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사령관이 주요 정당 지도자들을 군정청으로 청해 모스크바 외상회담 결정 내용을 공식 통보했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대 치욕 신탁통치제를 위요하고 3천만 동포가 同制 폐지의 반대 봉화를 높이 들고 있는 29일 조선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정오 군정청으로 人民黨, 共産黨, 韓國民主黨, 國民黨, 新韓民族黨 등의 각 정당 영수를 초청하고 신탁통치에 관한 公電을 피력하는 동시에 탁치제는 주권의 침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방금 미국으로부터 公電이 도착되었다. 미 소 양 군정 대표는 2주간 내에 모여 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회는 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를 모아 임시정부를 조직한 후 그것을 4개국 공동위원회에 제안하여 조선의 임시정부가 조선의 독립을 원조하는 4국 신탁관리가 필요하냐 아니하냐의 결의에 의하여 4국위원회는 존폐를 결정한다. 신탁관리는 일본제국의 통치와 같이 압박과 착취를 목적함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위하여 원조하는 기관이다. 주권은 임시정부에 있고 4개국 관리위원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무장관 번즈 씨는 모스크바 출발에 앞서 나에게 내 뜻대로 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결코 조선에 해로운 제도가 아니니 오해 말라.”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인용문 끝에 번즈 국무장관이 자신에게 “내 뜻대로 해줄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승만은 26일 방송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 독립을 찬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거짓말과 통하는 이야기다.

 

정용욱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발판으로 군정청이 <동아일보> 허위 기사에 연루되었을 개연성을 보여주었는데,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54-66쪽) 여기에서 말한 ‘번즈 국무장관의 약속’이란 것도 소련을 모략하려는 <동아일보> 허위 기사를 뒷받침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이 신탁통치 결정과 관련해서는 하지가 유별나게 고집을 많이 세우고 빤한 거짓말도 많이 했다. 거의 정신병자로 보일 지경이다. 1월 24일 타스통신의 회담과정 폭로로 신탁통치안 제출 책임을 소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짓말이 들통나자, 국무성에서 회담 전에 방침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우겼다. 국무성 측에서 그 주장이 거짓말임을 밝히는 자료를 들이대자 군정 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고 뻗댔다.


하지의 행태가 너무나 황당무계해서 맥아더가 하지를 속인 것 아닌가 의심까지 든다. 그러나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본국의 연락이 모두 맥아더 사령부를 거쳤을 리는 없다. 위 기사의 인용에서도 번즈가 자기에게 직접 약속을 했다고 하지가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신탁통치 결정이 명확하게 전해졌다. 하지 사령관은 반탁 운동에 동정하는 뜻을 표했다. 임정 중심의 비상대책회의는 극한투쟁을 결정하고 반탁 결의가 각계각층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 대열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흐름이 얼마나 거센지 좀 우스운 모습도 개중에 보인다.


28일 밤 신탁통치의 비보를 접한 서울의 환락가는 일제히 문을 닫았다. 초만원을 이루었던 각 극장에는 극장지배인이 전하는 이 소식에 관객들은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일제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29일에는 극장마다 신탁통치 반대 휴관이라는 패가 나붙었다. 三越과 丁字屋 4층에 호화스러움을 자랑하는 댄스홀도 28일 밤 지나가는 군중들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고 29일에는 스스로 휴업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기타 수없이 생겨난 카페와 빠도 전부 휴업을 하여 한때 환락도시로 변한 느낌이었던 지저분한 서울거리도 숙연한 모양으로 변하였다. 환락정에서 객고를 풀던 연합군병사들도 없어졌거니와 스스로 긴장하여 서울 환락가의 풍모도 하룻밤 사이에 변해 버렸다.


◊ 한성극장협회 이사장 洪燦 談

신탁관리란 우리 민족에게 독약을 주는 거나 다름이 없다. 국가 최고문화의 기구는 예술이다. 국치적인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완전독립이 오기 전까지는 시내 각 극장의 문을 열 수는 없다. 민중과 함께 보조를 함께 하겠다. 완전독립이 지연한 곳에 오락이 있을 수 없다.


