, 참 다행입니다. 암은 적어도 몇달은 시간이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을 더 하랴.
가장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불러준 친구건만 아무런 힘도 돼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연신교를 지나고 부유병원을 지날 때 절친한 친구 박향숙씨가 생전에 늘 앉아있곤 했던 록원호텔 창문을 올리다보며 불쑥 떠오르는 말은...
“향숙아, 네가 막아줘! 유연산씨를 네가 막아줘...”
언니를 잃었고 친구 향숙이도 잃었던 그 병은 인간의 한계였다. 그리하여 이승의 그 한계를 그곳에 가있는 친구만이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가? 친구 향숙이를 잃은 세월이 10년인데 이제 또 한 절친한 친구가 생사의 길에 오락가락하고있다니. 집으로 가는 동안 내 얼굴에 내내 눈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향숙아, 막아줘, 그곳 못가게 네가 좀 막아줘...
그리고 그 날 밤, 늦은 시간에 김치를 하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김치를 해야 했다... 남편과 함께 새벽 두시가 되도록 연산씨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흐르는 눈물은... 남편이 내 손을 잡아주며 당신 한쪽 팔이 떨어진듯한 느낌이 들거라고 했을 때...이 이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리해하는 사람이란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나의 인생에 우정은, 그리고 친구 유연산씨는 그렇게 소중한것인데...
그날이 2009년 11월 27일이었다.
그날 유선생은 나에게 상해행 비행기표를 부탁하며 이런 멜을 보내왔다.

감사합니다. 친구들 얼굴 보고 가니 시름이 놓입니다. 늘 건강 하십시오. 건강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저의 교훈입니다.

그날 나는 유선생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다.

꼭 건강을 되찾고 오리라고 믿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친구들 앓는 사람은 벌금, 벌금시킨다고 오늘 우선생과 진형이랑 같이 토론했습니다. 오늘 우선생이 닝거를 맞았길래 벌금하기로 했는데 벌금령이 내리기 전이라고 진형이 샀네요. 해장국집에서 한잔 했지요. 이제부터 우리 친구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건강입니다. 꼭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벌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날, 유선생의 암소식은 우리에게 강타를 안겼다. 병원문을 나서며 우리는 뜬금없이 해장국을 먹으면서 한숨만 쉬었다. 될것이다, 라고 서로에게 강사기를 돋구며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날 그에게서 온 답장은 이러했다.

감사합니다.
벌금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저한테 몇몇 친구가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밖으로는 림영만, 이여천, 연길에는 우리 몇 사람- 일생을 살면서 친구가 없는 사람도 많은데--- 복을 받았습니다.
한가지 부탁 드립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탁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두가지 부탁을 해왔다. 하나는 그가 한 한국인교수님을 위해 연길시 몇몇 소학교 교장님들과 면담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킬수 없어져서 나더러 그 약속을 지켜달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가 조선족사회의 정신적인 기반을 이루는 정판룡선생님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기획해서 진행에 들어갔는데 경비가 부족해 도움을 받기로 한 한 후원인을 만나서 경비관계를 락실하도록 독촉해달라는것이었다. 그는 이 두가지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답장에서 부탁대로 꼭 하겠다고 다짐하고나서 이렇게 썼다.

돌아와서 씩씩하게 일을 할수 있도록 이번에는 진짜로 신경을 잘 써서 건강상태를 모두 원상태로 돌려놓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주 그냥 콱 벌금을 안길테니깐요!!!(협박입니다!)

그는 아주 공손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꼭 건강을 찾아서 돌아올게요. 그래도 벌금은 벌금대로 하겠습니다.
안녕히.

그리고 29일날, 장춘에서 유연산씨를 보러 친구가 와서 친구 몇 명이 함께 연산씨 집으로 갔을 때 그 얼굴의 병색은 벌써 더 짙어졌다. 검은빛에 노란빛가지 섞여있었다.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란 이렇게 하루사이에 건강한 세포마저 좀먹어갔다.
나는 이런 멜을 보냈다.

