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 미곡가격, 매매, 관리, 배급, 보관, 수송 등 미곡상황을 검토하기 위하여 조선생활품회사 경성본사에서 군정관과 조선인이 합석하여 사장 회의를 10月 12日부터 14日까지 열었다. 標準正租 54瓩 1叺[54kg 한 가마] 32圓은 최저가격이며 이 회사는 언제든지 시가로 구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하였다. 금년 미곡은 풍작이라고 보고되어 있으며 북위 38도 이남 각지 예상수확고는 2,100萬石이라 한다. 일부지방의 현재 부족한 것은 미곡 부족의 원인이 아니며 수송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19일자)


조선의 가장 중요한 식량인 백미는 곡창인 남조선지대를 중심으로 全鮮에 걸쳐 전반적인 대풍을 보이었는데 군정청 농상국 경제과의 23일 발표에 의하면 38도 이남에서만 全鮮 소비량을 훨씬 넘은 1,700만석 내지 1,800만석의 수확이 예상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충족한 미곡생산을 가지고 소위 풍년기근으로 시민 식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어 식량정책의 자유방임보다 적절한 시책이 요망되고 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14일자)


위의 기사는 10월 5일 군정청이 미곡 자유시장화 방침을 발표한 1주일 후 나온 것이고, 아래 기사는 그로부터 한 달 여 지난 11월 23일 발표가 12월 14일 신문에 보도된 것이다. 두 가지 특이점이 눈에 띈다. 하나는 10월 중순과 11월 하순의 집계 사이에 15~20%의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11월 23일 발표가 3주 후에야 보도된 점이다.


10월 중순의 수확고 추정은 미곡 자유시장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충분한 조사 없이 마구 올려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1월 하순 집계의 보도가 늦어진 것은 줄어든 집계가 시장에 악영향을 끼칠까봐 군정청이 발표를 꺼린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1,700만석이라 하더라도 풍작이었고, 일본으로의 막대한 반출도 없어졌으므로 쌀 공급이 충분할 것을 예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쌀의 소비 방식이 달라질 것을 감안하지 못하고 비축미 확보 방안도 강구하지 않은 채, 그리고 수확량 예상도 정밀하게 하지 않은 채 자유시장화를 감행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솔한 정도를 넘어서는, 기괴한 일이다. 군정청에 밀착된 지주층 한민당 인사들의 획책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쌀 소비 방식의 변화를 전상인은 “해방공간의 사회사”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일제가 물러나고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무엇보다 ‘먹고 마시는’ 자유가 우선이었다. 그로 인해 당장 문제가 된 것은 쌀의 과소비 현상이었다. 해방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그해 가을 추곡 수확량 가운데 절반 정도가 술이나 떡, 혹은 엿으로 ‘낭비’될 정도였다. “해방 이후 느는 것은 음식점뿐”이라 할 정도로 서울 거리에는 음식점이 홍수를 이루기도 했다. 이때 쌀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었다. 일제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던 쌀을 해방과 더불어 다시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차원에서, 그것은 민족적 정체성을 복원할 수 있는 문화적 양식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 150-151쪽)


“추곡 수확량의 절반 정도가” ‘낭비’되었다는 것은 1946년 2월 23일자, 26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거한 것인데, 다소 과장된 표현 같다. 그러나 다년간의 엄격한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쌀 평균소비가 20~30% 늘어나는 정도는 상식적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소비의 자연스러운 증가 자체는 생산량 증가와 일본 반출 중단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었을 것 같다. 결국 문제는 매점매석, 즉 투기화 현상이었다.


1946년 2월 6일자 <서울신문>에 보도된 조선은행의 물가 조사를 보면 쌀 자체의 투기화는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인플레를 주도한 것은 공산품이었고 쌀은 그를 따라가는 품목이었다. 그러나 주식품의 위상 때문에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것이었다.

 

월별     8月     9月    10月    11月    12月     1月

          곡물     100      75       77       94      113     139

          식료품  100     117     133      158      192     236

          직물     100     162     315      421      770     868

          연료     100     108     146      159      199     225

          잡품     100     191     197      241      329     369

          총 평균 100     131     173      214      320     367

 

이 조사가 정확한 것이라면 소농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빠졌을 것이고, 대지주들도 큰 이득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월의 곡물 물가지수는 1월 1일부터 쌀 1석에 730-750원으로 시행된 최고가격제에 의해 얼마간 낮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제 동진농장에서 일하던 최재순은 1년에 갑절 올랐다고 회고했다. 그 정도면 쌀값이 공산품값을 뒤따라갔다는 <서울신문> 기사의 설명이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해방 후에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어요. 1년에 곱빼기씩 올랐어요. 초가을 100원 하던 것이 가을쯤 쌀 귀할 때 되니까 200원까지 오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초가을에 공판을 안 했어요. 빚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우선 써야 하니까 내서 갚아줘야 했지요.
(<8-15의 기억> 219쪽)


쌀 공급 문제에 심각한 반응을 처음 보인 것은 11월 19일의 일반고시 제6호로 나온 “미곡 통제”였다. 10월 5일의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개정한 것이었다. 12월 19일 미곡 소매 최고가격을 결정, 1월 1일부터 시행한 것은 이 고시에 의거한 것이었다.


