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아주 기색이 좋으시다. 더할 수 없이 편안한 표정에서 수시로 즐거움이 넘쳐난다. 어제 오늘 옛날 이야기를 꺼내니까 어머니 마음속에서 즐거움을 한없이 길어낼 수 있는 것 같다.

어제 저녁 노래를 불러드리다가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하는 대목에서 살짝 옛날로 모셔 봤다. "저희 어렸을 때요, 어머니 학교 갔다 오실 때 되면 우리도 목을 빼고 기다렸었죠." 하니까 그 시절이 바로 떠오르는 듯한 표정이 되셨다. "어머니도 우리 보고 싶어서 급히 돌아오시는 중에도 꼭 만나당 들러서 빵을 사 오셨잖아요." 하니까 흐뭇한 웃음이 금세 얼굴에 넘치신다. 만나당은 혜화동 로타리, 상업은행 자리에든가 그 옆에든가 있던 우리 단골 빵집이었다.

그 시절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신 것 같아서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니 어머니도 거의 그대로 생각나시는 것 같다. "명륜동에 처음 가서 셋방 살던 집 생각나세요? 주인이 함씨였죠." 하니까 "그랬나? 어떻게 그런 게 다 생각나냐?" "글쎄요, 주인집 아이들 이름이 생각나요. 병일이 형 하고 병숙이 누나. 함병일, 함병숙." 그 시절을 바라보는 듯 아득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 집이 보성학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졌다가 김칫국집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는 데 있었죠." 하니까 "김칫국집?" "김치국 생각 안 나세요?" 고개를 저으신다. "김씨 성 쓰는 치안국장네 집이라고 다들 '김칫국집'이라고 했잖아요?" 하니까 생각나시는 듯 와하하 웃으신다.

"그 때 우리 참 가난하게 살았죠? 어머니, 네모 안에 네모 생각나세요?" 또 고개를 저으신다. "제 바지가 모두 형들한테 물려받은 거라서 한 번 해진 데를 네모로 기워붙이고, 그 가운데가 또 해져서 네모 안에 네모로 기워붙여 주셨잖아요?" 말이 끝나기 전에 벌써 생각이 나셨다. 쥐고 있던 내 손에 꼬옥 힘을 주시고 한참 있다가 "미안하다." 하신다. "괜찮아요, 어머니. 그 때 그렇게 돈이 없는데도 1주일에 한 번은 꼭 고기를 구워서 저희를 먹여주셨죠. 그 접는 석쇠 요즘은 별로 안 쓰죠. 불고기 아니면 스키야키." 그때로 돌아가신듯 표정이 결연해지신다. "암, 그거 하나는 내가 확실히 했지."

55년에서 50년 전 사이의 일 어느것을 꺼내도 거의 그대로 떠오르시는 것 같았다. 말씀을 들으시다가 유년기의 내 모습이 그려지시는 듯 이따금 손을 뻗쳐 내 얼굴을 어루만지신다. 한 번은 코에 손이 오래 머무셨다. 딸기코는 근년 똥배와 함께 어머니에게 내 약점이었다. 모시고 앉았는 중에 불현듯 내 코에 시선을 집중하고 "네 코는 어째 그렇게 색갈이 요란하냐?" 하신 일이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대개 "딸기코 처음 보세요, 어머니? 얼마나 먹음직스러워요?" 눙치고 넘어간다. 어제는 한참 내 코를 만지며 아무 말씀 없으시기에 자진신고 했다. "어머니, 제 딸기코가 보기 좋으시죠?" 했더니 뜻밖에 후하게 나오신다. "어디 코뿐이냐? 다 보기 좋지."

장난기도 많이 되살아나셨다. 어제 낮에 아내가 뵙고 돌아와서는 이야기를 꺼내다가 말고 한참 웃기부터 했다. 누운 자세를 고쳐드리느라고 몸을 기울이고 있는데 손을 뻗쳐 아내의 젖을 주무르시고는 "아~ 황홀하다!" 하시더라는 것이다. 저녁때 내가 가려니까 "어머니가 어디 주무르실지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했다. 코 정도로 만족하셔서 다행이다.

3월에 이쪽으로 옮기신 뒤로는 아내가 보호자 노릇을 해 왔다. 병원에도 요양원에도 매일 가 뵙고 필요한 일 챙겨드리는 역할을 아내가 맡아주는 덕분에 나는 저녁무렵에 잠깐씩만 가뵙고, 피곤할 때는 거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낮에 큰오빠 내외가 예화와 함께 다니러 왔기 때문에 몇 주일 동안은 내가 역할을 늘려야 한다. 오늘은 아내가 공항에 나간 동안 내가 낮에 가뵈었다.

3시경이었는데 주무시고 계셨다. 옆에 앉아서 천수경을 읽고 있었더니 거의 끝날 때 잠이 깨셨다. 졸린 눈을 잠깐 뜨셨다가 상황이 파악되자 눈을 도로 감고 즐기기 모드로 들어가신다. 독경이 끝나자 눈을 뜨시는데,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시다. 달콤한 잠의 여운 속에 독경소리가 정말 좋으셨던 모양이다.

행복감 속에서 잠을 깨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그 웃음을 지켜드리려고 오늘은 진짜 작심하고 열과 성을 다했다. 노래 몇 곡도 평소보다 훨씬 잘 불러드렸고, 간간이 이야기도 어머니 마음에 바싹 맞춰드렸다. 이야기 내용은 읽는 분들 피부 건강을 생각해서 (닭살 조심!) 일일이 옮겨놓지 못하고 맛빼기만. "어머니, 요즘 거울 보니까 제 얼굴이 훤해졌어요. 어머니 훤하신 얼굴을 많이 쳐다보니까 저도 닮아가나 봐요. 얼굴만 훤해지는 게 아니라 글도 훤해지는 것 같아요. 전에는 제 글 읽는 이들이 글이 똑똑해서 좋다고 했는데, 요즘은 글이 훤해서 좋다고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두 달 전까지처럼 말씀이 많지는 않으신데, 그때와는 다른 틀로 안정이 되신 것 같다. 원장님과 잠깐 마주쳤을 때, 어머니가 노래 들을 때 감상에 집중하시는 태도가 뚜렷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표현보다 감상에 치중하는 틀을 잡으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틀이라도, 요 며칠 보이시는 기색으로는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신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