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8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국가 건설의 과제가 조선인에게 주어졌을 때 어떤 체제의 국가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이 엇갈렸다.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 사이의 선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더 중요한 선택은 민족국가를 세우느냐 여부였다. 이 선택이 크게 의식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1천 년간 민족국가의 틀 안에서 살아 왔고,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족사회의 틀은 계속 유지되어 왔다. 게다가 국제적으로도 민족 자결의 원칙이 존중받고 있었고, 카이로회담에서 연합국의 조선 독립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다. 일본의 강압이 해소된 이제, 민족국가 건설에 반대의 뜻을 내놓고 드러내는 사람은 조선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중엽의 세계에는 조선인의 민족국가 건설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었고, 실제로도 민족국가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시되어 온 요인이 좌-우익 대립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문제를 걱정했기 때문에 대립 해소를 위해 좌우합작을 시도했고, 그를 위한 동력을 민족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해방 직후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글을 발표한 안재홍은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를 가장 열심히 제창한 사상가이자 좌우합작을 앞장서서 추진한 정치가였다. 그의 민족주의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그의 주장이 국가 건설 과정에 많이 반영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의 주장 중 유효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 검토해 본다.

 

 

민세(民世)주의에서 신민족주의로

 

1945922일에 발표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부터 검토해 본다. 815일부터 9월 초순까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안재홍은 당시 조선에서 제일 바쁜 사람의 하나였다. 9월 초 건준을 그만둔 후 약 보름 동안에 원고지 2백 매 길이의 이 글을 썼다. 건준에서 한 차례 좌절을 겪고 민족주의 이념 정립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해방 전에 키우고 다듬어둔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안재홍의 아호 민세(民世)”1930년대 초 민세주의를 제창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에서 세계로라는 말로 요약되는 민세주의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회통(會通)”을 바라본 것이다. 신간회 활동을 통해 좌우 대립의 문제점을 통감하고 있던 그가 좌우익의 사상적 배경인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민세주의를 제창한 것은 좌우합작 노력의 선구적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주의는 국제주의와 구별되나니, 세계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관념에서 좋되 실제에서는 너무 추상적인 자이니, 각 민족 각 국민이 세계적인 또 인류인 처지에서 자기의 민족 또는 국민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것을 좁다란 배타이기적인 처지를 힘써 벗어나서 국제적 공존과 互愛를 목표로 하는 데에 현대인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견지에서, 각각 그 민족애의 처지에 굳건히 서면서 국제주의적 인류애의 大道로 나아감이, 꼭 현대인의 걷고 있는 과정이다. 민족애는 존귀한 역사적 생산물이다. (<조선일보> 1931. 11. 10 사설 許久한 동무”, <민세안재홍선집>(이하 “<선집>”) 1, 446)

 

193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는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겹쳐져 있었다.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중 민족 모순에 치중한 흐름을 우익, 계급 모순에 치중한 흐름을 좌익으로 볼 수 있다. 신간회 운동에서 두 흐름 사이의 갈등이 일어났는데, 안재홍은 두 흐름 사이에 근본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민족과 세계가 중층적으로 겹쳐지는 관점 위에 내놓은 것이다.

민족주의가 대외적 배타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은 1945년에도 되풀이된다.

 

민족과 민족의식은 그 유래 매우 오랜 것이니, 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통일을 요하는 遠心적인 민족연합국가, 이를테면 19세기 이전의 독일인의 국가와 같은 데 있어서의 지방적 애국주의는 지양 청산됨을 요하였음과 같이, 근대에 있어 국제적 협동연관성을 무시하는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로서의 주도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 이에 특히 신민족주의가 제창되는 이유이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선집> 2. 17)

 

박찬승은 해방 이후 안재홍의 신민족주의가 한편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각자의 민족의 역사가 있다는관점을 지킨다는 점에서 1930년대 민세주의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것이라고 보는(“1930년대 안재홍의 민족주의론”, 정윤재 등 공저 <민족에서 세계로>, 76-77) 한편 “1930년대의 민세주의 단계에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던 정치적 측면에서의 신민족주의의 내용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지적한다. (같은 글 80)