여천씨는 함께 식사하고 역전까지 배웅을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여천씨가 연길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김총장님께서 차집으로 직접 오셔서 함께 차를 나누었습니다. 광천수를 마셨지요. 선생께서 '연변대학산책'을 잘 썼다고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수술을 잘 하면 황달이 금방 벗겨지고 괜찮을것 같다고, 그렇지만 당분간 쉬어야 할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부탁하신대로 하겠고요 상해서 돌아오시면 친구들에게 벌금을 크게 내시기 바랍니다. 낼 공항에서 만납시다. 편히 잘 쉬시고요 꼭 힘내시기를 잘 부탁드릴께요~~ 힘 안내면 정말 친구답지 않고 나쁜 사람이지요~~

사실 이 편지에는 거짓말이 좀 들어가있었다. 유선생님의 은사이고 그가 근무하는 대학교 총장이신 김병민선생님은 그의 예후가 안 좋을것 같다고 많이 슬퍼하셨다. 이미 연변병원의 가장 유명한 교수님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유연산씨에게는 가능하면 친구들이 그의 안 좋은 예후까지 걱정하고있는 분위기를 보이고싶지 않았다. 가벼운 분위기로 그를 격려하고싶었다.
병은 친구사이를 이렇게 갈라놓고있었다. 우리는 격려로, 그는 괜찮다, 라는 식으로 우리는 친구라는 이유로 친구에서 서로 멀어지고있었다.
그의 답장은 진지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일생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저의 병은 하나님께서 저한테 다른 작가가 경험하지 못하는 시련을 겪게 한 겁니다. 남들이 쓰지 못하는 글감을 제공한 거지요. 월요일부터 병중수기 쓰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기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의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말이 벌써 몇 번째 나타나고있다. 갑자기 꼬박꼬박 이 말을 쓰고있다. 눈에 거슬렸다. 정말 슬펐다. 이 말은 예의상 늘 하는 말이지만 이 때로부터는 정말로 다시 듣고싶지 않은 말이 되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장춘행 기차에 앉은 여천씨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전화를 하면 그뿐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을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단번에 말하고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그리고 말로서 다 할수 없는 우리의 심정을 우리는 그렇게 묵묵이 주고받았다. 그리고 우광훈씨와 밤 늦은 시간에 긴 전화를 주고받았다. 모든 일에서 속이 깊고 침착한 그에게서 밤중에 소스라쳐 깨어서는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두려움이 솟구치고있었다. 친구의 병을 돌려세울수 있는 방법에 대해 우리는 모두 자신을 잃고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견딜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곧 상해로 떠날 류선생에게 멜을 보냈다.

어제 여천씨랑 얘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선생을 대처할만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는 많지만 우리의 분야에서 선생만큼 인생의 지기로서 문학의 지기로서 언제나 상의를 드릴만한 친구가 말이지요. 수많은 일들을 의논해왔고 앞으로도 의논해야 할 친구로서 어려운 인생길에 위안을 받을수 있고 같이 기뻐할수 있는 친구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선생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반드시 함께 해야 할 친구이지요. 너무 과찬했나요?^^ 이것도 병중수기에 써넣을만한 내용이군요. 언제나 선생을 지켜보며 응원해드릴께요~~ 그러니까 상해에서도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개선장군이 돼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화이팅!!!
추: '병중수기'에 너무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쉬어야 몸의 각 분야에서 서서히 조절하고 면력력이 살아날수 있습니다.

그리고 30일, 상해로 수술하러 떠날 때 공항에서 본 그의 얼굴은 붉은색도 검은색도 없는 노란색이었다! 황달이 피어 완전한 누런색이었다! 사람을 어찌 하루밤 사이에 이렇게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억울하고 분했다. 그의 몸도 한꺼풀, 아니 두거풀 엷어졌다. 그는 며칠 사이에 벌써 8키로나 빠졌다. 조용히 떠난다고 했지만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사람들로 공항홀은 꽉 찼다. 한사람씩 악수를 나누는데만 많은 시간이 들다보니 우리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작별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저 공항에 보이고있는데...
그 뒤 12월 6일 나는 유선생에게 이런 멜을 보냈다.

