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의 활동은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 전국시대를 통한 중국 내 교역 증가는‘천하시장’의 형성을 통해 ‘천하제국’의 출현을 가져왔다. 진 시황에서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제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천하시장 외부와의 교역이 다음 단계 시장 확장의 과제로 떠올라 있었다.

[‘정복’과 ‘교역’의 병행은 대항해시대 유럽인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전국시대 교역 증가는 <사기>에 ‘평준서’와 ‘화식 열전’이 들어간 데서 알아볼 수 있다. ‘화식 열전’에는 민간의 거부로 앞 시대 사람 넷과 사마천 당대 인물 아홉 사람의 사업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앞 시대 사람 중 하나(郭縱)와 당대 인물 넷(蜀의 卓씨, 程鄭, 宛의 孔씨, 曹의 邴씨)이 제철업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었다.]

[진 시황의 통일에서 ‘시장 통일’의 의미가 컸다는 사실은 통일정책 중 도량형 통일, 화폐 통일, 도로 정비 등에 역점이 놓인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장건 이전에도 중서 간 교역이 있었지만 규모가 영세하고 중국 측 역할이 작았다. 권력의 작용이 크지 않은, 자연발생적 수준의 교역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국 천하시장의 안정으로 대외교역의 획기적 확대가 필요하게 된 단계에서 장건의 활동을 계기로 중국 국가권력을 발판으로 한 대규모 교역체제가 만들어졌다.

[교역의 필요는 분업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지역 간 교역도 지역 간 분업을 투영하는 것이다. 한 무제 때 중국의 대외교역이 늘어난 것은 중국이 천하시장을 이룬 후 생산력이 급속히 성장해서 잉여생산이 커진 결과 일부 계층의 생활수준 향상과 함께 외부로부터 사치품 수입의 필요가 늘어난 결과였다.]

[‘실크로드’라는 이름대로 장건 시절부터 중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비단이었다. 같은 시기 서양 어디에서도 대규모의 원거리 교역 품목이 원료상품뿐이었음에 대비해 볼 때 중국 산업이 타 지역을 압도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유럽의 산업혁명이 세계적 교역 확대를 이끌어갈 때 선진국의 수출품에서 직물이 차지하던 중요성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이다.]

[교역의 수요가 늘어나더라도 교역의 증대는 치안 수준에 의해 제한된다. 강한 공권력의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 교역은 상인 개개인의 능력과 책임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한나라의 국가권력이 무제 때 교역 증대의 필요조건의 하나였다. 대규모 정치조직이 뒷받침하는 강력한 통화의 존재도 교역의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사기>의 ‘平準書’ 제목은 경제현상을 유체상태로 보는 관점을 나타낸다. 강한 공권력의 존재가 경제라는 액체의 점성을 줄임으로써 경제 원리의 작용을 원활하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건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받는 측면은 서쪽으로 멀리 나아가 헬레니즘 세계와의 접점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해외활동에서 헬레니즘 세계와의 접촉은 작은 일부분일 뿐이고, 그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흉노지역에서였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흉노는 당시 중국문명의 외부에 존재하던 이민족으로서보다 ‘중국문명의 제2제국’으로 볼 만한 존재였다. 한나라가 그 북부와 서부의 이민족과 교류하는 조건은 무제 때까지 흉노와의 관계에 종속되어 있었다.

[중국이 천하제국을 이룬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중국형 철기문명’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중국형 철기문명은 기원전 5세기경에서 기원후 10세기경까지 철기 사용량이 다른 지역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상태를 유지시켜 주었고, 생산력이 높은 집약적 농업문명의 발판이 되었다. 고대 중국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다.]

[전국시대의 흉노는 조나라 혼자서 상대할 만한 국지적 세력이었다. 그런데 진나라가 통일할 때는 만리장성을 필요로 할 만큼 거대한 세력이 되어 있었고, 수십만 병력으로 평성에서 한 고조를 포위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제 때 한나라의 다년간에 걸친 거국적 노력으로 겨우 구축할 수 있었다. 흉노의 강성은 철기 기술을 비롯한 중국문명의 제 요소를 섭취한 결과였다.

