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ining Progress And Continuity / 진보와 연속성의 두 마리 토끼
세 번째 불균형은 중국이 지배 담론 속에서 당당한 자리를 찾고자 하는 희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명확히 설명하기 힘든 문제인데, 중국인이 원하는 진보와 연속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것을 나는 제안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11년 혁명 전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이 결합을 추구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동양의 선진성을 오랫동안 대표해 온 중국문명이 서양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새 생명을 얻기 바랐습니다. 중국의 학인들이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 나타나는 창조성에 탄복한 하나의 층위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층위에서는 서양의 과학적 성취와 유럽의 부강을 가져온 역동성에 대한 더 깊은 찬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유럽인의 여러 관점, 특히 통치와 정치 참여의 영역에 대한 관점들은 소화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1920년대 5-4운동 때부터 중국 지도자들 사이에는 서양으로부터 어떤 것을 꼭 배워야 하고 자기네 전통 중 어떤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할지를 두고 심각한 의견 차이가 일어났습니다.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지는 사안을 놓고도 무엇이 더 급하고 무엇이 덜 급한지 생각이 갈렸습니다. 민국시대(1911-1949)를 통해 여러 정치단체와 새 세대 지식인들 사이에 공개적 토론이 진행되었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은 참혹한 내전의 혼란 속에서 먹고살기 바빴습니다. 중대한 결정이 필요한 상황인데, 어느 단체나 조직도 길을 열어갈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새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완전한 몰락을 피하기 위해 근대화가 꼭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문화 쇄신의 과정에서 중국 자체의 전통을 어디까지 남겨둘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그래서 중국문명의 전통적 핵심 가치를 근대화하느냐, 아니면 서양에서 문명의 판별 기준으로 삼는 중심 명제들을 채용하느냐, 두 가지 선택지로 좁혀졌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서양을 따르자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보아 인기있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다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서양화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나아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1920년대 중엽까지 대다수 사람에게 매력적이고 납득할 만한 두 가지 방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산업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향하는 민족주의 노선이었습니다. 사업가 계층, 특히 연안 지역과 큰 강 유역에서 활발하던 서양인의 기업에 밀착된 사람들이 이 노선을 지지했습니다. 서양 정치계에서 유행하던 민주주의도 이 사람들은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중국공산당원들은 계급사회를 지향하는 이 노선에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중국을 분열시켜 멸망의 문턱에 끌고 온 제국주의와 똑같은 것을 자본주의가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다가는 중국의 농업경제가 참혹한 피해를 입을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사회주의 좌파가 표방하는 국제주의에 따라 반-자본주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쪽 다 말로는 중국의 전통적 권력투쟁 양상을 내세웠지만, 지도적 인물들은 서양 모델에 믿음을 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쪽을 자본주의 방식에 입각한 유럽중심주의-A형, 사회주의 방식에 입각한 그 반대쪽을 유럽중심주의-B형으로 부르겠습니다.
이로부터 비롯된 내전은 격렬한 양상을 보였고, 일본과의 전쟁(1937-1945) 동안에도 대립이 계속되었습니다. 중국 인민에게는 평화롭고 현실성 있는 균형이 가능했으면 좋았겠으나 이 대립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본 패퇴 후 4년 만에 국민당이 격퇴되고 중국은 유럽중심주의-B형의 사회주의 깃발 아래 재통일되었습니다. 인민이 좋아하든 말든 러시아혁명 후의 동유럽 소비에트 방식 국제주의 모델을 향한 길이 열렸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 국제주의는 하나의 환상이었고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식 소비에트주의의 대안으로 대약진운동을 제창했습니다. 그 결과 당내 투쟁이 벌어지고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운동에는 서로 모순되는 강령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급진적 변혁을 제창하면서 전통적 평등주의 구호를 외치는 식이었습니다. 그 결과 경제가 파탄에 직면했습니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마오쩌둥의 실험을 굳이 설명하자면, 진보주의와 전통적 가치를 결합하려는 시도의 실패였습니다.
실패의 가르침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은 후 덩샤오핑은 공산당을 해방 직후에 세웠던 원래의 경제발전계획으로 되끌고 갔습니다. 중국을 세계시장경제에 접속시키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덩은 세계를 놀라게 한 수십 년간의 고속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그 다음은? 경제개혁이 인민의 환영과 지지를 받던 바로 그 시점에 중국 지도자들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명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재균형을 향한 또 하나의 명제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진보적 사회주의에 중국문화 중 사회주의 목표에 적합한 요소들을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세우는 특색을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아도, 중국 정치 전통의 핵심 가치를 재확인하는 노력이었습니다. 중국의 특색을 빚어 온 역사에 접속하면서 이제 사회주의는 남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변화를 사회주의적 진보의 성과로 이해한다면, 중국은 유럽중심주의 편향성에 굴복하지 않고도 세계사의 진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국 특색은 미래의 변화과정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현대사의 가장 특출한 변화 중 하나의 주체로 중국이 세계인의 눈에 비쳐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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