류선생님: 이곳은 어제 눈이 쏟아지더니 오늘은 무척이나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우리 집 주변은 트럭 열대가 동시에 움직이는듯한 소리가 나더군요. 완전히 바람교향악입니다. 이총장님과 량처장님께서 선생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을 때 선생께서 하하하 큰 소리로 웃으셔서
저도 참 기뻤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잘 싸우고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반드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더군요. 요즘은 우선생과 여천씨랑 선생 때문에 통화를 많이 했답니다. 우리들의 우정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더군요.
방관자청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 여나아빠가 그런 말을 해요. 유선생은 친구들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라고, 당신 말은 잘 안들어도 선생 말은 잘 듣는다고, 그런 정신적인 친구, 문학, 역사의 친구로서 선생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데 꼭 다시 일어나 건강을 회복할거라고 나를 위안하는군요. 우리 부부사이에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요즘은 늘 하고 있습니다. 선생 및 사모님과 통화한 내용을 전달하고 같이 토론하고요 선생이 아팠다는 소식을 접한 날에는 새벽 두시까지, 물론 김치를 했지요, 그날 그렇게 아주 많은 시간을 선생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는것도 놀랍더군요. 그만큼 선생이 우리 친구들에게, 저에게 중요하다는걸 우리 여나아빠도 알고있지요.
중국에서 최고의 병원에서 최고의 의사가 수술을 책임진다는 소식에 무척 고무를 느꼈습니다. 꼭 수술이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미안한건 그 힘든 시간에 곁에서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낼 7시 40분 비행기로 북경으로 갑니다. (오래전에 왕복 항공권을 구입했었지요.) 10일에 미국에 가고요, 금방 우선생과 의논이 있었지요. 제가 없는동안 우선생도 혹시 한국으로 가는지 걱정돼서요. 마침 몇사람의 비자가 통과되지 않아 12월에는 못간다는군요. 그 일이 왜 그렇게 고마운지... 우선생이 시름놓으라고 하면서 선생이 상해서 돌아오는 날 자기랑, 친구들이 꼭 공항에 나간다고 합니다.
친구로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함께 있습니다. 꼭 잘 싸우는 영웅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까 저도 두 손을 모아쥐고 선생의 수술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낼 수술이 끝나는 시간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꼭 수술이 잘되리라 굳게 믿습니다!

북경에 도착했는데 상해로부터 유선생의 부인 박희옥씨가 격동해하며 “수술이 참 잘됐습니다!”라고 전화해왔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던가! 하느님이 친구를 다시 돌려줄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우리는 그의 귀향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번 미국행은 참으로 잊을수 없다. 처음 떠나는 미국행이라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무척 기뻤었는데 이렇게 친구가 아픈 소식을 알고 떠나니 발길이 무겁고 심경이 복잡했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헐리우드, 라스베가스... 미국의 화려한 풍경사이로 늘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히려 더 눈을 크게 뜨고 더 많이 둘러보았다. 그것은 묘한 느낌이었다.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보고... 내 인생관에 변화가 오고있었다. 생명은 분투해야 하는것이지만 또한 둘러보는것이고 향수하는것이다. 나의 작업시간표를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몸이 견딜수 있는 정도로 하향조정을 했다.
하지만 상해에서 돌아온 친구가 나를 포함한 모든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는 시간표조정뿐이 아니라는것을 알았다. 정작 조절해야 하는 것으로 더 중요한것이 있었다.

이번의 나의 수술이 잘된것은 나를 사랑하고 관심하고 배려하는 모든 분들의 정성의 덕입니다. 나는 수많은 분들이 나를 이처럼 아껴주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넘칩니다.
수술을 하고 개복하면서 나는 모든 것이 경이로움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나의 삶은 모든 이들의 사랑으로 얻은 것임을 실감하였습니다. 덤으로 얻은 여생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했습니다. 저의 옹졸한 처사로 혹시 불쾌한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었더라면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류연산씨는 아픔으로 우리에게 충고했다. 세상은 사랑으로 넘치며 절대로 옹졸한 처사로 남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는것이다. 시간표를 조절할뿐더라 사랑의 마음으로 인생을 조절해야하겠다는 메시지를 나는 마음에 기억했다.