몽골 서부 지역에는 중국 청동기문화와 계통을 달리하는 고도의 청동기문화가 분포해 있었다. 이것을 유원(綏遠)청동기문화, 또는 오르도스문화라 하고, 요동식, 중국식 청동기문화와 대비하여 북방식이라고도 한다. 전국시대에서 한 대에 걸친 많은 철기 유물이 몽골 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만이 아니라 농구와 생활용품까지 품목이 다양하다는 점이 중국 철기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1928년 바이칼 호 남안 고로디시치예에서 발굴된 제철 유지는 흉노의 철기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되어 왔다. (澤田 勳, <匈奴> 84-87쪽)]

[중국은 철기문명을 발판으로 안정성이 강한 집약적 농업사회를 키워낸 반면 유목민인 흉노는 다양한 외부 기술을 융화시켜 문명의 성과를 전투력 부문에서 극대화시켰다. 그래서 철기문명 초기에는 흉노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산력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중국의 힘이 흉노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흉노의 격파를 통해 천하제국으로서 중국의 위상이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마저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하였다. 글이나 서적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약속을 하였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로 새나 쥐를 쏘고, 좀 자라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하였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고, 긴급한 상황일 때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 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하였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이익을 위해서 일을 꾸밀 뿐 예의는 고려하지 않았다. (...) 건장한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이 그 나머지를 먹었다. 즉 건장한 사람을 중히 여기고, 노약자들은 경시하였던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정범진 외 옮김)에서 흉노를 개관한 대목이다. 한자문화와 그에 입각한 이념체계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인은 흉노를 전형적인 오랑캐로 보았다. 그러나 진나라 통일 무렵에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면서도 그쪽에 배울 만한 점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을 묵특(冒頓) 선우의 집권과 제패에 얽힌 일화에서 알아볼 수 있다.

묵특 선우는 북방을 통일한 뒤 현왕, 녹려왕, 대장, 대도위 등 관작을 설치했는데, 모두 좌우를 두었다.(좌현왕과 우현왕 등) ‘좌’를 동쪽, ‘우’를 서쪽에 배치한 것은 중국에 대항하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진 시황의 통일에서 한 고조의 재통일에 이르는 중국의 격변기에 많은 중국인이 흉노에 투항하여 기술을 전파했다. 제후 중에도 한왕 신과 연왕 노관이 흉노에 투항했다.

[위 인용문 끝의 노약자를 경시했다는 대목에서 흉노제국이 사회보장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유목사회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대규모 국가를 건설한 내부적 인센티브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흉노제국 건설은 한나라의 위협에 대한 대응작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 고조가 평성에서 흉노군에 포위당해 곤경을 겪은 후 한나라가 선물로 흉노에게 평화를 사는 관계가 세워져 무제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조가 죽은 후 묵특 선우가 여 태후에게 결혼을 청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흉노로의 기술 전파가 계속되었다. 문제 때 흉노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투항한 환관 중항열 관계 기록에서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처음 흉노는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게 되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그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중항열은 기록과 통계 등 유용한 기술을 채용하되 한나라의 소비문화는 차단하여 흉노의 중국화를 억제하려 한 것이다. 무제 때까지 흉노는 한나라와 공식적으로 화친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물자를 선물로 받는 대신 정면 공격을 삼갔다. 그러나 지엽적 갈등은 계속 일어났고, 때로는 전면 대결에 가까운 위기를 빚어내기도 했다.

무제(-141~-87) 즉위 후 화친 관계가 한계에 이르렀다. 흉노 측 요구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한나라는 정벌 능력을 갖출 만큼 국력이 성장한 것이다. 화친 관계에 어긋나는 한나라 쪽의 첫 군사행동은 -134년의 ‘마읍 사건’이었다. 군신 선우(묵특의 손자)를 유인해 매복공격하려는 계책이 실패한 사건인데, 중국군이 흉노 지역으로 쳐들어갈 능력은 갖추지 못한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사건 후 화친을 회복했다가 -129년까지 준비를 갖춘 뒤 본격적 흉노 정벌을 시작했다.

무제가 즉위 직후 장건을 월지에 사신으로 보낸 데서 당시 한나라가 외부 정보에 매우 어두웠음을 알아볼 수 있다. 월지는 동호와 함께 유목 지역에서 흉노와 힘을 겨루는 세력이었고, 무제는 흉노 공격을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는 뜻에서 장건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월지는 이미 30여 년 전 흉노에게 격파당해 서쪽으로 이주, 헬레니즘 세계의 변방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장건은 11년간 흉노에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탈출하고는 한나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서쪽으로 월지에 찾아가 사명을 완수한 뒤 -126년 귀조했다고 한다. 그때는 한나라의 대규모 흉노 정벌이 진행되고 있을 때여서 장건도 바로 그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120년까지 흉노 정벌이 일단락된 후 오손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도 명목상 목적은 흉노 정벌을 위한 동맹 체결이었지만, 실제로는 교역로 확보에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 때까지 파밀 고원 동쪽의 사막지대가 한나라 영토에 혹처럼 덧붙여지게 되는데, 이것은 한나라의 통상적 영토와 달리 교역로를 관리하기 위한 지배였다.

