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과 경찰의 좌익 탄압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미군정의 힘이 미치지 않던 지방의 자치운동이 제일 먼저 집중포화를 받았다. 4월 9일에 경상남도 공보실에서 피검자 21인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런 검거는 전국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경상남도 공보실, 검거선풍으로 피검된 사람들의 성명과 소속 발표>

민간단체가 정부행세를 하였다는 이유로 9일 시내 각처에서 검속선풍으로 말미암아 피검된 11정당 관계자 21명의 씨명 소속을 16일 경남 도 공보실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피검자 씨명:조선공산당 부산위원회 徐鍾德, 도 인민위원회 盧百容 尹一 姜鎭順, 시 인민위원회 李聖萬 申德均, 인민당 도 지부 石泳夏 田斗萬 李鍾文, 인민당 시 지부 李相壽 吳載一 金相基, 도 농민조합 朴鍾凡, 부녀동맹 盧南僑, 노조전평 池漢鍾, 청년동맹 李英根, 도 민전 金東山, 전재동포구호협회 林龍吉 林守吉 朴勝道 高建升 (<동아일보> 1946년 04월 1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군정청과 경찰의 민의 억압 정책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4월 10일의 집회금지령이었다.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10일 정오 러취 군정장관 명령이라 하여 10일 이후 결혼식, 종교적 단체의 예배 이외의 일절 집회를 미·소공동위원회가 끝날 때까지 금지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금지령에 의하여 이날 종로 기청에서 개최중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용산에서 개최중인 민전 순회강연회는 중지시켰다고 부언하였다.

◊ 루 경기도지사 담화

이것은 별로 신법령이 발동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에 있어서 일체의 집회에는 나의 허가를 요하였는 바 이후 나로서는 집회를 허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회가 허가되고 아니되는 것은 그 집회허가신청서를 접수한 후 내가 고려하여서 결정할 뿐이다.

◊ 趙 경무부장 담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될 때 이미 결정되었던 것으로 지금 발동된 것뿐이다. 그 의도는 다만 온건한 분위기 속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진행시키려는데 있다. 그리고 그 실시구역은 전 조선에 긍한 것으로 정치적 색채를 띤 집회는 일체 금지하는데 식량문제를 취급하더라도 그것을 대중화시키려는 것 같은 것은 물론 금지된다.

(<서울신문> 1946. 4. 11일자)


3월 19일부터 시행된 집회허가제를 3월 7일자 일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아예 집회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기사 첫 줄을 읽으며 내 눈을 믿기 어려웠고, 이어 떠오른 생각은 장택상이 제멋대로 금지령을 내리면서 러치를 팔아먹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군인이라도 미국 같은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라난 사람이 ‘집회금지령’ 같은 것을 상상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경기도지사의 담화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허가제는 기정사실이고, 허가권자인 도지사가 허가를 안 해 주면 바로 금지라는 것이다. 집회 금지 결정을 내린 러치의 사상도 의심스럽지만, 자기가 허가권자니까 금지 여부는 자기 맘에 달린 것일 뿐이라는 도지사의 말은 더욱 가관이다. 미군 장교라고 다 저런 수준은 아닐 텐데, 24군단에는 진상 장교만 모아 놓았나보다.


이튿날 신문에는 이 금지령에 대한 각계 반응을 모은 기사와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의 금지령 수정 발표 기사가 실렸다.


경기도 경찰부 정보과장으로부터 10일 결혼식 급 종교단체의 예배 이외 일절 집회를 10일부터 미소공동위원회가 끝날 때까지 금지하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민주주의조선의 건국을 위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확보가 절대조건인 금일에 있어서 그 운영은 극히 주목되는 바로 각계의 소견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조선체육회 金永述 담

참으로 의외의 일이다. 체육단체의 집회까지 중지케 됨으로 유감이다. 순수한 스포츠인들이 모이는 단체의 회합까지 중지케 될 것이니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자유국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우리 조선의 체육계의 발전을 위하여서도 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각 경기 단체의 활약은 그 기대가 적지 않은데 언어도단이다.


문화단체연맹 담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나 해방조선에 있어 집회금지란 유쾌치 않은 조치다. 집회란 민주주의 토의나 중의를 모으는데 반드시 필요한 형식인데 이것이 금지된다면 민주주의적 훈련과 민주주의 건설에 퍽 지장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계속 중 이런 집회를 금지한다는 것은 일반대중의 여론과 공동위원회를 분리하는 것으로 연합국과 우리 조선인민과의 연계를 절단시키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연맹으로서는 오는 5일부터 5일간 개최예정인 최초의 역사적 회의인 민족문화건설전국회의가 이 금지령으로 중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이것은 민족문화 발전상 큰 희생이다. 집회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의 발전은 곤란한 것이다.


한독촉성회 李觀運 담

일제시대에도 없던 집회 일체금지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방금 집회를 금지한다는 통첩은 왔으나 하등 예고도 없는 이러한 조치는 참으로 유감이다. 이미 허가를 받은 우리 회의는 오늘만은 계속할 작정이다.


법학자동맹 金中山 담

이 중대한 사실을 단순히 법적 해석이니 법이론을 가지고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우리들 전체의 문제이다. 일찍이 일제시대 가혹한 경찰법이나 치안유지법에도 이러한 예를 볼 수 없던 일로 참으로 언어도단의 조치다.