그날, 2008년 4월 30일
류선생이 아프기 전이다. 아프기 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갈수만 있다면...
이날 오후의 날씨는 포근했다. 우광훈씨와 류연산씨,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답사를 떠났다. 그것이 우리 세친구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우리 셋은 누구도 류선생이 앞으로 겪게 될 시한부의 삶에 대해 예감하지 못하고있었다. 우리는 하냥 즐겁게 친구하면서 먼 앞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대 지팡이를 짚고 모아산 솔나무 아래에서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려니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여행은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다.
문단이란 하나의 사회이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정작 문학작품이 아니라 친구였다. 문학작품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것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란 인생에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부분이다. 진정한 생의 내용에 반드시 있어야 한는것이기 때문이다. 류선생과 친구로 지내는 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금으로 바꿀수 없는 많은것을 얻었다.
류선생이 사망한 날,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친구란, 우정이란 어떤 느낌입니까?”
울다가 멍해진 나에게로 한 질문, 잠간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종래로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으므로...
“난 정말 슬픕니다. 그런것을 느껴보지 못해서요.”
그가 조그마한 소리로 대답했을 때, 아, 그제야 나는 얼마나 많은것을 소유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많은 세월을 우리는 각자 너무 바빴으므로 함께 려행같은건 꿈도 꾸지 못했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많은 나날이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류선생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부터 어느날 나는 문뜩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발해왕터에서 태어났고 발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대형 다큐멘터리에 기록했다. 그중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수 있도록 쓴 장편대하 력사다큐멘터리 <<혈연의 강>> 3부곡은 국내외에 광범위한 독자를 둘만큼 우리 민족의 력사 교과서로 되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늘 하얀 실 우를 따라 걷고있었는데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웬 녀인이 가고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실이 끊기면 꿈에서 깨곤 했지요. 지금은 그 꿈을 꾸지 않지만 그 때는 참 이상했습니다.”
나는 워낙 꿈이라는 이 기이한 현상에 예민했으므로 그 이야기가 아주 신기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발해의 땅을 생각했다. 그는 나의 인터뷰요청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고 연변대학 골목에 있는 “책숲의 향기” 책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피체됐던 일, 문화대혁명기간에 할아버지의 한문시들을 기름종이에 싸서 할아버지의 무덤에 묻었던 일, 발해무덤속에서 소꿉놀이를 놀았던 일 등을 이야기해주었다.