◊ 국일관사장 金女伯 談

신탁통치란 청천의 벼락이다. 해방이란 허수아비의 미명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우리 요리업자들도 직업을 떠나 통치 배격의 일원으로 민중과 더불어 끝까지 항쟁하겠다.


◊ 각 극장도 합류

서울극장협회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치욕적 결함인 신탁통치거부투쟁을 위하여 28일 긴급이사회를 개최하고 서울안 16극장은 일제히 문을 닫고 이어서 전국 흥행업자를 격려하여 水原, 仁川, 大田, 釜山, 光州 각 극장도 폐문하였다 한다.


◊ 李東新 談(정자옥 지배인)

국민으로 누구나 통분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백화점에서는 휴업을 하였습니다. 저의 백화점에 있는 댄스홀 말입니까 경영주는 다른 사람입니다 마는 집을 빌려준 사람은 우리이니까 저희들도 지금 댄스홀 경영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곧 폐지해 달라 부탁할 작정입니다. 첫째로는 풍기도 좋지 못하며 지금과 같은 국가비상지추에 댄스가 다 무엇입니까?


◊ 池熙轍 談(동화 총무부장)

내 지금도 막 이야기 하였습니다. 전에 대표로 계시던 분이 댄스홀로 쓰는 것을 허락한 모양입니다. 저는 4·5일 전에 군정관 딬 중위에게 우리 백화점 내에 이러한 풍기문란한 것을 두지 않게 하여 달라 부탁하였더니 동 중위는 조금 기다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시국이 이렇게 되니 더구나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일층 더 강경히 군정장관에게 교섭하겠습니다.


◊ 林炯哲 談(국제댄스홀)

어저께 오후 6시 경관이 와서 충고하므로 바로 휴업하였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휴업할 예정이며 딴 데서 영업을 개시하면 나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맨 끝의 댄스홀 업주처럼 “딴 데서 영업을 개시하면 나도 바로 시작”할 사람들도 감히 혼자 문을 열지는 못할 만큼 거센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경찰서장들까지 나서는 판이니 유흥업자들에게 분위기가 거세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겠다.


4개국 공동관리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하여 2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경찰서에서는 시내 각 경찰서장이 신탁통치 배격 긴급회의를 열고 각 서장의 공동담화를 동대문서장 金正濟가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신탁통치란 우리가 배격할 일이다. 우리는 치안을 확보하는 경찰진에 있는 몸이라 우리로서 중구난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 없는 곳에 경찰이 있을 리 없고 민중을 떠나 치안은 허깨비의 파수병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독립이 올 때까지는 민중과 더불어 치안대원으로서 결사의 사명을 다하겠다. 마음과 마음 피와 피가 순결히 결합될 때는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오후 4시부터 도에서 과서장회의가 있는데 우리의 뜻을 피력하겠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당시 경찰은 미군정 방침으로 식민지시대의 경찰관들이 승진해서 자리를 지키고 조병옥의 주도로 노골적인 친일파까지 등용되어 민심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경찰 간부라면 원래 정치적 태도 표명을 절제해야 할 위치인데, 더구나 친일 색채가 강한 이 집단이 이렇게 앞장서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군정청 직원들이 바로 조직적 움직임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눈에 띄는 일이다.


29일 아침 총파업을 단호히 결행한 군정청 조선인 직원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내었다.

 

◊ 성명서

昨日의 보도에 의하면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조선에 신탁통치위원회를 설치하고 5년 후에 독립을 준다고 결정했다는 설이 전해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민족이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요 또 자유독립을 약속한 국제신의에 배반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들 군정청 조선인 직원은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고 촉진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이에 협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는 기관이 아니요 신탁통치를 위한 기관으로 전환하게 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이상 더 이에 협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총사직으로서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앞으로 전개될 3천만 총의에 의한 독립운동에 합류하여 끝까지 싸움하기를 성명한다.

