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자

기사입력 2009-02-04 오전 8:44:09

기병대와 대통령 부인

1928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허버트 후버는 미국의 장래를 한껏 밝게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 미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보다도 빈곤의 완전한 정복을 가까이 바라보고 있다"고 그는 유세에서 말하곤 했다. 대공황은 그의 취임 7개월 후에 터졌다.

후버의 재임중 미국인의 총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수출입은 3분의 1 이하가 됐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25%를 기록했지만 실질실업률은 40%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버는 낙관론을 버리지 않아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근본적인 실패를 고집스럽게 부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

후버의 고답적인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 '연금 부대'의 격퇴다. 1932년 대통령선거전을 앞둔 여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병사 2만여 명이 워싱턴에 몰려들었다. 1945년부터 지급받기로 예정돼 있는 연금을 앞당겨 달라고 청원하며 대로상에 캠프를 친 그들을 연금 부대(Bonus Army)라 한다. 후버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쫓아냈는데 과잉 작전으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얼마 후 새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연금 부대가 다시 찾아왔을 때 루스벨트는 부인 엘리너를 그 캠프로 보냈다. 엘리너는 시위자들에게 커피를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후버는 기병대를 보내줬고 루스벨트는 마누라를 보내줬다"는 것이 두 대통령의 차이로 국민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대공황을 이겨낸 루스벨트의 '뉴딜'이 후버의 정책과 달랐던 것은 빈민 구제에 역점을 두고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꾀한 점이다. 빈민 구제를 좌경화로 여기고 제도 개혁을 체제 전복으로 생각했던 후버와 달리 위기의 심도를 투철하게 인식한 것이다. '노변정담(Fireside Chat)'의 라디오방송으로 국민의 마음에 다가가려 애쓴 것도 같은 인식에서였다.

1920년 부통령에 출마해 낙선한 후 소아마비로 정계를 은퇴했다가 휠체어에 몸을 싣고 돌아온 루스벨트의 모습에서 미국인들은 시련 극복의 상징을 보았다. 김대중 당선자의 지팡이 역시 세 차례 도전에 실패한 경력과 함께 지금의 위기상황에 어울리는 지도자상을 그려주고 있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노변정담을 방불케 하는 '국민과의 대화'를 보여주고 있으니 대공황을 극복한 루스벨트에 못지않은 위기극복의 업적을 기대하게 된다. (1998년 1월)

▲ 1998년 1월, 외환 위기 직후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선 시민들. 실효성 없는 '쇼'일 뿐이란 냉소적 시각도 있었지만, 고통 분담의 정신이 당시 사회에 어떻게 살아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모아진 금 자체보다 이에 참여하는 자세가 위기 극복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집권자가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 마음을 가로막는다면 그런 집권자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 존재다. @연합뉴스

  대규모 토목공사를 '경제 살리기' 방안으로 내놓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살리고자 하는 경제가 국가 사회의 경제 아닌 건설 대기업의 경제라면.

그러나 이것을 '뉴딜'에 갖다 대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실례천만이다. 뉴딜 정책 중에 대규모 토목공사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토목공사라고 다 같은 토목공사인가. 1930년대 미국과 21세기 한국의 대형 토목공사 사이에 인건비의 비중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누구나 대충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뉴딜의 토목공사는 시설을 만드는 것보다 빈민들에게 정부의 돈을 '퍼주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푼 자금의 큰 부분이 서민들의 요긴한 지출로 직결되었기 때문에 일부 자금을 흡수한 기업가들은 이 지출에 부응하는 생산 활동에 투자하게 되었다.

지금의 토목공사는 서민의 지출 능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미미하다. 정부 자금의 대부분을 흡수할 대기업에게는 그 돈을 국내 생산 활동에 투입할 동기가 늘어나지 않는다. 해외 투자가 더 수지맞겠다고 대기업들이 판단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정부 자금이 결국 국가경제를 외면하는 길로 흘러나갈 것이다.

위기에 처한 개인의 대응 자세는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근본적 위기라면 인생관을 바꿔야 한다. 일시적 위기로 인식한다면 당분간 하고 싶은 일 참고 하기 싫은 일 하며 지내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근본적 위기란 것을 아예 인식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위기든 요령만 잘 피우면 넘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 사회를 풍미한 테일러리즘은 세상의 어떤 문제에든지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능률 지상주의였다. 개인의 요령 지상주의와 같이 가치관의 반성을 마비시키는 풍조였다.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20세기의 극단성이 가치관의 경직 현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 지성의 오만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회진화론과 테일러리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대공황을 맞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대표적인 테일러리스트 정치가였다. 사실 그를 '정치가'로 분류하는 것도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하딩과 쿨리지 행정부에서 통상부 장관을 지냈지만 공직 선거는 1927년의 대통령선거가 처음이었고, 대통령으로서도 정치가보다 행정가로서의 면모만 보였다는 것이다.

후버가 연금부대에 기병대를 보내고 루스벨트가 엘리너를 보낸 차이가 어디에 있었는가? 단순한 요령의 차이가 아니다. 후버는 닥쳐 있는 위기 인식의 주체로서 서민들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고 루스벨트는 인정한 것이다. 위기 극복은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백성들은 앉아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나 하라고 후버는 윽박지른 반면 루스벨트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고통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장래를 함께 그려나가자고 청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의 하나로 꼽히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구조를 개편한다는 거대한 정치적 과제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일장공성 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시구가 있거니와 루스벨트의 성공 뒤에도 가려진 '백골고(百骨枯)'가 있었다. 대공황 이전의 긴 호황기 속에 자라나 미국 경제를 주름잡고 있던 '도둑 귀족(robber barons)'들의 위세가 크게 물러선 것이다. 후버 시대까지 미국의 주인 행세를 하던 대기업가 집단이 순순히 뒷전으로 물러난 것은 위기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자기네 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IMF 위기 때는 이 사회에 겉으로나마 자숙하는 분위기가 깔렸었다. 권력을 쥔 자들도 돈을 가진 자들도 모두 위기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를 눈가림하며 자기 몫만 생각하는 자들이 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다.

한 회사,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도 계획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예상할 만한 범위의 호황과 불황을 놓고, 상황에 따라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가 3000이니, 7-4-7이니 일방적인 희망사항만 멋대로 떠벌여놓고 결과에 책임지기는커녕 실패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하고 있는 얘기는 무슨 근거로 믿어달라는 건가? 승리와 패배만 생각하고 성공과 실패를 생각할 줄 모르는 자는 한 국가는커녕 한 회사, 한 가정의 책임도 맡을 수 없다.

10년 전보다 지금의 위기가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밖으로부터의 충격이 더 커서가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가 흐트러져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