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의 조선인들은 어떤 시대적 과제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범위를 좁혀서, 대원군 집정기(1864~73)에 지식층의 인식은 어땠을까? 19세기 전반기 내내 조선 정치를 지배한 세도정치의 폐단이 당시 지식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교 교양을 갖춘 지식층에게는 유교 정치이념에서의 일탈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중세사회 해체 같은 문제는 나라꼴만 바로잡히면 저절로 해소될 일상적 문제 정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 중 조세 개혁은 부패의 척결에, 경복궁 중건과 공포정치는 왕권 회복에 목적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교국가 질서 회복의 의미가 큰 방향들이다. 서원 철폐는 특권구조의 청산으로서 같은 방향으로 더 적극적 의미를 가진 정책이었다. 대원군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유교국가의 중흥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외관계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내내 대외관계의 거의 전부가 중국과의 관계였던 상황이 고종 즉위 직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제 2차 중영전쟁으로(1856~60) 북경이 유린당하면서 대외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일어났고, 열강들이 조선을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조선에 대한 직접 압력은 크지 않은 단계여서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차단시켜 놓은 채 국내 개혁을 계속했다.


대원군의 개혁은 상당한 가시적 성과를 거둔 데 비해 지식층의 호응을 통한 개혁세력의 확장에는 실패했다. 개혁이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면 독선적이고 편의적인 경향에 빠져 개혁 이념의 발전을 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세력의 성장과 확대가 불가능하다. 드러나 있던 개혁의 명분을 권력 투쟁에 이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념의 발전이 없으니 개혁을 위해 끌어 모은 세력 속에서 확보해 놓은 권력을 놓고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민 씨 세력은 그래서 대원군 세력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것이었다.


1870년대 들어 일본의 조선 진출 노력 강화에 따라 쇄국정책이 한계를 보이면서 대원군의 실각을 재촉했다. 그러나 조선 지식층의 ‘개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미했다. 당시 조정의 개화파 지도자이던 박규수만 하더라도 서세동점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도 ‘수시변통(隨時變通)’ 정도의 조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해의 1차 수신사 이후 4년 후에야 2차 수신사를 일본에 보내게 된다.


1876년 이후 일본의 바뀐 모습을 보며 개화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이 확대-심화되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에도 진지한 관심이 일어났다. 개혁의 명분이나마 내걸었던 대원군 정권보다도 퇴행적인 민 씨 정권 아래 유교국가 중흥을 위해서라도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일본과 청나라의 문물 발전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겹쳐졌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이 주목받고 이듬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중국에 보내면서 조선에 ‘개화’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개화의 목적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을 둘러싼 민 씨 세력은 개화에서 이권과 군사력이라는 피상적인 이득만을 취하려 했다. 핵심인물 민영익은 이런 입장에서 일시 개화파의 영수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관료-지식층에서는 그보다는 개화의 의미를 넓고 깊게 보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움직임에도 개화를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곁들여졌다.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 온건 개화파가 일본 메이지유신보다 청나라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은 것은 권력구조의 변동을 추구하는 급진 노선이 권력 쟁탈의 도구로 이용당할 위험을 꺼린 데도 큰 이유가 있었다.


한편 대원군 세력은 일반 국민의 개화에 대한 반감과 변화에 대한 불안감에 편승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1882년 임오군란 시점의 대원군은 1874년 이래 권력 탈환에만 집착하면서 시대 상황에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황 관리 능력도 청나라 측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반일’을 표방하면서도 축출되었다. 당시 청나라 외교를 장악하고 있던 양무파에게는 ‘반일’ 여부보다 개혁 거부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청나라의 임오군란 개입은 조공관계를 명분으로 한 것이었지만, 원론적 의미에서는 천하체제를 스스로 부정한 행위였다. 조선의 상황을 단기적 이해관계에 활용하려는 양무파 정책은 전통 체제를 포기하고 일본과 같은 차원의 경쟁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이로써 천하체제를 배경으로 전통 체제의 회복을 지향하던 온건 개화파가 입지를 잃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양측의 입지와 명분이 모두 훼손된 상황에서 개화 이념 발전의 길이 막힌 채 민 씨 세력의 피상적이고 편의적인 개화만이 진행되다가 청일전쟁을 맞았다. 이로써 촉발된 갑오개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조선 지식인-관료층의 주체적 개화 노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된 사례였다. 그러나 권력쟁탈전의 양상이 곧 되살아나고 일본의 대 조선 강경파가 책동해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연이어 일어남에 따라 조선 지식인-관료층의 정치적 역할이 사라져 버렸다.



