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선생이 1월 22일 별세한 소식을 일전에 들었다.

만난 지 10년도 안 된 분이고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것도 아니지만 내 인생에 큰 변화를 일으켜준 분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내게 고마운 것들이다. 그래서 나보다 7세 연하인 분이지만 내게 스승의 의미가 있는 분이다.

그분에 대한 생각을 앞세워 내놓기보다 그분과 함께 겪은 일들을 되돌아보며 음미해보고 싶다.

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가을이었다. 중국 가서 몇 년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북경으로 갈까, 상해로 갈까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근성 <프레시안> 당시 대표가 류 선생을 소개해 줬다. 조선족 언론인으로 매우 특이한 식견을 가진 분이니 만나보면 내 중국행에 관해 좋은 의견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뜻이었다.

한 번 만나보고 마음이 바짝 끌렸다. 말을 가볍게 하는 듯하지만 아주 탈속한 느낌을 주는, 스스로를 관조하는 자세가 투철한 분으로 느껴졌다. 연변 조선족사회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한국인이 중국을 바로 건너다보는 관점보다 조선족사회를 거쳐서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북경이나 상해 같은 곳 가기 전에 우선 연변에 가서 1년이라도 지내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관광을 가더라도 안내자를 중시한다. 눈으로 보고 통상적인 설명을 읽는 것보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내 마음에 궁금증을 일으켜주고 또 채워주는 사람이 있을 때 훨씬 더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니까. 연변 가서 지낼 결정을 내린 것은 말이 잘 통할 뿐 아니라 재미도 있는 이 사람이 안내자 노릇 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 후 (2002년 12월) 연변을 구경하러 갔다. 돌이켜 생각해도 류 선생이랑 인연은 참 순탄하게 풀렸다. 그 때 류 선생은 연변에서 출판한 책 <혈연의 강들>을 한국에서도 출판하기 바라고 있었는데, 검토를 부탁한 출판사의 하나가 돌베개였고, 내가 한 사장에게 전화로 의견을 말해준 후 거기서 내기로 결정, <만주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나오게 되었다. 한 몫 했다는 자부심 덕분에 연변 가서는 류 선생에게 뻔뻔스럽게 개길 수 있었다.

짧으면 1년, 길면 2년 지내려고 갔던 연변에서 푹 퍼져 버린 것은 이혼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나랑 사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미처 몰랐었다. 긴장감을 좀 느끼고 있었는데, 중국 가서 지내면 기분을 바꿈으로써 극복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도 함께 가서 지내겠다고 중국어학원에도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도 상해도 아닌 연변에 가서 지낸다니까 그 사람 인내력이 한계를 넘어버렸나보다. 이혼을 단호히 요구했고, 2003년 봄 이혼 수속을 밟은 뒤 연변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자신감이 평생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길 가서 아는 사람 없이 지내는 것이 그런 대로 마음이 편했다. 북경이나 상해로 옮겨갈 의욕도 사라지고, 연길처럼 외진 곳에서 번역으로 생계나 꾸리면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런 터에 류 선생과 그 주변 몇 분의 안내로 중국보다 조선족사회 자체에 대한 관심이 날로 깊어졌다.

2003년 3월 류 선생의 답사를 따라가 두만강변의 용연마을에서 이틀밤 지낸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3월 8일인가? 용정에서 만세사건 기념식을 마친 후 둘이 용연마을로 향했다. 화룡에서 시장에 들러 개고기 반 마리를 사 들고 용연마을 현씨 댁에 도착한 것은 이른 저녁무렵.

당시 70대 초반이던 현씨에게서 회고담을 채록하는 것이 류 선생의 답사 목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옆에서 보며 몇 번을 거듭 놀랐다. 제일 처음 놀란 것은 현씨가 류 선생을 너무나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 마치 집 나간 자식이 몇 해만에 돌아온 것 같았다. 한참 있다가 더 크게 놀란 것은 류 선생이 현씨와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자리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몇 해 전 류 선생이 두만강변을 걸어서 답사할 때 우연히 마주쳐 그 댁에 신세를 졌었고, 그 동안 간간이 전화로만 안부를 나누다가 이제 찾아왔다는 것이다.

필드워크 구경한 일이 꽤 있지만, 류 선생은 정말 타고난 사람 같았다. 조사 대상자와 완전히 한 식구가 되어 그 집에서 2박3일을 지냈다. 집은 널찍한 한 칸으로 되어 있고, 류 선생이 가져온 개 반 마리가 입구 곁의 가마솥에 우리 있는 동안 내내 들어가 있었다. 술 조심하는 류 선생에게 '술상무' 역할을 맡은 나는 술 좋아하는 현씨와 시도 때도 없이 술잔을 니눴다. 현씨가 특별히 준비해 둔 독한 술, 아마 70도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둘째 날 저녁무렵이 되니 몸 움직일 때마다 뱃속에서 백주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류 선생은 당시 인민출판사에 적을 두고 있다가 몇 해 후 연변대 조선어조선문학과 교수로 들어갔는데, 구술자료 수집자로서 그분의 뛰어난 능력에 탄복하고 있던 나는 그분이 가급적 다른 일보다 자료 수집 작업을 계속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중요성을 강조해주기 바빴다. 그러나 재간 많은 그분에게는 다른 일거리가 계속 나타나고 있어서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자료 수집 작업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비 신청서를 대필해 주기까지 한 것도 류 선생을 자료 수집 작업에 붙잡아놓고 싶어서였다. 신청을 권하는데, 연구비 신청을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해서 대신 작성해 줬다. 그 신청이 채택되어 몇천만원 비용이 확보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진행이 잘 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내가 류 선생께 권한 일은 그렇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분이 내게 권한 일은 대박을 터뜨렸다. 내 재혼을 성사시켜 준 것이다. 내 인생에 그분이 일으켜준 가장 크고 가장 고마운 변화인데, 검열을 의식해서 이 일에 관해서는 길게 쓰지 못하겠다. 아내가 좀 더 나이들어 면피가 두터워졌을 때라야 마음놓고 털어놓겠다.

2005년 10월 한국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어머니 형편을 뵙고 주저앉은 뒤로는 그때까지 하던 대로 만판 어울려 놀 일이 없게 되었다. 내가 잠깐씩 연길 다니러 갈 때, 그분이 한국에 볼일 보러 올 때, 틈을 내어 밥 한 끼씩 함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재작년 항암 투병을 시작하고서는 가까이서 지내더라도 술자리 함께 할 일은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병을 잘 이겨내고 언제고 내가 연길에 돌아가면 싱거운 농지거리에 짭짤한 식견을 섞어 흘려보내는 편안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분이 세상 떠난 소식을 들었다.

무심코 적다 보니 "연길에 돌아가면"이라고 썼다. 연길이 내게는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류 선생 없는 연길.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줄어들어 있다. 고향을 고향답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류 선생의 그런 사람의 하나다. 고향뿐이랴! 이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답게 만들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언제고 연길에 돌아가면 나는 다시 고향을 느낄 것이다. 그 고향 느낌 속에는 류 선생이 이제 추억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고마운 분. 아쉽게 너무 일찍 떠났지만, 세상 누구 못지않게 보람이 가득한 한 생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