류선생에 대한 글 “어떤 사람이 있다”에 쓴적이 있지만 류선생은 어려서부터 발해문물을 가지고 놀며 자랐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가 집에 가져온 도자기조각, 패물따위를 귀신물건이라고 던졌고 류선생은 그것을 감추며 늘 실랭이를 벌였다고 한다. 어려서 그는 말이 늦었고 걸음도 늦었고 눈도 잘 보지 못하는 이상한 병을 앓았다. 그래서 무당할머니를 양어머니로 모셨는데 무당할머니는 칠성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우리의 민속으로 말하자면 그를 칠성에게 팔아 수명장수를 보장받은것이다. 그 때로부터 그의 어머니는 사망되는 날까지도 매일 밤 정한수 한그릇을 떠놓고 막내아들 류연산씨를 위해 칠성기도를 올렸다. 한번은 뾰족산에까지 오르셔서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류선생이 앓을 때마다 무당할머니가 <<약손>>으로 치료해주었는데 그 때마다 병은 깜쪽같이 낫곤 했다. 무당할머니의 착하고 바른 심성이 그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그날 그는 무당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항상 덕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덕을 많이 쌓으면 자기가 행복해집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그는 자기가 하늘처럼 믿던 무당할머니가 반란파들에게 투쟁을 맞으며 구타를 당하던 정경을 보고 병이 재발해 오래동안 앓았다. 무당할머니가 끝내 반란파들의 몽둥이 찜에 죽고 집이 불에 타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던 정경>>이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의 꿈속에 나타났던 “하얀 녀인”이 그 무당할머니, 그의 양어머니와 우리 민속에 있던 양심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나의 머리에는 발해땅에서 자란 한 남자아이와 무당할머니의 이야기가 서서히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고향 발해땅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와 우광훈선생에게 같이 답사해줄것을 청들었다. 금방 연변대학에 전근되여 늘 바쁘기만 했던 그였지만 금방 시간을 맞춰주었다. 우리는 오후 2시경에 캔커피 3개에 물 세병을 가지고 그의 고향으로 떠났다.
차에 앉아 발해성터로 향하는 우리 셋의 여행은 즐거웠다. 가볍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차창가로 봄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이 코스로는 차례로 우리 모두의 청춘을 보냈던 나의 집체호, 류선생의 고향, 그리고 우선생의 집체호를 답사할수 있었으니 참으로 즐거운 려행이었다.
유선생의 고향 북대촌에 이르자 유선생은 해설에 바빠졌다. 봉밀하, 해란강, 룡두산, 발해무덤터, 깃대봉...
“저 깃대봉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습니다.”
라고 가르쳐보이는 깃대봉에 늦은 오후의 해가 눈부시게 빛났었는데...
우리는 그가 어려서 헤엄을 치며 놀았던 봉밀하에 손을 씻었다. 그는 우리에게 그가 살았던 집을 손짓해보였다. 벼짚이영아래 해빛이 가득 고여있는 그 마당을 보며 나는 발해문물을 가지고 노는 대여섯살의 한 남자애를 떠올렸다...
자작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농가의 창고들에는 노란 금색이 눈부신 마른 옥수수가 가득 담겨있었다. 푸른색 펌프가 서있는 마당에서는 여러 가지 이쁜 털을 가진 닭들이 병아리를 한마당 거느리고 한가히 볕쪼임을 했다. 그날 우리 셋은 모처럼 포스에 신경을 쓰며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었는데...
가중 중요한 코스는 정혜공주묘였다. 앞에 강이 흘러 차를 세웠다. 셋은 신과 양말을 벗고 짜릿하게 차가운 봄강물에 발을 적시며 건넜었는데...그것이 얼마나 즐거웠던가... 지금도 그 느낌이 발밑에 찡하건만...
금방 산등성이를 헐금씨금 오르는데, 너무 힘들어서 우선생이 나의 손을 잡아주어서 산등성이에 겨우 올랐는데 유선생이 갑자기 향숙에 대한 말을 꺼냈다.
“여기를 오르지 못해 향숙이를 누군가 업고 올랐었지요.”
내가 없는 언젠가 친구들은 이곳을 방문했었다. 우리의 절친한 친구 향숙이랑 함께.
그리하여 우리는 한참동안 향숙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향숙에 대한 추억도 우리 우정의 일부분이니까. 우리는 각자 꿈에 향숙이를 만났던 얘기들을 했다. 나는 꿈에 향숙이가 까만 배낭을 메고 다니더라고 했고 류선생은 향숙이가 기차를 타고 다니더라고 했다. 친구라는 모티브가 있어서 우리의 꿈은 모두 구체적이고 의미가 있었다. 사실상 스스로 부여한 의미겠지만...
발해땅의 아이에 대한 작품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친구는 갔다...
그러나 친구는 다시 깃대봉으로 돌아올것이다. 어느 무탈의 날에 친구는 자신이 가르쳐보이던 깃대봉으로 이동할것이다. 그 찬란한 오후의 해살이 비추던 깃대봉으로...