정치적 측면의 내용이라 함은 신민주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19459월에 발표한 글 제목에는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가 나란히 놓여 있지만, 신민주주의는 신민족주의의 부속품이라는 인상이 들 정도로 간략하게 다뤄져 있다. 사실 안재홍이 말하는 신민주주의는 형식적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실질적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는 좌익 측의 민주주의 주장과 통하는 것이므로 긴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좌익에서는 우익을 민족주의진영, 자기네를 민주주의진영으로 흔히 대비시켰다.

안재홍은 좌익이 주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와 배합될 때 한층 더 실질적인 의미를 일으킬 것으로 보았다. 과거의 민족주의에는 계급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는데 새로 세울 신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민족 전체의 이념이 된다는 것이었다. 민족 전체가 일본 지배에 예속됨으로 기존 계급의 장벽이 타파되었고 민족 전체가 함께 해방됨으로써 민족이 한 덩어리로 새 국가 건설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 민족이 동일 예속을 벗어나 동일 해방을 맞고 있다는 해방 당시 안재홍의 시국관이 신민족주의 담론의 전제가 되었고 그가 좌우합작에 나서는 입장의 발판이 되었다. 박찬승은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민세주의의 문화적 민족주의가 갖고 있던 관념론적 한계를 아직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있었다고 보는데,(같은 글 89) 해방 당시의 시국관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 해방관점의 타당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친일파도 동일 해방의 주체에 포함되는가?

 

모든 조선인이 똑같이 기쁜 마음으로 해방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던 친일파가 기득권 상실의 공포를 느낀 것은 물론이고, 두드러진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사람들은 체제 격변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완전한 동일 예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한 동일 해방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 민족적 예속의 상황에서 민족사회 내의 권력과 부력(富力) 분포가 비교적 덜 치우친 상태였다고 볼 수는 있다. 일제 통치기구에서 과장급 이상의 자리를 맡은 조선인은 극소수였고, 부의 집적에도 일본의 총체적 수탈로 인해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기득권의 저항력이 비교적 약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절반쯤 물이 차 있는 잔을 놓고 절반이나 있네,” 하는 것과 절반밖에 없네,” 하는 것은 주관에 달린 일이다. 안재홍은 해방 당시 민족사회 내부의 갈등 요인이 비교적 적은 상태를 강조함으로써 민족 통합을 쉬운 일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실제로도 더 쉬운 일이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된다. 민족사회의 불순분자로 공공연히 지목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해 그가 취한 입장에서 내재적 갈등에 대한 그의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김구는 19451124, 귀국 이튿날 군정청에서의 기자회견에서 친일파 처단을 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했다. 반면 안재홍은 1210일 기자회견에서 신속한 처단을 주장했다. 이 차이를 놓고 나는 그와의 가상회담에 이렇게 적었다.

 

김기협: 일전(1210) 회견에서 통일운동에서 민족반역자 제외의 선후문제는?” 하는 물음에 선생님은 나는 그런 분자는 먼저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셨지요. 그런데 김구 선생은 귀국 이튿날 회견에서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현실정치의 가장 큰 문제인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정치노선의 중대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차이를 놓고도 김구 선생의 노선에 신뢰를 지킬 수 있습니까?

 

안재홍: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이 지금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이라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일전의 회견에서도 임시정부의 인민공화국 해체 요구에 대한 의견을 묻기에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어요. 의견이 있지만 오해를 불러올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5년 후의 사람들에게라면 솔직히 대답하겠습니다.

