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빈센트 발언’ 이래 ‘신탁통치’에 관련된 미국 측 메시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정 최고 당국자인 아놀드와 하지가 ‘빈센트 발언’을 ‘개인 의견’으로 몰아붙이고 신탁통치 없이 한국을 즉각 독립시키려는 것이 미국의 뜻인 것처럼 선전한 데서 혼란이 시작됐다. 국무성은 모스크바회담에서 신탁통치를 제안할 방침을 줄곧 분명히 해 왔는데도 하지와 아놀드는 이를 묵살하고 맥아더의 의중에만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회담 종결을 앞두고 나온 12월 27일자 <동아일보> 허위기사도 맥아더-미군정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맥아더-미군정 집단은 현지 점령군의 위상을 이용해 국무성 정책을 뒤집고자 했다. 국무성 정책은 한국을 연합 4국의 신탁통치 후에 독립시키려는 것이었다. 맥아더-미군정 집단은 한국을 미국만의 영향 아래 두고 싶어 했다. 모스크바회담 개막 전에 이승만의 독촉을 지원할 때는 한국 전체를 끌어들일 희망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스크바회담 결정이 나오고서는 남한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돌아선 것 같다. ‘반소-반공’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동아일보> 허위기사는 분단 건국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국제무대에서 소련과 미국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명분을 일체 무시하는 노골적인 대립에는 아직 이르지 않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도 공산주의 운동이 안정된 정치세력으로 고착되어 있지 못했다. 국제적 미-소 협력도 국내의 좌-우 합작도 아직 길이 열려 있었다. 이 시점에서 ‘반소-반공’은 한 마디로, 판을 깨자는 뜻이었다. 미-소 협력과 좌-우 합작의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자는 뜻이었다.


‘솔로몬의 판결’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아기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리기 위해 솔로몬 왕이 짐짓 아기를 쪼개서 나눠주라고 하자 진짜 어머니는 아기를 포기할 테니 쪼개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는 이야기. 해방공간의 한국에는 아기를 쪼개더라도 내 몫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자들이 있었다. 분단 건국은 전쟁의 충분조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어난 일을 봐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의 민족을 두 개의 국가로 쪼개놓으면 꼭 6-25 같은 형태가 아니라도 어떤 전쟁이든 전쟁을 겪게 되어 있다. 통합을 향한 민족의 에너지가 현실 상황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1월 19일 빈센트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그 동안 군정 당국자들이 내놓은 혼란스러운 메시지가 국무성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 메시지들을 일일이 해명하고 수정하기보다 모스크바회담의 결정 내용을 기준으로 미국의 입장을 새로 그려 보인 것이다.


미국 국무성 극동문제위원장 존카트·빈센트는 19일 라디오 방송으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의견은 연합국 3국 의견과 동일한데 조선의 신탁통치를 만일 새로 설립되는 임시정부가 모두 능률이나 힘을 보여 준다면 조선의 신탁통치를 실현시키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만일에 새로 설립되는 임시정부가 통일적 치안이나 통치를 못 본다면 연합국기구 밑에 4대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현재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의할 것이다. 만약 신탁통치가 실현되면 모스크바삼상회의와 같이 만5년으로 되기 쉽다. 우리가 조선에 대한 유일한 목적은 최단기간에 조선의 독립과 완전자치 완성에 있다. 조선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다. 그 이유는 현재 조선에는 90여개의 정치단체가 있는 까닭이다. (
서울신문 1946년 1월 21일)


사실 이것은 ‘미국의 입장’이 아니라 ‘연합3국의 입장’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최초 제안은 ‘5년 플러스 알파’의 신탁통치에 신탁기간 중 한국인의 임시정부나 과도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세 통치’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5년 마이너스 알파’로 바꾸고 임시정부를 신탁통치에 앞세우도록 한 최종 결정은 소련의 수정안에 따른 것이었다.