그날, 2010년 7월 2*일
그날은 안도홍수가 터지기 며칠전이었으니 아마도 7월 26일경이었을것이다.
그날은 나와 우선생과 류선생의 만남이 있었다. 중의원 입원실 병실에서 그는 닝거를 맞고 나와 우선생은 마주 앉아있고. 다른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쓰잘데없는 이야기”로 시시덕거렸다. 분명히 필요한 말이 있음에도 하지 못하게 하는것이 병이었다. 우리는 가장 절박한 진실에로 다가가고싶었지만 병이 이를 가로막고있었다. 진실을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아주 많이 만났지만 우리는 용기가 없었다. 계속 웃고 떠들며 그냥 감기에 걸린 환자랑 나누는 이야기만 했다. 문안을 마치고 헤여질 때면 슬픔이 치밀었다. 도무지 진실을 말할수가 없으니까.
이날 그가 불쑥 이런 말을 말했다.
“이제는 마음을 비웠습니다.”
두 번째로 하는 말이다. 암을 선고받은 날에 처음으로 말했었다.
그 말이 싫어서 다른 이야기로 묵살하려는데 그의 표정이 이를 막았다. 저도몰래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친구에게로 진실로 다가오고싶어했다. 혼자의 고독속에 남겨지고싶지 않았다. 이 때 그는 이미 동통이 시작됐다. 진통제를 맞기 시작했다. 진통제양이 점점 더 늘어나고있었다. 암이 확산됐다. 그는 자신의 병의 진행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마치도 남을 얘기하는듯 했다. 뭔가 시작된 느낌이었다. 벌써 이별은 시작되고있는건가? 나는 속으로 눈물이 치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류선생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우선생을 보는순간 불쑥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자인 우선생이 먼저 눈물을 글썽이었기 때문이다. 병실을 나와서도 나는 우선생탓이었다고 말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실이었다.
“이제는 정리도 거의 됐고, 병상일기 일부분은 ‘장백산’에 넘겼습니다. 조용히 백두산 부근의 시골에 가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책을 읽고 병상일기를 쓰면서 있겠습니다. 안해도 함께 가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정말 편해. 욕심을 다 버리니까 정말 편하더라구.”
류선생이 미소를 지었다. 쓸쓸해보였지만 정말로 편안해보이는듯 했다. 우리가 기어코 그렇게 보고싶었던건 아닌지?
이날 류선생은 마치도 생명은 마음으로 구성된듯, 욕심만 버리면 인생의 다음 단계에로 편안하게 이행할수 있다고 했다.
우선생은 천연덕스럽게 호킹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생은 필경 남자였다. 우리로서는 리해가 불가능한 입자니, 파동이니 하는 난해한 개념으로 양자물리학을 통한 생명존재의 원리에 대해 설명했다. 그것이 맞는지 어떤지는 알길이 없다. 자칫 감상적으로 나갈번했던 우리의 대화는 우선생의 양자물리학 때문에 우리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해, 난해한 세계에 대해 한결 차분하게 이야기할수 있었다.
아주 젊었을 때부터 우선생은 호킹에 열광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호킹에 대한 책을 빌려주고 친구들의 모임만 있으면 호킹과 양자물리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때마다 류선생은 “또 거꾸로박사님이...”라고 하며 우선생을 놀려댔었다. 우선생의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했던 이야기가 그의 아들이 이제 물리학박사공부를 하고있을 때에도 하고있었다. 나는 호킹에 대한 책을 읽었고 우선생에게서 그렇게 많은 공짜 강연을 들었음에도 대체 호킹 양자물리학이 무엇인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선생은 물질의 형태는 딱딱한것이 아니며 원자의 99.9%는 모두 텅빈 공간이며 그래서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빈것이며 우리가 알고있는 몸과 생명은 모두가 극히 제한된 인지능력에 의해 알고있는 것으로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몸, 죽음과 소멸은 사실과는 다른것이며 죽었다해서 소멸이 아니며 그러니 죽음에 대한 공포도 틀린 인지이며 등등...아무튼 한참동안 정신없이 그의 얘기를 들었다. 류선생은 이날만은 “또 거꾸로박사...”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나는 나대로 언니, 아버지, 향숙 등 내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이별에 대해 그들은 어딘가에 있을것이며 다만 생명이 다른 형태로 존재할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는 그 동네에 가서 다 만날게 될것이라고, 역시 다른 형태로 서로 만나게 될것이라고 등등으로 말했다.
아주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였지만 류선생도 우리의 관점에 무척 동감했다. 우리 셋이 말한 죽음의 원리가 실제로 틀리건 맞건 상관이 없었다. 죽음에로 갔다가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나름의 인식은 모두가 공유하는것이다. 다만 그것을 개개인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차이일뿐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이번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라는것이 친구를 갈라놓을수 없다는 것에 대해 믿고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류선생이 암선고를 받은후 처음으로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선생은, 그리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서로의 진실에 다가갔다.
그것으로 우리는 또한 류선생의 현실에로 다가가고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날, 2010년 9월 19일(음력 8월 12일), 그리고 10월 13일