백범 선생께서 정녕 불량분자 배제를 후일로 돌린다면 그분 노선을 따를 수 없습니다.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산수에서는 A+BB+A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일은 이와 다릅니다. 친일파 배제를 A, 건국을 B라 할 때, A를 해놓은 뒤의 BA를 하지 않은 채로의 B는 서로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B를 해놓은 뒤의 AB를 하지 않은 채로의 A도 서로 다릅니다. 어느 쪽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얘기하죠. 친일파를 배제하지 않은 채로 건국하면 세워진 나라의 칼자루를 친일파가 쥐게 되기 쉽습니다. 친일파 속에 권력과 재력을 가진 경찰, 부자 등이 많으니까요.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친일파 처리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한편 소위 친일파도 옥석구분(玉石俱焚)을 피하고 그중의 건실한 요소를 살려내려면 나라를 먼저 제대로 세워놓아야 합니다. 친일파가 배제된 국가가 세워지면 도덕적 약점이 없는 당국자들이 악질 친일파를 철저히 숙청하면서 비교적 양심적인 인재들에게는 반성의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반면 새 국가의 당국자들 자신이 도덕적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친일파 처리 문제에 유연한 자세로 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백범 선생께 기회 있는 대로 이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미군정과 한민당의 협조 문제가 있어서 분명히 말씀하기 어려우시겠지만, 머잖아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시기 바라고 있습니다.

 

김기협: 친일파 중의 건실한 요소비교적 양심적인 인재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국자와 친일파의 흑백론적 구분에는 물론 형식적-논리적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친일파에 대한 보다 분석적 시각이 현실정치 측면에서도 필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석적 시각이 바람직할지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며칠 동안 장마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35년 일제 지배를 받고 나서 친일을 했냐 안 했냐 하는 문제는 빗방울 맞은 일이 있냐 없냐 따지는 것과 비슷해요. 비 맞고 싶어서 발가벗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얼마 안 되고, 대개는 부득이 우산 쓰고 나갔다가 튀는 빗방울 묻은 정도예요. 방 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비를 철저히 피한 사람은 몇 안 돼요.

나 같은 사람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인정받지만, 나도 바지자락에 빗물이 튄 사람이에요. 감옥 몇 번 드나들었다고 해도 감옥에서 고생한 시간보다 언론사 간부로 호의호식하며 행세한 시간이 더 길지요. 식민지 35년간 내 존재와 활동이 민족과 사회를 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기는 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명쾌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었죠. 예를 들어 현실 속의 최선으로 여긴 물산장려운동에는 분명 타협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물산장려운동 함께 하던 이들이 한민당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 말기에 길이 갈라져 손가락질을 나보다 많이 받게 된 분들이죠. 나는 그분들이 막바지 몇 해 동안의 행적을 반성하고 나와 같이 건국사업을 뒷전에서 돕는 위치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학식과 경영능력을 가진 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새 나라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포용이 이뤄지려면 포용하는 측과 포용받는 측의 뜻이 어울려야 합니다. 포용하는 측에서는 당신들은 흠이 있으니 앞에 나서지 마시오.” 제재하고 포용받는 측에서는 우리는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며 뒷전에서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겠소.” 자숙해야 포용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나부터 뒷전에서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해방일기> 2, “1945. 12. 13”)

 

신속한 처단을 요구한 반면 처단 기준에서는 관대함을 주장했다고 나는 본다. 김인식은 안재홍의 19492월 글에 특사(特赦)”라는 말이 나오는 데 주목한다. (“안재홍의 만민공화의 국가상”, 정윤재 등 공저 <민족에서 세계로>, 141)

 

우리의 조국 재건 대업이 만일 순조로이 성취되었다면, 8-15 직후 반민자 처단은 즉시 실천되었다가, 대한민국이 내외적으로 정식 승인을 받고 있는 이즈음에는 이미 特赦 시기에 들어갔어야 하겠는데, 그 선후가 전혀 전도된 것은 전 민족의 불행사이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도 반민법에 의하여 반민자를 신속 처단한다는 것은, 국민을 警醒하고, 의혹 중에 불안 방황하고 있는 일반 반민 혐의자로 하여금 안심하고 재건 조국에 盡瘁하도록 할 수 있는 점에서 매우 필요하다. (...) 그러나 일제 침략 40년이라는 장구한 동안의 일인 고로, 50數歲의 연령을 가진 자는 책임 있는 시대를 전부 일제 치하에서 생활하여 온 것은 물론,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는 저마다 항일독립의 투사가 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조건이매, 이 점에 관하여는 법의 운용자가 일말의 佛心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반민자 처단에의 요망”, <선집> 2, 406-7)