12월 29일 군정청 조선인직원 일동

 

군정청의 3천여 직원은 29일 정오 각과 계장 이하 직원이 시내 新橋町 맹아학교 뒷뜰에 모이어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결의하고 전원이 시내를 향하여 보무당당한 시위행진을 하여 군정청 앞까지 오자 MP의 제지로 일시 해산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동 직원들로 조직된 신탁통치반대위원회에서는 이어 모처에서 긴급대책위원회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여 군정청 관계 전 직원에 반대의 격을 보내고 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3천여 전 직원이 시위행진에 나섰단다. 작문 능력이 각별히 뛰어난 <동아일보>가 아니라도, 일부 직원의 행진을 조금 과장해서 보도하는 것은 선의로 이해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아무튼 일부 직원이라도 군정청 직원들이 이런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성명서에서는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고 촉진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그곳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그 믿음 하나만으로 일한 사람이 몇이나 됐겠는가. 월급이 좋고 신분이 보장되는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 민족 대의를 아주 외면한다면 서운한 일이겠지만, 이렇게 앞장서서 분위기를 띄워주는 것은 좀 어색한 일이다.


군정청 직원과 경찰 간부는 한민당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집단이었다. 다른 정당과 조직들이 갑자기 닥친 소식에 놀라 원론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점에서 이 집단이 강경하고 확고한 행동과 의지를 보여준 것은 자연발생적 반응이 아니라 준비된 전략에 입각한 조직적 대응으로 보인다. 보수성이 가장 강한 이 집단이 보여준 뜻밖의 적극적 태도 때문에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공 측 인사의 29일 중 반응 하나를 어제 소개했는데, 공산당 대변인 정태식의 반응도 그와 별 차이 없이 원론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29일자 신문에 실린 것이지만 초두의 문맥으로 보아 28일의 발언으로 보인다.


조선신탁통치설에 대하여 조선공산당에서는 아직 공식발표는 없으나 동당의 鄭泰植은 개인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절대반대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공산당으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고 또 오늘 저녁에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회의의 결과에 대해서 공식으로 발표한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모든 자료를 가진 후에 정식으로 태도를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의 공산주의자로서의 개인의견을 말한다면 이러하다. 우리 공산당은 과거 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에 반대하여 가장 용감하게 민족해방을 위하여 우리 동지와 대중의 존귀한 희생을 내어 가면서 싸워 왔다. 우리 당은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확실한 자료를 가지지 못해서 지금 경솔히 이 문제에 관하여 말할 수 없으나 만일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 반대한다. 조선 3천만 민족은 옳은 노선 밑에서 하루바삐 민족통일전선을 완성하여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우리 3천만 조선동포는 8월 15일 우리가 가졌던 그 감격을 다시 가지고 한 마음 한 뜻 한 힘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박헌영은 공식 입장 표명이 없었지만 소련영사관 직원 샤브시나의 증언을 보면 역시 원론적 수준의 반탁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브신이 그(박헌영)를 불러 물어보니,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조선의 정세와 민족문제 들을 바로보지 못한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소련영사관측이 “소련의 지시니 찬탁에 앞장 서 달라”고 요구하자, 겉으로는 따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반탁을 고수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동향이 평양사령부에 알려졌고,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데프 소장 등은 1946년 1월 초순 그를 평양으로 불러 “소련의 정책이니 찬탁을 따르라”며 명령식 설득을 했지요.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58쪽에서 재인용)


대다수 정치인들이 당황해서 원론적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이미 준비한 방책”을 자신 있게 꺼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승만이 모든 동포에게 “일시에 일어나 예정한 대로 준행하기를” 청할 때 그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영, 미, 중, 각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고 할 때 소련이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한민당, 군정청, 경찰에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이 신탁통치에 대하여 미 국무성 원동사무부장인 빈센트 씨가 누차 私翰과 공식선언으로 표시한 바가 有하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과 될 줄 예측하고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책대로 집행할 결심이니 모든 동포는 5개년 단축시기라는 감언에 見誘치 말고 일시에 일어나서 예정한 대로 遵行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 전국이 결심을 표명할 時에는 英, 美, 中 각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