-129~-120년간의 흉노 정벌로 한나라 중심의 천하체제가 이뤄졌다. 흉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나라의 중요한 안보 요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120년대까지와 같은 대등한 상대가 아니었다. -111년 남월 정벌과 -109년 (고)조선 정벌로 천하체제를 완성한 것은 흉노의 견제가 사라진 덕분이었다.

[-120년대 한나라의 흉노 정벌에는 엄청난 군사비가 투입되었다. 전마(戰馬) 확보가 가장 큰 비용 항목의 하나였다. “흉노를 죽이고 포로로 한 것이 8-9만 명이나 되었지만, 한나라의 사졸로서 죽은 사람도 역시 수만 명에 달하였고 죽은 말은 10여 만 필이 넘었다.”(‘흉노열전’) -129년 이전에는 한나라에 전마가 부족했기 때문에 지키는 전략밖에 쓸 수 없었고, 적극적 정벌을 위해 전마를 대거 수입하고 수입한 목초를 재배하기까지 했다.]


-110년을 전후한 남월과 조선 정벌은 흉노 정벌을 위해 키워놓은 군사력을 활용할 필요가 조건의 일부로 작용한 것 같다. 한나라에서 -111년에 보낸 공손하의 원정대와 -110년에 보낸 조파노의 원정대가 흉노 지역으로 수천 리씩 진격해 들어갔으나 “흉노를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고 할 만큼 흉노가 위축되어 있었다. 한편 남월과 조선은 정벌 후 군현을 설치했으나 군현의 계속 유지가 어려울 만큼 여건이 미비한데도 정벌을 감행한 것이었다.

조선 정벌 후 설치한 4군은 얼마 후 한나라에서 제대로 관리를 못하게 됨에 따라 정상적 군현이 아닌 다분히 독립적 존재로 위상이 바뀌었다. 중국문명의 여러 요소, 특히 철기 기술이 한 4군을 통해 조선 지역에 유입되었고, 이 지역이 철기를 이용한 집약적 농업사회 건설에 적합한 기후와 풍토였기 때문에 중국문명의 도입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장건의 서역로 개척을 계기로 중서 간 교역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 교역의 한 쪽 주체로서 중국의 역할이 명확한 틀을 이뤘다. 그런데 이 교역의 저 쪽 주체는 누구였고 어떤 조건에 처해 있었는가? 종래의 유럽 중심 역사 연구는 이 질문에 소홀한 편이었는데, 근년 들어 서아시아 지역 연구 발전에 힘입어 근세 이전의 세계체제에 관한 새로운 야심적 패러다임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측면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책으로 국내 번역판 나온 것 몇 가지를 소개한다.

재닛 아부-루고드, <유럽 패권 이전 - 13세기 세계체제>(박흥식, 이은정 옮김)

데이비드 루이스, <신의 용광로 - 유럽을 만든 이슬람 문명 570-1215>(이종인 옮김)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이희재 옮김)


기원전 11세기의 이집트 미라에서 발견된 비단 조각에 관한 글이 1993년 3월 <네이처>지에 실린 것을 옮겨놓는다. 양잠과 견직 기술은 기원전 2세기까지 중국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통설에 비추어 이 미라의 비단 조각을 통해 기원전 11세기 이전의 동서 간 교역 상황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다. <Wikipedia> 'silk' 조에서 찾은 것이다.

Use of Silk In Ancient Egypt

by G.Lubec, J. Holaubek, C. Feldl, B. Lubec, E. Strouhal

(Original print at NATURE, March 4, 1993)

SIR -- On examining hair samples of mummies in the scanning electron microscope we found a piece of tissue between the curls which had the characteristic appearance of silk. To show that the specimen was silk, we performed infrared studies using multiple internal reflection, allowing nondestructive identification of the material. The spectra clearly identified silk.

