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유시민 선생에게 보낸 메일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난 주 "썰전" 보다가 탄복했습니다. "사대" 이야기 하는 걸 보면서. 나는 끄집어내기가 그렇게 힘든 얘긴데 유 선생 천연덕스럽게 꺼내는 걸 보며 유 선생을 '국민소통비서관'으로 채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답니다.
​근년 들어 이제 공부는 작작 하고 공부해 놓은 걸 풀어놓는 데 주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공부하는 거보다 더 어려운 거 같을 때가 많네요. 현실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공부한다는 방침 덕분에 쉽게 눈이 가지 않는 새로운 시각을 꽤 잡아낼 수 있었는데, 그런 걸 풀어내기 위한 접점을 너무 소홀히 해 왔어요.
​그래서 세상에 꼭 내놓고 싶은 얘기 중 유 선생도 수긍할 만한 것을 "사대" 이야기처럼 유 선생 입을 빌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유 선생에게 보이고 싶은 얘기는 열심히 보내겠습니다.

유 선생에게 받은 답장은 이런 말로 시작했다.

선생님, 제가 사실은 스스로 비공식 '국민소통비서관'이라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답니다.^^

6월의 “천하” 워크숍을 위해 준비한 한-중 간의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에 관한 발제문을 유 선생에게 보여준 일이 있는데, 그 일부 내용을 “썰전”에서 꺼내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과 청나라를 이간시키기 위해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폄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사대주의’란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이 사회의 통념이다. 나는 이 통념의 발판이 되는 ‘국가주권’의 관념에 근대인의 불건전한 편견이 곁들여져 국가 간 경쟁과 대결을 지나치게 부추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한 이웃나라와 잘 지내기 위해 약소국 입장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과거에도 잘못된 일이 아니었고 장래에도 필요할 경우 충분히 취할 만한 노선이라는 생각이다. 국가주권을 아끼기는 아끼되 너무 집착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공개하면 ‘사대주의자’라는 융단폭격을 맞는다. 우리 사회에는 융단폭격이 너무 흔하다. 나는 융단폭격을 잘 맞는 편이다. 몇 해 전 북한의 3대 세습 논란이 일어났을 때 3대 세습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선거민주주의에 절대적 당위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를 꺼냈다가 ‘종북주의자’로 몰매를 맞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금년 들어 김정은의 역할에 이 사회의 기대감이 커지는 것을 보며 금석지감이 든다.
사회의 통념과 어긋나는 생각을 내놓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유 선생이 많은 시청자에게 통념을 되짚어보도록 스스럼없이 권하는 것이 신통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좋은 생각을 키워내는 것보다도 그런 생각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할 수 있는 ‘소통’이 더 중요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주 신영복 선생 얘기 중 유 선생과 함께 만난 자리를 언급했는데, 그와의 관계도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활동범위가 가장 넓은 사람의 하나고 나는 가장 좁은 사람의 하나인데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울리게 되었을까, 누구라도 궁금해 함직한 일이다. 유 선생처럼 잘 알려진 인물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이곳에서 처음 마주치는 독자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에 좋은 길일 것도 같다.



2008년 여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돌베개 출판사 앞에 차를 세워놓고 건물로 향하는데 나오던 사람이 흠칫 멈추더니 말을 걸어왔다. “김기협 선생님 아니세요?” 보니 유시민 선생이었다. 1998년 독일에서 막 돌아온 그와 함께 1년간 함께 일한 이래 꽤 가까운 사이로 지내다가 그가 정치계에 들어간 후 안 보고 지내던 끝에 5년 만에 만난 것이다. 그 뒤로는 대략 한 달에 한 번씩은 얼굴 보며 지내게 되었는데 그 중간에도 참여당 일 한창 할 때는 2년쯤 공백기가 있었다. 꼭 안 봐야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아닌데, 정치하는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게 내 체질인지.
1998년에 함께 한 일은 “삼성그룹사” 연구프로젝트였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래 “다 바꿔!” 개혁 분위기가 거센 데다 외환위기를 맞아 종래의 자화자찬 식 기업사와 다른,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설정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를 맡기로 하고 공동연구자를 물색하는데 주변의 여러 사람이 유 선생을 추천해서 함께 하게 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제출한 우리의 작업성과는 출판도 공개도 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히 연구비 반납 요구는 없었다. 여러 해 지난 후 삼성이 무슨 일로 뒤숭숭할 때 둘이 지난 일을 얘기하다가 유 선생이 한 마디 탄식조로 말한 일이 있다. “우리 보고서를 뭉개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런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요.”
작업성과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내게는 유 선생을 친구로 얻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거리를 두고 볼 때는 사람의 능력만 관찰하기 쉽지만 1년간 함께 일해 보면 인품을 알아볼 수 있다. 유 선생이 정치하면서 ‘싸가지’ 논란에 종종 휩싸일 무렵 어느 기자들 모임에 강연하러 갔다가 뒤풀이 자리에서 유 선생의 어떤 점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에요.” 했더니 모두들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한 분이 민망한지 덧붙였다. 유 선생이 싸가지 있는 사람인 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당시 퍼져 있던 이미지와 너무 반대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재미있어서 웃은 것이라고.
그렇다. 내가 유 선생을 친구로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물론 재능도 뛰어난 사람이지만 재능은 내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친구에게서까지 재능을 찾을 필요가 없다. 1년 함께 일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여러 사람을 배려하는 자세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억지로 착하게 살려는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정치를 하면서는 그 착한 본성을 발휘할 길이 너무 적었던 것 같다. 그만둔 게 정말 잘한 일이다. (유 선생이 참여당 일에 매달려 있을 때 <프레시안>에 그를 향한 공개편지를 올린 일이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261)