 

안재홍은 민족 통합성에 저해되는 반민자(反民者)”라는 집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 집단이 계급으로 고착되어 있지는 않고 민족 대의에 포용될 수 있는 것으로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한 처단이란 민족 대의를 확인하는 첫 과정일 뿐이며, 극소수의 악질 범죄자를 제외한 뒤에는 약간의 흠이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반성을 포용하는 과정을 통해 민족 대의를 완성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친일파 처단에서도 안재홍의 주장은 중도적인 것이었다. 좌익에서는 범위가 넓고 제재가 강한 처단을 주장했고,(이북에서는 그 주장이 실행되었다.) 우익에서는 좁은 범위와 약한 제재를 주장했다. 좌익에게는 인적 자원을 아끼기 위해 더 포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우익에게는 민족정기 확립을 위해 처단을 분명히 하자는 입장을 취할 것을 안재홍은 요구했다. 이 요구는 어느 쪽에도 큰 효과를 일으키지 못했고, 그것이 좌우합작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안재홍의 동일 해방이라는 상황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렇게 단정할 일은 아니다. 국내 상황에 대한 안재홍의 판단이 타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점령군의 정책이 상황을 왜곡-변질시킨 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북에서는 소련군의 존재가 좌익의 강경노선을 북돋워 주었고, 이남의 미군정은 반민자 집단에게 자금력과 경찰력을 쥐어줌으로써 그 집단이 민족사회 내부의 해결책을 외면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친미적 기득권층으로 자라나게 했다. 안재홍이 판단을 잘못한 대상은 해방 당시 상황이 아니라 해방 이후의 상황이었고, 민족사회 내부의 상황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이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해방 후의 좌우합작 운동에서 안재홍은 우익을 자임했다. 그러나 해방 전 그는 민족주의 좌파로 자신을 규정하고 더러는 좌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천관우는 <민세안재홍선집> “해제에 이렇게 썼다.

 

다음은, 선생 논설에 가끔 나타나는 좌익” “좌경” “우익” “우경등의 어구, 그리고 선생 자신이 소속한 진영을 좌익으로 자처하고 있는 입장이, 오늘날의 그 사용례와는 역시 판이하다는 점이다. (...) 좌우익의 구체적인 내용은 국제정세나 국내체제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었다. 다만 1920년대 국내의 일반적인 사용례로는 (1) 친일파를 최우익”, (2) 자치론 등 타협적 민족운동을 우익”, (3)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좌익”, (4) 사회주의운동을 최좌익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선집> 1, 10)

 

어떤 체제에서든 기성체제에 대한 찬반 여부로 좌우가 규정된다. 프랑스혁명 직전 삼부회에서 좌우익의 구분이 처음 나타났을 때, 왼쪽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식민지체제 하에서는 식민지체제에 대한 저항 여부가 좌우익 구분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을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천관우가 위 글의 주에서 제시한 1925121일자 <조선일보> 사설에서 안재홍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운동자들을 현하 그 정치적 분야의 최좌익이라 할진대, 민족운동의 인사들은 그의 중앙당일 것이요, 소위 친일자류들은 그 최우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 오인은, 사회운동자와 민족운동자의 좌우의 양익이 있고, 그 외에 따로 친일자류라 범칭할 수 있는 자못 계선이 선명치 못한 일파가 있다고 평정함이 타당함을 믿으려 한다. 그는 (...) 그들 친일자류의 본질이 매우 모호 또는 번잡하여서 자못 선명한 파계를 형성치 못한 까닭이다. (<선집> 1, 93-94)

 

친일파는 정치적 지향성이 없는 집단이므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의미 있는 노선으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좌우익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우익으로 규정하는 것인데, “자치운동에 대항하여 신간회를 발기-창립하는 1926년 말부터는 비타협성을 강조하면서 좌익민족주의를 표방하였다고 한다. (김인식, “안재홍의 좌우익 개념규정과 이념정향의 변화”,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편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사상> 19) 안재홍이 자신에 대해 좌파”, 또는 좌익라는 표현을 쓴 것은 민족주의 노선 안에서 부차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에 그친 것으로 이해된다.