We perfomed amino-acid analysis of the sample according to the method in ref. 2 and obtained the typical spectrum of hydrolysed silk, with high glycine, serine and alanine peaks as originally described by Shimura. To exclude the possibility that the silk specimen could have been added later to the mummy's hair we performed amino-acid racemization studies on the mummy's hydrolysed hair samples and on the hydrolysed silk specimen: proline racemization was used as the marker amino acid. We used an HPLC method for the separation of L and D forms.

The D/L racemization ratios from hair and silk were comparable, which excludes contamination of hair by the silk tissue in recent times. The mummy, a 30-50-year-old female, was found in Thebes, Deir el Medina, at the burial ground of the king's workmen. Based on anthropological data, the mummification method, the burial ground and amino-acid racemization, the mummy can be assigned to the twenty-first dynasty.

The silk industry had its origin in China and the material probably first reached the Mediterranean countries via Persia. Silk was not used in Egypt until later; the earliest example that can be traced is of Ptolemaic date from Mostagedda, a wollen tunic with decorative stripes with a weft of white silk. Lucan, writing in the middle of the first century, described Cleopatra with "her white breasts resplendent through the Sidonian fabric, which, wrought in close texture by the skill of the Seres, the needle of the workmen of the Nile has separated and has loosened the wrap by stretching out the web".

A portion of a coloured silk fabric was found at Qustul, south of Abu Simbel, the exact date of which is not certain, though it is probably not older than the fourth century AD. From the fourth century AD onwards silk became more common in Egypt. Our work suggests that silk was used in Egypt as long as 1,000 years BC, which would shed new light on ancient trading practices.





겨우 이틀 틈을 내 강의 준비를 하면서 강의 원고를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메모 정도로 작성했습니다. 내용에 관심 있는 분들은 댓글로 토론 부탁드립니다.

강의 시리즈가 재미있는 기획이더군요. 시민 공개강좌인 모양인데 관심 있고 형편 되는 분들 가서 들어보시죠. 청강 허용 여부는 담당자인 박영은 교수에게 전화로 확인해도 될 것입니다. 010-9422-4807


일시: 2011년 4월 6일~5월 25일 | 매주 수요일, 오후 2시~4시
장소: 한양대학교 박물관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2번 출구

1. 21세기에 재조명하는 실크로드의 역사적 의미와
유라시아의 영웅
▶ 4월 6일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2. 최초로 실크로드를 개척한 아시아의 콜롬부스 장건
▶ 4월 13일 김기협 | <프레시안> 상임편집위원
3. 1300년 전 실크로드를 제패한 고구려인 고선지
▶ 4월 20일 지배선 |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4. 우리 역사 최초의 문명 탐험가 신라인 혜초
▶ 4월 27일 김규현 |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 소장
5.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몽골 제국의 창건자 칭기스칸
▶ 5월 4일 김호동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6. 이슬람 세계가 배출한 중세 최고의 탐험가 이븐 바투타
▶ 5월 11일 이희수 |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7. 닫힌 중앙아시아를 열고 세계를 소통시킨 아미르 티무르
▶ 5월 18일 성동기 |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교수
8. 중세 대항해의 서막을 연 항해가 정화
▶ 5월 25일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정수일
약력
- 북경대학 동방학부 졸업
- 카이로대학 인문학부에 국비 연구생으로 유학
- 중국 외교부 및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 근무
- 평양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
-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
-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문학박사
-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현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저서
『신라. 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2.
『세계 속의 동과 서』, 문덕사, 1995.
『씰크로드학』, 창비 , 2001.
『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2001.
『이슬람문명』, 창비, 2002.
『문명교류사 연구』, 사계절, 2002.
『문명의 루트 씰크로드』, 효형, 2002.
『실크로드 문명기행』(오아시스로 편), 한겨레, 2006.
『중앙아시아 속의 고구려인 발자취』(공저), 동북아역사재단, 2008.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살림, 2009.
『초원실크로드를 가다』, 창비, 2010.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 (공저), 통일뉴스, 2010. 등
역주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1.2.)(Ibn Batutah, 아랍어 원전), 창비, 2001.
『중국으로 가는 길』(H.Yule, H.Cordier, 영어 원전), 사계절, 2002.
『왕오천축국전』(혜초, 한문 원전), 학고재, 2004.