음력 8월 12일은 류선생의 생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과일광주리와 락원떡방 생일설기떡을 사가지고 승용차에 앉아 선봉림장으로 갔다. 곳곳에 금덩이같이 노랗게 익은 호박이 펼쳐져있는 밭을 지나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이 빼곡한 림장에 도착했을 때 이곳의 날씨는 벌써 연길보다 한걸음 앞서 무척이나 쌀쌀했다.
류선생은 그동안 몰라보게 수척했다. 아픔이 견딜수없이 심해졌다. 이제는 등산도 못하고 한 착한 림장노동자가 내어준 집에서 아픔과 싸웠다. 매일 그에게 록즙을 만들어 대접하고 온갖 밀방약을 만들어 병구완을 하는 그의 안해 박희옥씨도 몰라보게 수척했다.
그는 컴퓨터를 칠수 없어 동통이 잠간 멈추는 시간을 기다려 필기장에 병상일기를 쓰고있었다. 이 때 그는 벌서 병상일기를 20여만자나 썼다. 그런데도 성경을 2차나 통독했다고 한다. 이 전에 그는 우리 민족의 력사의 중요한 기독교인물 “신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 때 그가 성경을 다시 통독하게 된것은 작품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죽음의 세계를 앞에 두고 나름대로 생명과 존재에 대한 합리한 해석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시간이 가능하면 성경소설을 써볼가 합니다. 우리 문단에는 공백이지요.”
라고 그가 창문을 내다보며 말했다.
강직한 사람...
나의 머리속으로 발해땅 발해무덤에서 뛰어놀던 작은 시골 사내애의 모습이 보인다. 그곳 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대학을 다니고 문학과 역사를 접목해 수많은 작품과 저서를 남긴 사람, 국외에서 그의 연재물은 장장 수년을 이어졌고 그가 집필한 저서는 우리 문단에서 가장 많다.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온 그여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 그가 도와준 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작고하기 전까지도 그는 불우어린이를 돕기위한 기금회에 기금을 바쳤다. 그가 도와준 사람중에는 학생도 있고 해외 동포들도 있다. 의지가지할데 없는 한 한국할머니는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십여년을 해마다 찾아왔었다. 때로는 급히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늙으셨지만 그는 안해와 함께 번마다 효도를 다 해서 보내드린곤 했었다...
생일설기떡에 초불을 달았을 때 그것을 온몸의 힘을 다해 불고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 생일을 쇠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우리도 알았다...
그는 초불이였다. 생명의 마지막을 불태우고있었다...
그리고 10월 10일날, 그는 사랑하는 맏아들을 장가보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일찍 철든 맏아들이 지들끼리 꾸민 결혼무대에서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작은 아들이 축가를 부르고 안해가 춤을 출 때...결혼행사를 용케도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그...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친구가족의 행복으로 향한 처절한 노력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축하의 박수를 힘있게 쳤다. 생명은 얼마나 비장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10월 13일, 연변대학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쓴 저서 “‘불멸의 영령-최채평전’기념행사 및 류연산문학세계조명”행사가 열렸다. 그날 간신이 마지막까지 앉아있고나서 발언석에 앉았을 때 그는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환자답지 않게 열변을 토했다.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견해를 총정리한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했던 말, “이제도 27년을 더 살겁니다. 딱 27년만 살겁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과 롱담하고있었다. 장내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지고 문우들과 교수, 학생들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이튿날 내가 보낸 메일을 그는 끝내 읽지 않았다. 읽을수 없었다. 지나친 아픔 때문에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십여년간 써온 자신의 멜 비밀번호를 잊은것이다. 하지만 나는 멜을 보냈다. 친구의 마음에 멜을 보낸것이다. 그가 읽으리라고 확신했다. 읽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유선생님: 창밖에 첫눈이 내리고있습니다. 내려서 형체가 없이 녹아버리지만 계절은 바뀌고있습니다. 친구로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안타깝지만 유선생님이 잘 싸우고있다는 생각으로 위안받고있습니다. 그날, 1910년도 10월 13일 오후 4시반경 최채평전 출간기념식에서 선생님의 답사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박수를 많이 쳤습니다. 이제 27년만 사시겠다는 말씀 그 말씀대로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 친구로 우광훈씨랑, 진설홍씨랑, 우리 함께 언젠가 늙어서 막대기를 잡고 모아산 솔나무 아래에 앉았을 때 함께 솔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먼 27년전의 옛말을 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아프지 마시기를 마음속에 늘 기도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잘 이겨내시기를, 힘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2011년 1월 18일 점심 1시