 


1월 19일 빈센트가 밝힌 미국의 입장은 모스크바회담 이후의 미국 입장이었다. 회담 이전의 미국 입장이 아니었다. 회담 결정이 알려진 후 한국인의 반응을 보고는 애초에 미국이 외세 통치 성격이 강한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국제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도중에 어느 참가자가 어떤 제안을 했었는지 과정을 밝히지 않는 것이 외교 관례다. 합의가 이뤄진 이상 합의 내용이 참가자 모두의 입장이 되는 것이고, 합의 이전의 의견 차이를 가지고 분란이 다시 일어나는 일을 피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소련은 합의를 발표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타스통신을 통해 합의 과정을 밝혔다. <동아일보> 허위기사 등 미군 측의 심한 왜곡이 있었고, 1월 19일 빈센트의 성명이 그 왜곡을 충분히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월 24일 타스통신의 회담 과정 공개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대응은 신중했다. 점령군과 영사관을 통해 3상회담 결정의 순조로운 이행을 유도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가 1월 22일 타스통신이 평양 발 기사로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배후조종한다는 비난을 인용했고, 이어 회담 과정을 공개했다. 23일에 스탈린이 미국 대사 해리먼을 접견하고 회담 과정을 공개해야 하는 소련의 입장을 알렸다. 이 접견을 해리먼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한국으로부터 받은 전보 하나를 내게 읽어주었다. 그곳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신탁통치 결정의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그와 같은 주장을 퍼뜨리기 위한 집회가 공개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이 아니라 소련만이 신탁통치를 고집했다고 하는 기사들이 한국 신문에 게재되었다는 사실을 알린 전보였다. 이런 일에 러치 군정장관이 연루되어 있다고 지목해서 말했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25쪽에서 재인용)


스탈린까지 직접 나선 것이었다! 미국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먼은 2월 2일부터 3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아니, 하지를 방문했다. 소련 주재대사가 한국에 와서 사흘씩 지내다니! 한국 점령군의 행태가 미-소 관계에 일으키는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맥아더-군정청 집단은 판을 깨려고 날뛰고, 소련은 판을 지키려고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번즈 장관의 미국 국무성은 소련만한 열의는 아니라도 판을 지키려는 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후일의 회고에서 소련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돌아서고 있었다고 했는데,(커밍스 위 책 225-227쪽) 이것은 한국전쟁이 터진 후의 상황에 따라 기울어진 회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판을 지키려는 트루먼의 열의는 번즈보다 약했기 때문에 정책 혼선의 빌미를 주었을 것이다.


미국도 소련도 한국 독립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것이 아니었다. 1943년 11월 미-영-중의 카이로선언에서 한국 독립 방침을 세우고 소련도 이를 추인한 것은 한국인이 예뻐서가 아니라 일본제국 해체를 위해서였다. 일본이 막상 항복한 후 그 방침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인도주의적 ‘선의’와 자국 이해관계의 고려가 엇갈려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아더와 주한 미군 지휘관들은 현지 사정에 직접 접하면서 이 지역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를 깊이 살필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기 바라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혼선을 일으킬 동력이 여기에서 나왔다. 십여 년간 미국 대외정책을 이끌던 루스벨트가 갑자기 사라진 상황 때문에 조그만 동력으로도 혼선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반년 정도는 더 버틸 것으로 예상되던 일본을 단 며칠 만에 굴복시킨 원자폭탄! 원자폭탄을 가진 이제 소련을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미국인이 맥아더, 하지, 아놀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소련과 사이좋게 지내기보다 싸우고 싶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싸움 붙기가 힘들었다. 영국, 프랑스 등 무시할 수 없는 나라들의 견제가 있고, 거기서 붙었다 하면 바로 제3차 세계대전이 될 텐데 전쟁에 지친 국민을 설득하기도 힘들다. 동아시아가 훨씬 편리한 위치였다. 판을 깨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소련도 원자폭탄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영향력은 아예 포기했고 한국에 대해서도 적대적 정권만 들어서지 않기 바라는 방어적 입장이었다. 대결을 피하면서 방어적 입장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3상회담에서 이끌어냈다. 원자폭탄을 자기네도 개발하기 전까지는 미국과의 대결을 피해야 했고, 그러면서 국경이 위협에 노출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3상회담에서 짜놓은 판을 지켜야 했다.


일반 한국인의 입장은 소련과 통하는 것이었다. 자력 해방이 아닌 만큼 승전국의 영향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국가로 독립해 여러 나라의 영향력을 고르게 받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하나의 국가로 한 나라의 영향력을 집중적으로 받는 것이 차선이었다. 두 개의 나라를 세워 각각 한 나라씩의 영향력을 받는 것은 최악의 길이었다.


한국이 최악의 길로 접어든 것이 어느 시점의 일이었는가? 여러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뤄진 일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고비가 1946년 1월, 모스크바 결정을 받아들이는 단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맥아더-군정청 집단과 이승만의 마음속에서 분단 건국이 유일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유력한 목표로 떠오르게 된 것이 이 단계였다고 보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