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에서 살게 되고도 집밖에서의 내 존재양식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입성은 "네모 안의 네모" 수준을 지켰고, 돈은 명절 때나 만져보는 것이었다. 아, 돈! 학교 앞 가게나 노점에서 군것질 사먹는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학교에서 나와 그 구역을 지나가는 동안에는 마음의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5학년이 된 후 학교 성적이 분단장급까지 올라섰다. 100명 반에서 10등 안에 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분단장은 대개 성적 순으로 나눠주는 건데, 나는 그 범위에 겨우 들게 되었지만, 성격이 소심하고 붙임성이 없는 데다가 지난 4년 동안 해먹어 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잘난 애들이나 하는 거라 치부하고 교실 한 구석에서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하면서 존재감 없이 지낼 뿐이었다.

잘난 넘들 보면서 주눅드는 인생을 5년째 지내 왔지만 5학년 때 반장넘은 해도 너무했다. 1300명 가운데 1등을 자기 전유물로 여기는 넘이었으니...  우리 집 저 아래쪽에 명륜동1가 시절 우리 단칸셋방 비슷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던 넘이니 치마바람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넘 이름이 이준구인데, 지금 서울대 경제학 교수 노릇 하고 있다. 초년의 가난이 정운찬 못지 않았던 넘인데, 그걸 코에 걸고 살지 않는 게 신통하다.

드디어 6학년이 되고 석차가 반에서 5등 안에 들게 되니 경기중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큰형은 경기중에서 경기고로 올라가 있었고 작은형은 경기중에 떨어져 동성중에 다니고 있었다. 동성중학 출신으로 동성중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고종 기돈 형님의 후광까지 겹쳐 그 학교에서는 스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시 2차 남학교로는 동성과 대광의 끝발이 제일 좋았다.) 아무튼, 집안의 실적으로 보면 경기 합격 확률이 반반이었다.

그런데 쿠데타가 일어났다. 내가 군사정권 미워하는 데는 내 진학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적인 원한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는 각 학교가 각자 시험문제 내고 알아서 채점해 뽑았다. 그런데 군사정부는 전국 모든 중학교에 공동출제를 실시했다. 이것까지는 큰 불만 없다. 체력 실기를 넣어 엄청나게 큰 비중을 두게 한 게 문제다. 학과가 150점에 체력장이 25점. 나처럼 몸이 약하고 굼뜬 놈에게는 재앙이었다. 학과도 공동출제를 하니까 경기 같은 학교에선 변별력이 크게 줄어드는데, 체력장에서 혼자 20점이나 까먹고 어떻게 경쟁에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얘기를 하다가 적은 적이 있지만, 이 체력장 쓰나미에 몰려 경기중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집 가까운 보성중학으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성적이 반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참에 체력장 완화 소식이 날아들었다. 25점 중 5점을 참가만 하면 기본점수로 준다는 것이었다. 체력장의 손해가 4점 가량 줄어든다는 얘기였다. 이 4점이 결국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기중 커틀라인이 149점이었는데, 내 득점은 153점이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하고(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경기중학에 원서를 넣어 요행히 합격했다. 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냥 보성으로 갔다면, 또는 경기에 떨어져 동성으로 갔다면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전국의 열두 살 어린이들에게 이런 끔찍한 고비를 만들어주던 야만스러운 풍토... 지금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학과 150점 가운데 9점을 깎였고 체력장 25점 가운데 13점을 깎였다. 당시 체력장에서 5점 이상 깎일 학생은 경기중학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기 입학생 420명 가운데 지체장애자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군사정권의 야만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정책의 하나였다.

그런데 학과만으로는 내 점수가 합격자 중에서도 몇 등 안에 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중학교 내내, 그리고 고딩 초년까지도 나는 커틀라인을 살짝 넘어 요행으로 마름모 명찰을 달게 된 넘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낙제 위험 안 느끼고 지내는 것만 그저 다행이었다. 고3 때 난 데 없이 전교 1등을 밥먹듯이 하게 되어 "내가 왜 이럴까?" 어리둥절해 할 때 한 친구가 말해줬다. "넌 중학교 들어올 때부터 베스트 텐(전교 10등 안쪽)이었잖아?"

중학교 입학시험이란 것이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나친 압박이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입시 준비는 훗날처럼 혹독한 것이 아니었다. 6학년에게도, 재수생에게도 "Life goes on."이었다. 경기 가면 더 좋은 일이지만 보성이나 동성 간다고 해서 아주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나도 어머니도 하지 않았고 일반인들도 대개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좋은 학교 진학은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기쁨이지만, 그 실패를 인생의 좌절로 여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명륜동으로 이사한 후 집에 피아노를 들이고 레슨도 받았다. 어머니가 좋은 옷은 안 사주셔도 애들 영양공급에는 사정이 힘들 때도 기준을 엄격히 지키셨는데, 돈 걱정 않게 되니까 마음의 영양도 생각하시게 된 결과였겠다. 형들은 시작하기에 너무 늦어서 제쳐놓고 영아와 나를 위해 피아노를 장만하신 건데, 피아니스트로 키울 꿈도 혹 영아에게는 꾸셨을까? 내게 대해서는 척박한 정서를 걱정하셨던 게 분명하다. 한 번 어떤 색깔이 제일 좋으냐고 물으시는데 "회색이요." 내가 대답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씀을 나중에 하시곤 했다. 그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세계문학전집을 섭렵한 뒤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였으니까.

명륜1가, 전에 살던 집 근처의 선생님 댁에 레슨 받으러 다녔다.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 세상 모든 선생님이 이 분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생님만 좋다고 레슨 성과가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몸치란 사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확인되어 있던 사실이지만, 이 레슨을 통해 음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몸치 겸 음치. 대학 이후로는 둘 다 벗어났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장애자는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성장과정의 심리상태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그 문제가 표현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글을 제법 쓰게 되고도 말하기는 그보다 영 힘들어하는 문제. 음악을 많이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 36세 때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유럽의 동료 연구자들과 좋은 친구관계를 맺고 지내게 되었는데, 한 친구가 지적해 준 일도 있었다. 자네만큼 교양을 갖춘 사람이 왜 음악을 그렇게도 즐기지 못하냐고. 음악을 교양의 기본으로 여기는 유럽 친구들에게 기형적인 문제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크게 만회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결함이 내게 어떤 문제를 파생시킬 수 있는지는 늘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