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초에 마음먹은 일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 또 하나는 연구활동에 복귀하는 일. 연구활동은 나름대로 쭉 계속해 온 일이기는 하지만, 저널리즘에 의지해 일반 독자를 상대하는 활동을 그만두고 전문가들에게 연구 성과를 정리해 넘겨주는 방향을 생각한 것이다.

 

1년을 끝내며 돌아보면, 두 가지 다 애초에 생각한 경로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취지는 계속 살려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 쪽은 세례만이 아니라 견진성사까지 받으면서도 신앙을 확실히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생각해도 엉터리가 됐다. 그래도 전에 비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선이 안정되었다든가 지식의 확장보다 지혜의 연마에 마음이 더 쏠린다든가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이 편안해졌다든가 하는 점에서는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뜻이 살아서 자라나는 것 같다.

 

학술면에서는 24년 전 제출한 학위논문의 뒤를 잇는 연구를 위해 그 방면에 그 동안 나온 연구성과를 섭렵하면서 그럴싸한 연구방향까지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려니까 "이걸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정 할일이 따로 없으면 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갈수록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일이 모습을 키워간다.

 

한반도 평화의 과제다. 지금까지 내 공부가 그 과제를 의식적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방향이 그리로 맞춰져 왔다. 남북관계를 향한 의식이 있었다면 어떻게 문명교섭사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겠나? 그런데 하다 보니,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을 문명사 연구에서 꽤 뽑아내 놓은 것이다. 이것을 섭리라고 할지 인연이라 할지 무의식이라 할지, 이름은 뭐라 붙이든 뭔가가 작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사회의 중요한 과제에 내가 공헌할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지난 10년간의 한국현대사 정리 작업의 밑바닥에 그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방향의 작업을 책상머리에서 벗어나 펼칠 전망이 보이는 것이다.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도와가며.

 

2017년을 통해 내 생각과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가 조광 교수다. 연구활동 재개를 위해 도움을 청하려고 접근했다가 입교의 결정적 계기를 얻었다. 그런데 입교 후 그분이 내게 연구활동보다 민족화해 사업에 공헌할 것을 더 열심히 권해준 것이 처음에는 뜻밖이었다. 공교로움을 더한 것은 남궁 신부님. 그냥 "동네 신부님"으로 생각하고 마주친 그분이 민족화해센터 내의 동북아평화연구소 참여를 열심히 권해주었다.

 

연구소의 강주석 소장신부님도 앞으로 주고받을 도움에 기대감을 느끼게 하는 분이다. 얼마 전 찾아갔을 때 학위논문 "공산주의를 만난 선교사들의 '마음'"을 받았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통상적인 학술연구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종교인들의 연구가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강 신부를 만났을 때 내가 민족화해센터나 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할 만한 일을 의논했다. 당장 그쪽에서 준비하는 제주 4-3 70주년 행사 준비에 도움을 드릴 수 있겠다. 신부님들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보다 더 큰 가능성이 떠오른 것은 내가 손수 뛰는 게 아니라 내 인맥을 움직이는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한반도 평화에 관해 중요한 의견을 내놓을 만한 이들이 내 주변에 꽤 있고, 내 인간관계는 '소수정예' 아닌가. 어울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 대신 어울리는 사람들과의 신뢰관계는 탄탄하다. 내가 나서서 권하는 일이 있다면 호응을 많이 기대할 수 있겠다.

 

강 신부와 마주 앉아 떠오르는 이름들을 읊다 보니 신부님 눈이 거듭거듭 커진다. 윤여준, 박인규, 이병한, 홍세화, 최병모, 홍석현, 유시민... 그리고 현대사 연구자 몇 분... 이런 이들에게 강연만 부탁해도 민족화해 사업에 꽤 도움이 되겠다. 번듯한 콘퍼런스도 꾸밀 수 있겠다.

 

강 신부와 헤어진 뒤 생각하니, 앞으로는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위에 적은 이들 도와드리는 자세로 함께 할 일을 찾아 어울려 나가는 일이 괜찮은 활동방향이 될 것 같다. 민족화해센터 사업에 이이들이 참여할 길을 찾는 것이 일단 좋은 일이 될 것 같고, 하다 보면 이이들이 하는 일에 내가 접근해 도와드릴 여지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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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