안재홍은 좌익을 사회주의운동또는 사회운동자로 표현했다.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평면적 대립관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영원히 대립, 평행할 兩個은 아니오, 早晩에 통과하여야 할 역사의 행진도정에서의 兩個이라 하여 적정한 조합(調合)이 가능하다고 했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선집> 2, 29) 그는 역사 발전에서 계급투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의미가 계급투쟁의 도구에 그친다고 하는 공산주의 관점에는 반대했다. 계급차별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꼭 국가를 철폐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각 민족이 자기 국가 안에서 계급투쟁을 벌일 수 있다고 했다.

 

계급분열 계급투쟁이 잇는 곳에는 반듯이 국가가 잇다고 하엿으나 이것은 국가 즉 계급투쟁 유일 방편설이라고 일커를 바로서 그는 도리어 局見이다. 맑스가 무비판한 국가지상주의, 국가의 이름에서 모든 하층계급의 인민을 억압 착취하는 그 治者계급의 魂膽을 간파, 지적, 폭로 비판한 점으로서의 공로는 다대하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전적인 국가관이라고 승복할 수는 없다. (...)

국가가 사망하기 전에 금일의 부르조아국가에 代位하여서 푸롤레타리아국가를 성립시키어 푸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쳐하여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볼쉐비키혁명에 잇어 일차 실행되고 잇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역사 필수의 법칙도 됨이 않이오 또는 어느 국민이든지 반듯이 執定적으로 밟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천연의 약속 잇음도 않이다. 8-15 이후 조선이 맞닥드리고 잇는 역사와 사회 정세는 이러한 계급 대립이 없이 또는 어느 한 계급이 정권을 독점 전담하고서의 국가를 폐기에 一路銳意 추진한다는 것보담 차라리 수 계급이 계급으로서 대립투쟁하야 민족의 정력을 낭비하거나 다시는 위국의 간섭 지배의 禍因을 유발함이 없도록 계급투쟁을 민족투쟁 또는 민족통일 자주국가 완성에의 지양 회통함이 강대하게 요청되고 있다. (“독서초존”, <선집> 7, 322-323)

 

사회주의운동의 궁극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 좌우합작운동에서 안재홍의 입장이었다. 역사 발전의 과학적법칙을 내세우는 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안재홍은 과학적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그가 1930년대 들어 조선학에 큰 노력을 기울인 동기도 여기에 있었다. 민족의식이 주관적 정서에 그친다면 그 정서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내용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의 과학적 근거를 밝히는 데 할애되어 있다. 조선민족의 전통 속에 민주주의 정신이 들어 있었으므로 조선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를 내포하는 지향성을 가진다는 주장에 무엇보다 주력했다. 그 노력을 박한용은 이제 자신의 임무는 역사적 신단계에 즈음해 새로운 사회과학의 칼로민족주의를 근대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안재홍의 민족주의론: 근대를 넘어선 근대?”, <민족에서 세계로> 213) 그 노력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가?

 

 

신민족주의는 과학인가, 종교인가?

 

4개 장으로 구성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중 제2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가 절반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은 우리말 숫자의 어원에 관한 해설이다. 1~10, , , , 억의 의미에 대한 체계적 해설의 골자를 옮겨놓는다.

 

. 이니, ‘한울로서, 元始, 大世界로서의 이다.

 

. 이니, ‘’, 이다. 現語에서 原野이나, 上代에서 大地이다.

 

. 이니, ‘’, 혹은 씨앗種子이다.

