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공룡의 고민

기사입력 2009-02-16 오전 7:59:18

공룡의 고민

지금으로부터 6500만 년 전, 백악기 말기의 지구는 공룡의 세계였다. 이 거대한 파충류는 그때까지 1억6000만 년간이나 지구의 표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룡이 사라졌다. 공룡의 퇴장에는 불과 100만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00만 년이라면 지질학상 '눈 깜짝할 순간'이다.

공룡의 급격한 절멸(絶滅)은 오랫동안 지질학계의 큰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에 가장 그럴싸한 해답을 10년 전 버클리 대학의 루이스 알바레스 교수가 제시했다. 소행성의 충돌에 따른 충격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악기가 끝나는 시점의 지층을 연구한 결과 이 소행성의 직경은 직경 11킬로미터 정도였으리라고 알바레스는 추정했다. 직경 11킬로미터짜리 소행성의 충돌은 현존하는 핵폭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십 배의 위력이다. 먼지와 파편이 대기권을 채워 1년 동안은 햇빛이 지구 표면에 이르지 못했고, 따라서 광합성이 거의 중단되는 등 엄청난 충격이 생태계에 닥쳤다. 이 충격의 여파 속에 공룡은 사라지고, 아직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던 포유류가 살아남아 그 공백을 메우게 됐으리라는 것이다.

포유류는 견뎌낸 충격을 왜 공룡은 견뎌내지 못한 것일까. 생물학자들은 '전문성'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평상 상태에서 다른 동물의 위협을 받지 않던 공룡은 제한된 종류의 먹이만을 취하는 습성을 키우고 있어서 생태계의 기본 조건 변화에 적응할 여지가 적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당은 집권자의 그늘 속에서 몸집만 키워온 공룡이다. 한나라당이 현직 대통령의 탈당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지는 한 달 남짓 됐지만 역시 다음 대통령의 배출에 희망을 걸고 버텨 왔다. 이제 그 희망마저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위치에 새로운 자세를 갖출 수 있을지, 한국 정치발전의 시금석으로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공룡의 고민은 한나라당만의 것이 아니다. 경제대국의 자만심이 금융 공황의 충격 속에 적응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은 국가 전체의 명운이 달린 문제다. 더 크게 보면 '엘니뇨' 현상을 둘러싼 금년의 갖가지 이상기후는 인류 전체의 명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변화 속의 적응이 모두에게 절실한 과제가 돼가고 있다. 한국 최대의 정치 조직인 한나라당의 건강한 생존 여부는 그래서 더더욱 관심이 가는 일이다.

▲ 한나라당의 지금 얼굴들. 두어 명 당 인사가 입각하면 '소통'이 잘 되리라고 이들은 정말로 믿은 것일까? 지난 1년 동안의 퇴행적 모습으로 계속 깎여나가고는 있지만, 한나라당은 아직도 이명박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 자리 몇몇 바라는 소소한 욕심 때문에 '공당'으로서의 역할이 마비된 한나라당, 야당 시절보다 더 큰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능까지도 마비되어 있는 것인가? ⓒ프레시안

  한국에서 거대여당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54년 5·20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자유당이다. 1951년 말 이승만이 원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을 위해 결성된 자유당은 같은 이름의 두 개 당이 며칠 상관으로 만들어지는 등 초기에는 계파 투쟁이 치열했지만, 1954년 초 이범석이 축출되고 이기붕이 총무부장으로 당을 운영하면서 이승만 총재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었다. 첫 총선에서 203석 중 114석을 획득하고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해 137석에 이른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으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함께 퇴장했다.

자유당에 이어 독재의 도구로 만들어진 거대여당이 박정희의 공화당이었다. 군사반란 세력이 준비해 두었다가 1963년 초 정치 활동 재개가 허용되자마자 창당을 선포한 공화당은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기능확대된 현대적 정당을 지향했다. 그 결과 정책 개발과 원외 활동을 확장하는 효과를 얼마간 이루기도 했지만, 독재정권 유지라는 기본 임무에 파묻혀 권위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73년 유신체제에 접어들자 그 나마의 정당 기능도 퇴행해 버리고 완벽한 거수기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0년 10월 해산된 공화당의 뒤를 이은 것이 전두환의 민정당이었다. 민정당은 공화당의 인적 자원뿐만 아니라 물적 자원도 넘겨받았다. 당시의 정당법에는 해산된 정당의 재산이 "당해 정당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정당이나 단체기부하거나 기타 다른 처분 등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민정당은 더도 덜도 아닌 공화당의 후신이었지만 전두환에게 불편한 유산을 배제하기 위해 간판을 바꿔단 것이었다.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은 모두 독재자의 사유물로서 독재의 도구였다. 물론 모두 당시 한국의 최대 정당인만큼 독재자의 졸개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정치다운 정치를 위해 참여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의지를 거스르는 행보는 있을 수 없는 철저한 권위주의 정당이었다.

1987년 이후 선거다운 선거가 시작되면서 독재자의 사유물로서 거대여당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래서 권력의 독점이 아닌 과점 체제로 전환한 것이 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이었다. 민자당은 여러 계파의 협력과 경쟁 속에 정치조직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었지만, 기본 틀은 민정당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권력의 그늘에서 검은 정치 자금에 의존하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 과점 체제로서 민자당의 구조는 1995년 말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7년 말 한나라당으로 다시 바꿀 때까지 계속되었다.

칼럼은 1997년 말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시점에서 쓴 것이다. 국회에서는 제1당이지만 야당이 됨으로써 한나라당을 덮어주던 권력의 그늘이 크게 줄어들게 된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한 때 제2당으로 물러서기까지 했던 한나라당이 다시 거대여당의 자리로 돌아왔다.

1963년 이래 35년간 권력의 그늘에서만 서식해 온 거대여당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나라당이 10년간의 야당 행로를 견뎌내고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것은 장한 일이다.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건전한 발전을 모색해 온 노력 또한 적지 않음을 흔쾌히 인정한다. 신한국당 시절과 비교하면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경륜과 실력을 가진 인물이 비중을 크게 늘렸다.

이런 변화를 놓고 본다면 한나라당은 신한국당 이전의 거대여당에 비해 당연히 더 뛰어난 정치력을 기대할 만한 정당이다. 가치관에 있어서야 표방하는 '보수'를 벗어나 진보적 개혁에 앞장설 것을 바랄 일이 아니지만, 정책을 개발하고 국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21세기 정당다운 모습을 얼마간이라도 보여줄 위치에 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입법 전쟁'에 내몰려 내용도 모르는 법안을 통과시키느라 최소한의 체면도 지키지 못하고, 용산 참사에 대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살펴보자는 동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역사상 최고로 화려한 '비리 백화점'으로 인정받는 통일부 장관 후보를 감싸주기에 바쁘다.

왜 이럴까? 한나라당이 밉기보다 불쌍하다.

서슬 푸른 박정희 아래 공화당에서도 몇 차례 '항명' 사태가 있었다. 지금 뒤져보니 1965년의 인사 항명 파동, 1969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사태,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결의안 사태 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있는 사람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명박 집단이 회귀하고자 하는 목표가 어느 시절인가를. 경제개발이라도 하던 60년대가 아니라 이권 나눠먹기만 하던 50년대 자유당 시절이란 것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