19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근대화’가 지상과제였다고 지금의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는 이 과제에 대한 인식이 ‘개화’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당시 상황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얻은 것이지만, 이후의 역사 진행에 좌우된 측면도 있다. 1930년대에 군국주의 문제가 불거질 때까지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로 간주되었다. 조선 지식층이 1876년 개항 때부터 일본을 개화의 유력한 모델로 인식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청일전쟁의 진행을 목격하면서 일본이 권하는 개화를 절대적 기준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개화의 필요성은 조선에서 중세사회의 해체라는 내부적 변화보다 외부 변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식되었다. 내부적 문제는 개화와 관계없이 왕조 체제의 유교 질서만 회복되면 당연히 해결되리라는 것이 1894년까지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개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면 저절로 해결될 부수적 문제로 보았다. 내부적 위기와 외부적 위기를 구조적으로 결합하는 인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개화정책 중에는 물론 내부적 변화를 꾀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변화 결과가 좋아보여서 그대로 모방할 뿐, 조선 자체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겉보기 변화는 따라 하면서도 ‘권력의 사유화’라는, 근대적 기준과 전통적 기준 어느 쪽에서 봐도 국가구조를 악화시키는 변화가 대한제국까지 계속된 것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운동은 내부적 변화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목적의식이 박약하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의미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지던 실학의 현실 인식 노력이 개화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정치의 수준을 너무 떨어뜨려 놓아서 사회경제 현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1868년의 대정봉환에서 1889년의 헌법 발포까지 20여 년 동안 외부 상황에 크게 휘둘리는 일 없이 새 국가체제 건설의 길을 주체적으로 모색해 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 자체의 사회경제 조건이 근대국가 건설의 기반조건으로 검토되었다. 일본의 개화는 일본에 적합한 근대화의 길로서 시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었음에 반해 조선의 개화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소극적인 ‘선택’의 대상일 뿐이었다.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를 가르는 이유로 나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본다. 첫째는 일본이 먼저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조선이 그 길을 독자적으로 찾아갈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판자촌의 한 집에 불이 나면 옆집에서 따로 불이 나기 전에 옮겨 붙게 마련이다.


서양 열강들은 조선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중 가장 이해관계가 컸던 러시아에게도 부수적인 의미에 그쳤다. 오직 일본만이 조선에 거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을 그냥 놔두지를 못했다. 그 때문에 조선은 일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진로 모색의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또 하나 이유는 조선의 유교정치 체제가 안정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푹푹 썩기는 했어도 틀은 멀쩡했다. 일본은 수준 낮은 정치체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근대유럽이 제시하는 틀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적었던 반면, 조선에게는 수준 높은 질서 체제로부터 약육강식의 미개한 틀로 내려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유교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던 중국은 어떠했는가. 조선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버린 단계에서는 신문화운동이라는 주체적 반성의 기회를 가졌다. 그 후 중국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놓고 좋고 나쁘고를 평할 기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지금의 중국이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자기 장래를 남의 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역량으로 헤쳐 나갈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자세의 근거가 191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1900년대에 강유위, 양계초 등 중국의 개혁가들은 일본을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거꾸로 1950년대의 일본 좌파 지식인들은 전쟁 가해자의 길을 걷지 않고 공산국가를 이룩한 중국을 부러워했다. 그 후 문화대혁명의 질곡에 빠진 중국인들을 번영 속의 일본인들이 동정했으나, 지금은 다시 부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1910년 이후 어느 때도 의미 있는 상대로부터 부러움을 산 일이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