1) 1945년 10月 20일부 일반고시 제2호 제3항에 의하여 미곡의 수요가 위급상태에 있음을 포고함과 동시에 其 조절이 조선민중을 위하여 필요함을 시인함. 미곡의 여사한 결핍상태는 군정청에 대하여 약간의 통제방법을 요구함.

2) 1945년 10월 5일부 일반고시 제1호를 玆에 개정하여 조선군정장관, 도지사 及 조선군정장관이 정식으로 권한을 부여한 기타 대행기관이 지령, 고시 及 규칙을 발표하여 미곡의 최고소매가격을 확정케 함.

3) 본 고시의 규정 又는 본 고시 제2항에 의하여 발포한 지령 고시 혹은 규칙을 범하는 자는 육군점령재판소에서 유죄의 판결을 受하는 동시에 其 소정 형벌에 처함.

4) 본 고시는 관보에 발포하는 동시에 효력이 발생함.

1945년 11월 19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일반고시 제6호 1945년 11월 19일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쌀 한 품목에 한해 최고가격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생산자에게 억울한 일이다. 군정청 농상국장 대리 이훈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쌀은 일반소농에 있지 않고 주로 지주나 혹은 상인의 손에 와 있다. 그러므로 쌀은 팔지 않고 시세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이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세농은 자기네 직접생활품을 비싸게 사는 만큼 부득이 쌀도 비싸게 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려운 문제가 있겠지만 지주나 상인이 쌀을 가두고 내놓지 않는 것은 순전히 모리를 위주로 한 행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통제가격에 있어서는 파는 사람만 처벌하게 되었다. 누구나 최고가격 이상으로 파는 자가 있으면 곧 고발해 주면 처벌하는 동시 물건은 압수하겠다. 우리 동포가 먹고 살아야 할 가장 주식품인 쌀로서 모리를 하려는 비애국적인 자에게는 조금도 돌봐줄 필요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농상국으로서도 최대의 노력을 하여 현품을 사들이어 경성을 위시한 대도시 소비자에게 최고가격 이내로 팔 쌀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조금도 염려 없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1일자)


농민의 억울한 문제를 완화해 주기 위해 ‘물물교환’ 수준의 정책까지 강구되었다. 그러나 큰 실효는 없었다고 한다.

 


쌀을 파는 농민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신·성냥·광목·비누·석유 등 중요 긴급한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자 조선생활필수품회사에서는 방금 각 지방으로 다량을 실어 나르고 있다. 이러한 생활필수품은 각 지방 창고에 쌓아 두고 쌀을 판 농민에게 헐한 공정가격으로 나누어 주는 것인데 이것을 사려면 쌀을 판 농민에게는 증명서를 해주기로 되어 있으므로 그 증명서를 가지고 가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증명서의 유효기간은 두 달(60일)인데 현재 지방에 따라서는 실시하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8일자)


생필품 값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의 최고가격제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지는 신문 지면을 덮은 관계 기사를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족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쌀값 자체가 폭등 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차별적 통제는 투기 현상의 충분조건이다. 1월 12일 시민들이 알아서 쌀 구해올 길을 열어준 “자가용 쌀 반입 허가” 조치 보도기사에서 문제의 상황을 대충 알아볼 수 있다.

 


나날이 심각해가는 서울시의 식량문제를 해결코자 당국에서는 여러 가지 각도로 예의 해결책을 강구하여 그 첫길로서는 생활필수품영단의 손을 거쳐서 잠정적인 조치로서 배급을 하고 있으나 그 양과 배급률로 보아서 도저히 이 긴급한 식량문제의 해결은 내리기 어려운 고식적인 조치이다. 이러한 중대화한 식량대책을 강구하고자 서울시청에서는 이번 자가용 쌀을 자유로 반입하도록 하게 될 예정으로 시청경제과에서 반입증명서를 해주기로 되었다. 종래 자가용미 반입은 도내 지주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인데 이번에 일대 영단으로 지주가 아닌 시민이라도 가져올 쌀만 있으면 개인지역으로 정 단위 또는 단체로 쌀을 실어오게 되는데 그 양은 일인당 하루 3합6작 정도로 일년 분의 반입을 허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지음 각 지방에서는 쌀을 실은 트럭 우마차는 불문곡직하고 불법으로 빼앗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일이 생길 때는 시장과 윌슨 시청고문관의 명의로 현장에 미군을 출동시켜 빼앗긴 쌀이라도 찾아주는 강력한 대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반입증명서는 종래의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정회에서 증명한 가족수 증명서를 첨부하여 반입신청서를 시청 경제과로 제출하면 시청에서 시장과 윌슨고문관의 명의로 증명서를 교부해 주기로 되었다. (<서울신문> 1946년 1월 12일자)


1월 13일자 러치 군정장관의 포고문은 당국의 ‘대책 없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반의 애국심과 자비심”에 매달릴 지경이라니.