제8기 6차리사회가 열리는 날이다. 갑자기 류선생님의 안해 박희옥씨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아마도... 마지막으로...라고 말끝을 흐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류선생이 너무 힘들어해서 우리는 몇 번 만나지 못했다. 이날 희옥씨는 남편이 친구들을 만나겠다고 한다는것이다. 리여천씨, 우광훈씨와 함께 달려갔을 때... 류선생은 간신히 앉아있었다. 몸은 몰라보게 작아졌지만 두 눈에는 마지막 힘을 모은듯 정기가 넘쳤다. 상상외로 목소리가 챙챙했다. 우리와의 만남을 위해 그가 전신의 힘을 다 기울여 기다리고있음을 알아챘다.
그 현실을 외면하고싶어서 우선생이 일부러 “장백산”잡지에 나온 류선생출간기념식 사진에 대해 불평을 부렸다. 류선생사진은 잘 나왔고 자기 사진은 이상하게 나왔다는것이다. 그러자 류선생은 오랜만에 롱담을 했다.
“사실이 그렇지. 워낙 내가 우형보다는 더 잘났지.”
모처럼 그 순간만은 류선생이 전혀 아픈 사람 같지가 않았다. 원래의 류연산이였다. 우리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속으로는 눈물이 나오고...
“이 친구들은 오늘 작가협회 일 때문에 바쁘니까 당신 나랑 같이 나가 둘이서 밥이나 먹자구.”
여천씨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건 내 화려한 환상이오!”
그 한마디의 말은 그와 우리가 서로 아득히 먼 곳에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랬다. 그는 벌써 아득한 저 멀리에 가 있었다.
밥 한끼니를 먹는것이 “환상”이 된 그, 그에게는 롱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바로 일기장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우리 앞에서 유언했다. 친구들에게 유언을 했고 자신은 고향 깃대봉으로 가고싶다는 것과 자기의 비명에 새길 내용을 자세히 읽어주었다.
“이 비명이 어떻습니까?”
라고 그가 물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미처 받아들일수 있는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멍해졌다. 그는 우선생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리해하는 하느님은 양자물리학쪽이오. 우선생이 잘 알거요.”
그는 이승을 떠나면서 “하느님”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굳이 말하고싶어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우선생의 몫으로 남겼다.
동통이 몰려오자 그는 우리를 빨리 가라고 독촉했다. 두 친구가 차례로 류선생을 안아주었다. 나도 안아주었다. 친구지만 이성인 관계로 친구 20여년에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안아주었다. 그의 한없이 작아진 어깨를... 그리고 문가로 다가가며 참을수 없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그는... 우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것은 마지막 인사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의 병은 시간을 다투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2011년 2월 22일
이틀간 그가 옮겨진 중의원병실의 복도에 서있었다. 이제 그의 생명은 끝나가고있었다.
“선생이 친구들에게 부탁하신 대로 다 할께요. 꼭 기운 내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큰산을 등에 지고 떠나는듯 너무나 힘든 모습이어서 아무런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들려오는 그 또렷한 대답, 예...
그것이 내가 들어본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아침에 내가 병원에 도착하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박완서선생님이 돌아가셨다오. 머리속으로 울리는 소리, 박완서선생님이 떠나가셨다오. 그는 한국에서 출간된 나의 책 “코리안드림, 그 방황과 희망의 보고서”에 발문을 써주신 분이고 내가 가장 흠모하고 존경하는 작가이다. 그 위대한 작가분이 떠나셨다...
그리고 이날 오후 세시반,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가이고 우리의 절친한 친구 류연산씨도 끝내 떠나갔다...
천리밖에서 달려와 일주일전부터 호텔에 투숙하며 마지막을 함께 한 친구 윤정삼씨, 류선생이 근무했던 대학교 총장님, 교수님들과 친구들, 가족, 친척들, 수십명이 지키는 가운데 그는 끝내 아프지 않은 나라로 출발했다. 우선생이 지기들과 함께 친구에게 손수 옷을 입혀 보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놓였다.
새출발이었다.
아마도 그 세상에서, 우리가 아직은 보지 못하는 또다른 생명의 공간에서, 또다른 생명의 존재방식으로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잘 살아갈것이다. 자기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착한 사람, 의리와 정을 지킨 좋은 친구, 열심히 일하는 사람, 그러나 이제는 휴식을 할줄 아는 사람으로 살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있는 물질과 세상과 생명과 죽음과는 다른 형태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면서 양자물리학적으로 살고있을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여기 모든 사람과 만나서 이승의 일들에 대해 과거를 말하듯이 옛말을 하리라.
친구여, 우리는 참으로 좋은 친구였다.
2011년 4월 9일 23시 43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