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0. 11:02

베이징에서 나흘 지내고 어젯밤 연길로 건너왔다. 도착 후 100시간 동안 숙소에서 제일 멀리 가본 것이 2 km 가량? 16일의 만찬 후 버스로 숙소에 돌아온 외에는 차 한 번 타지 않고 지냈다.

 

워크숍은 16-17 양일간 진행되었다. "북경대 정원 2원"이라는 장소가 어딘가 했더니, 도서관 뒤쪽(서쪽)에 조그마한 공원 하나를 큼직한 저택 형태의 시설 6개가 둘러싸고 있는 중의 하나였다. 20여 명 참가자가 틀어박혀 토론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편안하고 조용하고, 우아하기까지 했다.

 

한국인 참가자는 나와 이병한, 그리고 조경란(연세대)과 양일모(서울대)가 있었고 일본 학자 3인, 서양 학자 3인 외에는 타이완과 홍콩에서 온 몇 사람을 포함해 모두 중국계였다. 그 중에 중국어를 못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어서 나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주최측에도 꽤 어려움을 끼쳤다. 애초에 중국어로만 진행할 계획이었는데 나를 억지로 끼워넣어 준 것은 내 발표 내용이 워낙 중요한 것이어서였겠지? (아내는 내 '자아감각'이 좋다고 늘 칭찬해 준다. 그 말을 칭찬으로 듣는 것도 자아감각이 좋아서겠지?) 청화대에 유학 중인 박석진 선생이 통역으로 내 곁에 붙어서 도와주었다.

 

밀도가 엄청 높은 회의였다. 국제학술회의는 대개 밀도에 한계가 있다. 각국의 서로 다른 학풍을 어느 정도 수용해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 식으로 하는 경향이 많다. 이번 회의는 국제회의라도 주제에서부터 중국의 국내 회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진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대단히 높다. 30년 전 홍콩중문대학에서 나흘간 열린 근세동서교섭사 워크숍이 내가 참석해 본 국제회의 중 가장 밀도 높은 것이었는데, 그보다도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은 것 같다.

 

회의의 밀도가 높다 보니 언어 문제가 더 심각할 수밖에. 내용이 석연하게 파악되는 발표라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지 그 자리에서 확신을 할 수 없으니 실시간 토론에는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다. 몇 사람에게는 이제부터 내 의견을 정리해 메일로 보내주려 한다. 초청해준 주최측에 대한 도리이기도 할 것이다.

 

뒷북으로라도 의견을 내 줄 만한 측면이 있어서 다행이다. 참가자 대부분이 사회과학 아니면 철학 전공자여서 과학사 내지 문명사를 공부해 온 내가 시야를 넓혀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번 내 발표에서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근대문명의 원자론-기계론 편향성에 관한 생각을 담은 데 흥미를 보인 이들이 있었는데, 자기네 입론에 바로 보탬이 될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발표를 세밀히 살펴봐서 내 생각을 보탤 수 있는 방향에 대한 제안을 정리해 보내주려 한다.

 

내년 봄에는 이번 워크숍보다 공개적인 컨퍼런스 형태로 회의를 열 것이라 하는데, 눈치를 보아 하니 거기도 초청받을 것 같다. 그때는 중국어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연마해 놓아야 할 텐데. 물론 컨퍼런스라면 두 개 (이상)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기는 하겠지만,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실속이 없을 테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심하다. 50년 동안 중국어를 읽어 왔으면서, 중국어 책을 두 권이나 번역했으면서, 중국 공민을 아내로 모시고 여러 해 살았으면서 여태까지 중국어를 못하고 있다니.

 

치열한 학술활동에 달려드는 이야기를 "퇴각일기"에 적는다는 게 좀 어색한 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큰 의미는 "퇴각"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 참여가 새로운 사업을 열어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쌓아온 공부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하나의 '청산'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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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