 


현재 조선에는 일부 계급의 미곡축적으로 인하여 대중생활과 경제면에 큰 위기가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시장에 쌀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조선인 동포들은 큰 곤란과 위협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최대의 위기를 감면키 위하여 군정장관인 나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보다도 쌀의 수요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일반의 애국심과 자비심에 호소하여 이를 해결키 바라며 동시에 각 지방청 지시에 협조하기를 바란다.

1946. 1. 13 조선군정장관 육군소장 아처 엘 러취 (<조선일보> 1946년 1월 14일자)


1월 25일 발포된 미곡수집령의 시행에 임해 1946년 2월 3일자 <조선일보>에 당국자와의 문답 기사가 실렸다. 구체적 시행방법을 여기서 알아볼 수 있다.

 


38도 이남에 있어 38원 내외를 최고가격으로 하여 쌀을 이용한 모리배를 누르고 또 농가에게는 쌀을 내어 팔면 동시에 생활필수품 매입표를 주는 등 쌀이 잘 돌도록 하는 법령을 내어서 여러 가지로 대책을 연구해온 군정청에서는 이번에 쌀을 강제적으로 내어놓게 하는 미곡수집령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이미 2월 1일부터 효력을 내고 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이전의 공출제도와 흡사하여 과연 그 성과를 이룰는지 예측하기 어려우나 38도 이남에서 1천 7백만 석이나 되는 풍년인데도 불구하고 요사이 같이 심한 쌀 기근의 기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기대가 되는데 그 중심되는 법령의 내용을 군정당국에게 물어보자.


(問) 每戶 1석의 100분의 45를 가족인원수로 곱한 수량을 남겨놓고 그 외에는 모두 내어 놓아야 한다는데 그는 얼마나 되는가?

(答) 1석의 100분의 45니까 즉 한사람에게 대두 4말 5되씩을 자가용미로 하고 그 외에는 강제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그것은 每人 하루에 3合 평균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런 고로 하루에 3홉씩 2월부터 6월까지 5달 150일분으로 하여 매인 4말 5되로 하였다.


(問) 벼는 어찌하는가?

(答) 내어 놓는 것은 꼭 백미나 현미뿐이 아니니까 그 대신으로 벼도 좋다.


(問) 그렇게 내어 놓으면 수집량은 얼마나 예상되는가?

(答) 5백만 석은 틀림없을 것이다.


(問) 수집방법은?

(答) 지방군정관의 관할기관으로서 면제를 받는 정부와 종교·교육·의료·사회·후생기관 이외에는 농가와 도시를 막론하고 어떤 집이든지 법으로 정한 수량의 자가용미를 제하고는 모두 내어 놓아야 한다. 이에는 시장 군수 읍·면장 정회장들이 먼저 각호의 소유량을 조사하고 연후에 이를 군정장관에게 보고하고 다시 명령을 받아서 미곡의 양도를 받게 된다.


(問) 쌀값은 얼마에 사느냐?

(答) 한 가마 즉 90斤에 150원씩 최고가격으로 생활필수품회사에서 사들인다. 만일 응치 아니한 때에는 120원에 강제로 사들인다.


(問) 쌀을 아니 내어 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答) 군정법 위반으로 군정재판을 당한다.

 

최고가격제가 한 가마에 365~370원으로 시행되었는데, 이제 협조하면 150원, 협조하지 않으면 120원에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 말기 공출제의 부활이었다. 그것도 공산품 값은 정신없이 치솟고 있는 상황 속에서. 3월 15일까지 5백만석 수집을 장담했는데, 2월 26일 군정청이 발표한 식량수급대책을 보면 2월 20일까지 42만석이 수집되었다고 한다. 쌀 수집 강행에 앞장선 것이 경찰이었으니, 이로써 식민지시대 말기 경찰의 역할도 그대로 복원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민당은 최고가격제 철폐를 건의하고 나섰다. 진짜 ‘딴민당’이었다.


한국민주당에서는 15일 간부회를 열고 긴박한 식량문제에 대하여 신중토의를 거듭하였는데 그 해결책으로서 미곡의 최고가격을 철폐할 것과 자유반입을 허락하라고 다음과 같이 군정당국에 건의하였다.

“쌀값을 안정시키려고 정한 최고가격은 원만히 실행되지 못하고 도리어 도회지 사람들을 아사의 지경에 이르게 하여 당국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그러므로 당국에서는 빨리 식량문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당은 이에 대하여 긴급조치로서 최고가격과 쌀 반출 취체의 규약을 철폐하여 자유롭게 쌀을 유통시키도록 건의한다. 그러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17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