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6년 동안 집에서 학교까지 가까우면 5분, 멀어도 10분 안 걸리는 데 살았는데, 통학 거리가 엄청 늘어났다. 1년에도 수백 번을 걸아다니다 보니 발짝 수를 가지고 거리를 재 본 것도 여러 번인데, 약 2.7 킬로미터로 기억한다. 처음 몇 차례는 고3인 큰형이 중1짜리 동생을 데리고 가며 지름길을 가르쳐주는 아름다운 광경도 있었지만, 혼자 다닐 만하게 되어서는 형을 먼저 보내고 슬금슬금 다니게 되었다.

"슬금슬금"이라고 하지만, 시간을 단축시켜 보려고 경보선수 흉내를 내고 다녔다. 이런 기록에 집착하는 것도 내 성격상의 한 가지 문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에 매여서... 학원사 백과사전을 외우려고 들 때부터 분명히 드러난 병폐다. 그래도 덕분에 걷기 취미는 지금까지 누리고 있고, 성장기의 건강에도 좋았던 것 같다. 비슷한 병폐를 가진 넘이 이준구였다. 그 친구랑 마주치면 무조건 전력질보였다.

온 길에 중고딩들이 깔리는 시간인데, 가다 보면 같은 방향 사는 또래들과 많이 마주치게 된다. 다른 반 애들은 등교길에서 안면 트는 일이 많았는데, 그중에 두드러진 애가 하나 있었다. 원남동 모퉁이를 돈 뒤에 길 건너오는 걸 가끔 마주치던 넘... 홍석현이었다.

합격자 발표 때 어른들 주고받는 얘기 중에 윤보선 아들도 떨어졌다더라, 홍아무개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붙었다더라, 하는 얘길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홍아무개가 누군지도 몰랐고, 원남동 네거리에서 마주치던 홍석현이가 그분 아들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냥 보니까 무지 잘난 애였다. 얼굴도 잘 생긴 데다가 행동거지도 또래들보다 으젓했고, 말 한 마디 해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야말로 군계일학의 느낌이었다. 그 친구랑 마주치면 괜히 재수 좋은 기분이었다.

버스는 부득이할 때만 탔다. 집에서 명륜동 정류장까지 700미터, 안국동 정류장에서 학교까지 600 미터, 버스를 타도 어차피 절반은 걸어야 하니 버스를 잘 타도 겨우 10분 절약이다. 더구나 그 시간대엔 버스가 꽉꽉 차서 다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게 많아서 잘못하면 걸어가는 것보다 더 늦기도 한다. 그러나 걸어가서 지각이 분명할 때는 운을 버스에 걸고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시절 만원버스... 몇 번 타면서 요령이 생기고는 가급적 고딩 누나들, 될 수 있는 대로 덩치 큰 누나들 곁으로 붙게 되었다. 안전하니까. 쬐끄만 중딩이가 늑대들과의 사이를 가로막아 주는 게 반가워서 만원버스 안에서 일으키기 쉬운 짜증을 고딩 누나들은 대개 참아주었다. 그리고... 누나들은 감촉도 좋았다. 중3 이후로는 아무리 지각이 분명해도 등교길에 버스를 타지 않게 되었다. 덩치가 커지니까 누구에게도 인내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중학교 수업은 점심 전에 네 시간, 점심 후에 두 시간, 하루 여섯 시간이었다. 세 시쯤 끝나 미술반에 가면 내 세상 같았다. 서로 놀리기도 하고 골리기도 하며 지내지만, 그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형제간과 같은 사이였다. 최 선생님이 키워주신 분위기 덕분이었다고 지내놓고 나서는 생각되는데, 인간적 존중이 철저한 곳이었다. 선배가 후배 혼내주는 거야 미술반 밖과 다름없는 당시 풍속이었지만, 변태적 재미를 위해 남을 괴롭히는 짓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교실 생활은 대개 지루했고, 가끔 괴로웠다. 힘도 약하고 말도 잘 못하고 공부도 별로인 나 같은 아이는 친구도 별로 사귀지 못하고, 그저 미술반 갈 시간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성적은 60명 중 20등에서 40등 사이를 완만하게 오락가락했다. 10등 안쪽의 우등생들과 50등 바깥쪽의 건달들을 모두 부러워하며 지내는 '말 없는 다수'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2학년이 되면서 가끔 발작적으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일 화려한 무대는 어느 날 주산 시간에 오늘은 암산을 할 테니 주판을 집어넣으라고 했을 때였다.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주고 답을 얻은 사람 손 들라고 해서 결과를 확인하는데, 갈수록 큰 숫자로 빠르게 하니까 손 올라가는 게 줄어들다가 중반쯤 되어 나 혼자만 남았다. 선생님도 놀라운 기색을 보이며 계속 등급을 높여 가는데 계속 혼자서 정답을 대니까 다른 애들한텐 구경거리가 났다. 그러다 한 문제 조금 자신 없는 대로 답을 얘기했다가 선생님이 틀렸다고 하자 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문제 잘못 읽어주신 거 아니냐고. '평민 영웅'의 맛을 그 때 처음으로 보았다. 늘 잘 나가던 아이가 아닌, 자기들 중 하나가 두각을 나타내니까 그렇게들 열광하는 것이었다. 그 한 시간을 편하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도 있었을 거고.