더욱이 미소회의가 방금 진행 중이고 이런 때일수록 우리 민족의 진정한 총의를 반영시켜야 되고 또한 이것을 받아주어야 할 이때 결혼식, 종교집회와 장례 이외는 일률로 미소회담이 끝날 때까지 중지한다는 것은 반민주주의적 조치로서 당국에서 급속히 적당한 조치가 있기를 바란다.


민전 담화

시민대회 불허가 관계로 민전의 대표가 러취 군정장관과 재교섭을 하는 중이다. 집회가 활발해야 민의의 소재가 반영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이때 집회금지란 의외 천만이다.


문학가동맹 林和 담

금지할 것은 삼상회의결정을 반대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지장되는 집회와 언론을 금할 것이지 삼상회의를 지지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원조하려는 회합을 금지한다는 것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민족의 의사표시의 기회를 막는 것이다.


한국민주당 金炳魯 담

전적으로 금지한다는 것인지 지금까지 계출제였던 것을 허가제로 한다는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또 미소공동위원회의 종료까지를 기한으로 한 데 비추어 그 내막을 상세히 알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12일자)


민주주의 조선 건설도정에 있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확보는 절대적인 조건임을 3천만 민중이 확신하고 있는 이때 10일 러취 군정장관의 명령이라고 경기도 경찰부에서 발표한 집회금지령은 각계에 충동을 주었는데 당국에서는 동일 오후 5시 정치적인 시위행렬만을 금지한다고 거듭 시정 추가발표하여 일반은 그 경위에 의아하고 있는데 11일 張 경찰부장은 집회금지령을 시정발표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자단에게 말하였다.

“10일 오전 10시 군정청 간부회의에서 일체의 집회를 금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민간 측의 진정도 있고 하여 동일 오후 4시 다시 회의를 열어 집회는 종래와 같은 허가원에 의하여 허가하기로 하고 정치적 색채를 띄운 시위행진만을 미소회담 계속 기간 중에 한하여 금지하기로 되었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12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오전 회의에서 결정해 발표한 것을 오후 회의에서 뒤집다니, ‘조령모개(朝令暮改)’를 말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집회허가제만 하더라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상사태 중 일시적으로나 시행할 만한 것인데, 허가제를 강화해서 운영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금지령’이란 것을 당당히 공표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인가.


미소공위 개막에 임해 민주의원에 대한 지지가 미약하고 군정청에 대한 민심이 험악하니까 입을 틀어막겠다고 설치는 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좌익 탄압이 강화되었고, 그런 중에 임정 국무위원으로 비상국민회의에 반대하고 민전 부의장이 된 김성숙이 구속당했다. 지방을 돌며 미군정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걸려든 것이다.


[전주 9日 전화 합동] 전주에서 구화(口禍)로 인하여 검거되어 6개월의 체형선언을 받은 민전 부의장 김성숙, 안기성 양씨에 대한 재심 군정재판은 3월 20일 전북도청 지사실에서 개정 초심 육개월 체형을 그대로 언도하여 확정하였는데 그간 지사의 상경으로 인하여 결재를 얻지 못한 관계로 진상이 발표되지 아니하였던바 이번에 귀임한 지사 가포불치 중좌는 동 공보과를 통하여 양씨에 대한 군정재판의 진상과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김성숙, 안기성은 군정포고 제2호 법령 제19호에 저촉된 것이 판명되었다. 그들은 기만적이고 허위의 선동을 하였는데 그러한 행동은 사회의 안녕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판사의 언도대로 6개월의 체형을 받게 되었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1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김성숙(1898-1969)은 임정 요인들 중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어온 사람의 하나다. 19세에 승려가 되고 3-1운동 직후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부터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했다.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간 뒤 승복을 벗고 북경 민국대학에서 공부하며 혁명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광동으로 옮겨 활동하다가 1927년 광동꼬뮨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에 그와 가까이 활동한 사람들이 김원봉, 장건상, 장지락 등으로,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김산’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장지락이 ‘스님’으로 지칭한 인물이 바로 김성숙이었다.


김성숙은 1937년부터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임정에 함께 합류해서 국무위원과 내무차관을 맡았다. 김재명의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에는 김성숙을 다룬 한 장이 들어 있는데, 그 글 끝에 이런 논평이 붙어 있다. (50쪽)


김성숙이 70평생 일관해서 걸어간 길은 이데올로기의 편향성과는 얼마간 거리를 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극단적 좌우익을 함께 배제하고 온건한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 우파세력(온건 좌파)의 합작으로 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굳이 그를 특정 사회과학 용어로 규정한다면 ‘민족사회주의자’가 적절하겠지만, 무엇보다 민족의 통일을 소망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김성숙은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가 비상국민회의로 선회할 때 우익 편향성에 항의하며 김원봉, 성주식, 장건상과 함께 탈퇴했다. 그들은 이때 좌익에서 추진하고 있던 민전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불편부당의 뜻을 밝혔으나, 그 후 민전의 문호 개방을 조건으로 참여했다. 김성숙은 민전 지도부의 일원으로 지방 순회강연에서 미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3월 30일 구속되어 미군정의 정치범으로 6개월 복역했다.


임정 국무위원이 귀국 4개월 만에 미군정에 체포되어 체형을 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민주의원 총리로 들어가 있던 김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임정 국무위원이 소신에 따른 발언으로 체포당해 실형 선고를 받는 상황은 임정의 권위가 흔적도 남아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