김기협
저서
『미국인의 짐』, 아이필드, 2003.
『밖에서 본 한국사』, 돌베개, 2008.
『뉴라이트 비판』, 돌베개, 2008.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서해문집, 2010.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돌베개, 2010.
『아흔 개의 봄』, 서해문집, 2011.
역서
『중국도량형도집』, 중국국가계량총국 주편, 법인문화사, 1993.
『용비어천가』(공역), 들녘, 1997.
『역사의 원전』, 존 캐리 편저, 바다출판사, 2006.
『소설 장건』, 량위에, 아이필드, 2007.
『공자 평전』, 안핑 친, 돌베개, 2010.
약력
- 서울대학교 사학과 및 경북대학교대학원 사학과 졸업
-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마테오 리치의 중국관과 선교노선”으로 박사학위 취득
-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 <중앙일보> 객원 근무 (연구위원, 논설위원, 전문위원)
- 현 한국과학사학회 활동
- 현 <프레시안> 상임편집위원

지배선
약력
- 연세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 사학과 졸업
-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모용연의 중국화정책과 대외관계”로 박사학위 취득
- 연세대학교 원주박물관장 역임
- 연세대학교 문리대학장 역임
- 현 연세대학교 인문예술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
저서
『중세동북아사연구』, 일조각, 1986.
『중세 중국사 연구-모용연과 북연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평전』, 청아출판사, 2002.
『고구려•백제 유민 이야기』, 혜안, 2006.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齊)』, 더불어 책, 2007.

김규현
약력
- 성균관대학교, 해인불교전문대학, 베이징의 중앙미술대학,
라싸의 티베트대학에서 수학
- 1997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 설립
-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역사기행- 당번고도를 가다>,
<티벳고원을 가다>, <역사스페셜-해동 최초의 세계인 혜초> 등의
고문과 리포터로 제작에 참여
- 다음카페(http://cafe.daum.net/tibetsociety) 운영
저서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도피안사, 2000.
『티베트의 역사산책』, 정신세계사, 2003.
『티베트의 문화산책』, 정신세계사, 2004.
『혜초 따라 5만리 (상,하)』, 여시아문, 2005.
『바람의 땅, 티베트(상,하)』, 실크로드 문화센터, 2008.

김호동
약력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졸업
-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 수상: 한국출판문화대상 저술부문 우수상(2003), 서울대학교 교육상(2006)
- 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교수
저서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 까치, 2002.
『Holy War in China』, 미국 스탠포드 대학출판부, 2004.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역서
『유목사회의 구조』, 하자노프, 지식산업사, 1990.
『칭기스 칸: 그 생애와 업적』, 라츠네프스키, 지식산업사, 1992.
『유라시아 유목제국사』(공역), 르네 그루쎄, 사계절, 1998.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사계절, 2000.
『부족지: 라시드 앗 딘의 집사 1』, 라시드 앗 딘, 사계절, 2002.
『칭기스 칸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 2』, 라시드 앗 딘, 사계절, 2003.
『칸의 후예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 라시드 앗 딘, 사계절, 2005.

이희수
역서
『중동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 까치, 1998.
약력
- 이스탄불대학 역사학부 박사, 동 대학 역사학부 조교수 역임
- 튀니지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 사우디 제다 이슬람 교육센터 아랍어 이수
- OIC(이슬람회의기구) 연구소 연구원
- 사우디, 리비아, 이집트, 이란, 터키, 쿠웨이트 등지에서 33년간 현장연구 중
- 현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저서
『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 청솔, 2001.
『이희수 교수의 세계문화 기행』, 일빛, 2003.
『이희수 교수의 지중해 문화 기행』, 일빛, 2003.
『이슬람 문화』, 살림출판사, 2003.
『이스탄불-동서양 문명의 교류』, 살림출판사, 2004.
『터키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이슬람』(공저), 청아출판사, 2008.

성동기
저서
『21세기 유라시아의 도전과 국제관계』(공저), 한울아카데미, 2006.
『우즈베키스탄 불멸의 고려인 영웅 김병화』, 재외동포재단, 2007.
『한국어-우즈베크어 사전』(공저), 한반도평화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07,
『억지부리는 남자: 호자 나스레딘』, 써네스트, 2009.
『중앙아시아학 입문』(공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9.
『아미르 티무르: 닫힌 중앙아시아를 열고 세계를 소통시키다』, 써네스트, 2010,
약력
-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우즈베키스탄 국립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고려대학교 러시아-CIS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 현 부산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어과 겸임교수
- 현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연구교수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