다른 애들이랑 다른 식으로 시간을 보내온 결과의 한 모퉁이가 어쩌다 학과 중에 삐져나온 것이었다. 골목에서 뛰어노는 데 잘 붙여주지 않으니까 혼자 앉아서 속셈을 하는 '취미'가 있었다. 2의 제곱이나 3의 제곱을 속으로 마냥 거듭해서 숫자가 머리속에서 가물가물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었다. 방해가 없으면 2의 30승이나 3의 20승 정도까지 보통 올라가곤 했다. 몇십억대 숫자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던 아이한테 몇만대의 암산은 정말 '아이들 놀이'였던 것이다. (이 취미를 군대 초년까지 지킨 생각이 난다. 그때는 2의 100승까지 올라갔다. 볼펜과 종이를 가지고.)

이 숫자 감각 때문에 과학자를 향한 나의 꿈은 더욱 굳어졌다. 말도 잘 못하고 이해력이나 상상력도 변변찮은 아이에게 뭔가 '꿈'이라고 가질 수 있는 것이 과학자 뿐이었다. 훗날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아들들을 과학자의 길로 유도하려고 꾸준히 애쓰신 것이다. 두 분의 경험을 통해 한국의 상황이 인문학을 제대로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절감하셨기 때문에 자식들이 '안전한' 방면으로 나가기 바라신 것이었다. 그래서 과학 방면으로 조금만 적성을 보이면 그것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나는 숫자 가지고 노는 능력 때문에 거기 딱 걸려서, 다른 길은 생각도 못해 보게 되었다.

혼자만의 취미생활이 학과 중에 삐져나온 모퉁이는 한둘 더 있었다. 우선 한문. 그때는 신문에도 한자를 쓰고 사람들이 한자에 지금보다는 훨씬 더 익숙할 때였지만, 초딩 때 <현토 삼국지>를 떼고 올라온 중딩은 별로 없었다. 한문 시간에 좀 어려운 한자 써볼 사람 있냐고 할 때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내 독차지였다. 영어도 중딩 수준과 전혀 다른 어휘력과 해석 능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문법 중심의 중딩 과정에서는 별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형들과 BOAC, SAS, IHI 같은 회사 이름이 뭐의 약자인지 맞추기 놀이를 하던 실력을 중학교 교실에서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어 성적도 별로였다. 고등학교 올라가 영자신문반원을 학년에서 세 명 뽑는 데 뽑히고 나 자신이 놀라는 것은 뒷날의 일이다.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초딩 때보다 크게 늘어나면서 가정생활은 줄어들었다. 저녁 식사 후 형제들이 어울려 노는 시간은 그래도 꽤 됐는데, 내가 형들 쪽으로 붙는 바람에 영아가 좀 쓸쓸하게 됐다. 내 초딩 말년부터 형제들 사이에선 바둑이 유행했다. 달력 뒷면에 사인펜으로 바둑판을 그려놓고 검은색과 흰색 단추를 한 상자씩 사달라고 해서 큰형이 학교에서 배워온 바둑을 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3형제가 다들 웬만한 적성을 보여서 몇 달 안 되어 3급 안쪽에서 서로 어울리게 되었다. 이 놀이에 영아가 적응 못한 것이 고독의 길로 접어든 가장 큰 고비였던 것 같다.

내가 2학년 올라갈 때 큰형은 서울공대로 진학하고 작은형은 경기고로 진학했다. 작은형도 미술반에 합류, 쉽게 적응해서 학교생활도 얼마간 공유하게 되었는데 큰형은 대학생이 되면서 얼마간 거리가 생겼다. 영어 만화책과 잡지는  공유를 계속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줄어들었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중학교로 갈라진 단계에서 3형제의 제일 큰 공유물은 바둑이었다. 학교 가면 미술반, 집에 오면 바둑과 만화책,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요즘 그 시절을 가끔 떠올리는 것은 영아를 볼 때다. 오빠들 중 제일 가까웠던 나랑도 거리가 커졌던 것이 걔한테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도 중학생이 되면서 내게는 새로 생긴 것이 많았고, 그것이 영아와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걔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별다른 내용이 아닌데도 잊어지지 않고 떠오르곤 한다. 내가 3학년 될 때 영아는 입시에 떨어지고 이대부중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아마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공주할머니도 그 무렵까지 우리랑 같이 지냈다. 연세가 높아져 기력은 줄어드시는데 집은 커졌으니 부엌일 해줄 분들은 새로 들어왔다. '남복 아주머니'와 '나영이 누나'가 번갈아 오랫동안 살림을 맡아주었다. 할머니, 아주머니, 누나, 지금 생각하면 다 고마운 분들인데, 그 분들 오고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나는 과학자 될 꿈만 꾸고 있었다. 삭막한 세월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