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은 대단한 집이었다. 오늘은 생활 얘긴 접어두고 집 얘기만 적겠다.

명륜동 3가 33번지. 이 집에 사는 동안 결혼해서 분가했기 때문에 내 본적이 번지수도 멋진 이 주소로 되어 있었다.

명륜동 입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성대 정문 앞을 지나 3백 미터 가량 지점에서 왼쪽 비스듬한 골목으로 150 미터 가량 들어가 왼 쪽 작은 골목의 끝집. 성대와 담이 붙어 있는 이 집에 이사를 들어가면서 나는 내 눈을 믿기 어려웠다. 180여 평의 대지 중 허름한 별채가 들어앉은 남쪽 끝 40평 가량은 울타리로 막혀 있었는데도, 나머지 땅만 해도 너무나 광활했다. 북쪽 모퉁이의 대문과 건물 사이의 정원만 해도 흔치 않은 규모인데, 건물 앞쪽으로는 완전히 운동장이었다. 혜화동 집에서 우리 자랑거리였던 은행나무보다도 더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정원 모퉁이와 운동장 모퉁이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일본식 목조건물 안에 들어가면 더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응접실, 그리고 앞을 가로지르는 복도 남쪽으로 건너방, 대청, 안방, 널찍널찍한 방들이 늘어앉아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왼쪽 복도와 나란히 2층의 조그마한 두 개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오른쪽 복도는 북쪽의 조그만 '식모방' 앞을 지나 서쪽 끝의 부엌과 욕실로 이어졌다. 42평의 건평이 요새야 별 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대궐이었다. 이만한 크기의 집은 당시 서울 시내에 아마 몇백 호 안 되었을 것이다.

50년대 후반 서울 인구 증가에 따라 새로 도시화된 지역의 하나가 정릉리였고, 값이 오른 밭을 팔아 이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지낸 뒤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어머니는 형편이 되자 아이들이 자라날 안정된 장소를 구한 것이었다. 이사 당시 큰형이 고1, 작은형이 중1, 내가 초5, 영아가 초3이었다. 어머니는 86년 정년퇴직 하신 후 이듬해에 이 집을 성대에 팔았다. 2000년경 동숭동에서 지낼 때 산보삼아 그쪽을 지나다 보면 건물을 그대로 두고 성대에서 고시생 합숙소로 쓰고 있었고, 연전에 성대 강연하러 갔을 때 지나며 보니 건물이 철거되어 있었다.

골목에 나가 애들이랑 뛰어놀 나이가 지나기도 했지만, 나가 놀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애들을 끌어들여 놀 때가 많았다. 이사 후 얼마 지나 북쪽의 정원을 치우고 탁구대를 놓았다. 아직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대단한 호강이었다. 정릉리 땅값이 오른 덕분에 우리 집은 돈 걱정이 필요 없는 극소수의 범위에 들게 된 것이었다. 피아노, 냉장고, 텔레비전 등 당시에는 흔치 않던 물건들이 우리 집을 채워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들이 돈을 만지게 하지 않았고 지나친 사치를 경험하지 못하게 했다. 학교에 가면 언제나와 같이 우리는 없는 집 아이들이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고갯길을 넘어오다가 한 아이가 너희 집이 어디냐고 묻기에 마침 건너다보이는 집을 가리키며 "저기, 성대 모퉁이에 있는 2층집이야. 은행나무 두 개 사이에." 했더니, 이 아이 눈이 둥그래져서 다른 애들한테 "야, 이 자식 얌전한 놈인 줄 알았더니 뻥이 되게 심한 놈이었구나." 하고 분개해 마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렇게 돈을 모르고 자라난 것이 훗날 가난뱅이가 될 조건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가난뱅이 신세도 과히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밑천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널찍한 집으로 옮김에 따라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책이 늘어난 것이었다. 전쟁 중에 책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남은 책이 정릉 집의 골방 하나를 채우고 있었는데, 이것이 모두 넘어왔다. 책이란 것은 모두 읽을 수 있는 것이라던 생각을 나는 바꿔야 했다.  그러나 읽을 만한 것도 있었다. 가장 심대한 영향을 내게 끼친 책은 <임꺽정전>. 의형제편과 화적편 세 책씩 여섯 책이 있었다. 몇 번을 거듭 읽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와 내 문체에 통하는 점이 있다는 평을 더러 듣는데, 부자가 함께 벽초 문체에 영향받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책 얘기 나온 김에 명륜동 초기의 독서 얘기를 조금 붙인다. <임꺽정전>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을 들인 대상이 <삼국지>였다. 집안에만 몇 가지 판본이 있어서 이 판본 저 판본을 보다가 나중에는 영창서관 판 <현토 삼국지>까지 읽어냈다. 한문에 토씨만 붙인, 당시의 초딩이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의 책이었지만, 내용을 바싹하게 익혀 놓은 책이기 때문에 어림짐작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내 한문 읽기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영어 만화책. 미군부대에서 암시장으로 흘러나오는 품목의 하나가 책이었는데, 책이 많지 않던 당시에는 지식시장에서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 큰형이 영어 공부를 위해 만화책 중 점잖은 편의 것을 사다놓곤 했는데, 만화가게에서 보던 애들 만화와는 수준이 다른 물건이었다.(Jughead와 Archie, 그리고 Dennis the Menace 시리즈, 월트 디즈니 만화들이 제일 분량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ABC를 배우기 시작한 중1 때부터 그림을 보고 스토리를 상상해 가며 이것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가운데 영어 어휘력과 독해력이 저도 모르게 늘어나, 아직까지도 밥벌이의 보루로 버티고 있다. 한글이든, 한문이든, 영문이든 닥치는 대로 부딪쳐 가며 익힌 것이 언어능력을 확보하는 데는 나름대로 효과적인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큰형의 영어 수준이 높아지면서 만화책이 잡지책으로 바뀌게 된다. National Geographic, Popular Science, Popular Mechanics 등. 나도 큰형 수준을 바짝 뒤따라다니며 이 잡지책들을 소화해 냈다. 중학교 때는 이런 영어 공부의 표가 별로 나지 않았다. 고딩이 되고 보니 그 날고 긴다는 경기 애들 틈에서도 독보적인 차원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잡지에서 접한 내용을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도 넓혀졌다. 세계문학전집에 묶여 있던 혜화동 시절을 벗어나 세속적 글읽기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형들이 있다는 것이 바지를 물려입을 때는 행복한 일이 아니었지만, 길을 헤쳐준다는 점에선 좋은 면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