나는 20년간 유 선생을 ‘친구’로 대해 왔는데, 그도 나를 친구로 대해 온 것일까? <김기협의 페리스코프>(2010, 서해문집)에 그가 붙여준 추천사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가 열 살이나 아래인 나를 ‘친구’로 여기면서 글을 부탁했다. 한편으로 흐뭇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런 감정을 달래려고 나는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를 ‘선생님’으로 깍듯이 모신다. 그의 역사관과 인생관이 내 것과는 사뭇 다르지만, 역사와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배우는 것이 많으니 ‘선생님’으로 모셔도 억울할 것이 없다.

처음 만나던 50세와 40세 때에 비해 70세와 60세가 된 지금은 열 살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친구’ 관계로는 비대칭성이 큰 사이다. 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던 비대칭성 하나는 내 쪽에서 늘 먼저 말을 걸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메일 보내면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을 하고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든 틈을 내려 애를 쓰니 관계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근래 들어서는 인간관계의 대칭성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서 더 마음이 편해졌다.
모든 인간관계의 대칭성을 원칙으로 보는 관점이 근대인의 일반적 편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존재다.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어울리자면 그 관계가 들쑥날쑥한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대칭성의 관념에 얽매이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틀에 박힌 관계만 맺게 된다. 그러다 보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맛과 힘이 사라진 세상이 된다.
지난 달 만났을 때 새로 나온 책 <역사의 역사>를 주면서 사인 위에 “부끄러운 책을 드립니다.”라고 적어주었다. 사람마다 책 주면서 적는 멋진 말이 몇 가지씩 있는데 내게 적어준 말은 자주 쓰는 게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을 내게는 몇 해 전에도 적어준 일이 있다. <나의 한국현대사>(돌베개, 2014)다. 편지 형식으로 쓴 그 책의 리뷰 끝에 나는 이렇게 썼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8805)

속표지 사인 위에 "부끄러운 책을 드립니다." 하고 적었군요. 마음에 없는 말 잘 못하는 유 선생인 만큼,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아니면 부끄러움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적은 말씀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얼른 읽고 떠오른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해 봤어요. 더 얘기할 것들이 많겠지만, 이 편지가 실마리가 되기 바랍니다.

나는 유 선생을 ‘공부하는 사람’[學人]으로 본다. 그가 “지식소매상”을 표방할 때 나는 가끔 “당신은 체질이 영업직보다 생산직인데 소매상은 안 어울려.” 하며 업종 전환을 권하곤 했다. 요즘 “작가”로 간판 바꾼 것을 그 취지에 제법 따른 것으로 본다. 내가 ‘학인’ 감투를 씌우면 그는 “저는 공부 포기한 지 오래된 사람이에요.” 손사래를 치지만, 자신의 한 면모를 인정받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고 또 그런 면모를 잘 지키고 키워나갈 자극도 받는 것 같다.
학인밖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학인이기도 한 유 선생과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 재미도 있고 실속도 있다. 나는 ‘국민소통비서관’의 무료봉사까지 받게 되지 않았는가. 물론 그는 나 한 사람의 비서관이 아니라 온 국민의 비서관을 자임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공용 비서관은 먼저 부려먹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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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