 

. 이니, ‘나엇出生이다.

 

. 다섯이니, ‘다사리, 攝理治理이다.

 

. 여섯이니, ‘여어서, 持續이요, 存續이다.

 

. 일곱이니, ‘일곱事爲興起成就到達이다.

 

. 여닯이니, ‘여닯여닫이요 여덜이다. ‘여닫開闔이라, 一開一闔歲功의 성취되는 바요, ‘여덜損益이니, 一損一益에 천하가 治安하는 것이다.

 

. 아홉이니, ‘아홉綜合이요 會通으로, ‘아울름에 좇음이다.

 

. 이니, 開展이요 顯現이다.

 

. 이니, 具全이요, 圓通이다.

 

. 즈믄이니, ‘에 좇음으로 을 이름이다.

 

. , ‘, 를 이름이다.

 

. 이니, ‘이요 至善이다. (<선집> 32-45쪽에서 발췌. 단 밑줄 친 글자는 오자로 보여서 정윤재, “안재홍의 조선정치철학과 다사리 이념”(<민족에서 세계로> 소수)의 인용에 따름.)

 

정윤재는 이 해설에서 인본사상”(1, 2, 3), “고유의 국가철학으로서 자유사상”(4), “한민족의 정치개념으로서 다사리 이념”(5), “持續事爲의 원리”(6, 7) 등을 읽을 수 있다고 위 논문에서 주장했다. 이것은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보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안재홍의 세계관과 정치철학이 이 숫자 해설에 잘 담겨 있고, 정윤재는 이것을 잘 읽어낸 것이다.

그런데 과학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봐야 한다. 과학 담론의 성립을 위한 필수조건의 하나가 반증가능성(refutability)이다. 담론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안재홍의 숫자풀이는 일부 음소(音素)의 존재에 근거를 둔 것인데 그 근거가 어느 정도 언어학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45년 당시에 비해 음운론 연구가 많이 축적되어 있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견강부회의 느낌을 받는 대목이 많을 것이다.

안재홍이 제창한 신민족주의는 민주주의 원리를 포괄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다. 그의 숫자풀이 중 이 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다섯다사리로 읽는 곳으로, 그 사상 표현의 핵심부로 볼 수 있다. “다섯이니, ‘다사리, 攝理治理이다.”에 이어 적은 내용을 보면, “의 합자(合字)로 보는 것도, “다섯다사리로 읽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고, “다사리다스림다 사룀의 양쪽으로 한꺼번에 풀이하는 것은 더더욱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 會議, 후대까지 존속하였나니, 漢字로는 이요, 吏讀로는 和白이다. “은 그 字義咸言으로, 萬民 모두 發言權 있음이요, “和白다사리表義이니, 방법으로서는 萬民다사리國政에 그 總意를 표명함이요, 목적으로서는 萬民을 모두 생활 및 생존하도록 하고 萬民共生道念을 표현함이니, 政治의 이념이 본대 萬民總言-大衆共生이라는 민주주의적 指導原理에 나온 것이다. “다사리- 治理原義, 强暴-僭越跋扈-亂動禁制하고, 平靜 安寧한 국가 사회로서 萬民共生-大衆共樂理想境을 목표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선집> 2, 37)

 

안재홍은 역사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대상이 중세사보다 상고사에 치우친 점을 두고 이진한은 유교와 같은 외래사상에 오염되지 않은 민족 순수의 시대였으며 일본인이 비난해 마지않는 반도인의 속성이 없는’, ‘대륙적 기상이 넘치던민족성의 원형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함께 사료가 별로 없다는 점이 역설적이게도 그로 하여금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논리를 펼칠 수 있는 자의성을 제공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민세의 한국 중세사 인식과 유물사관 비판”,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사상> 116) 안재홍은 표현하고 싶은 세계관과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고, 그 표현에 적합하고 편리한 영역을 조선학에서 찾았던 것이다. 유사과학(pseudo-science)의 길이다.

박한용은 2008년의 글 “<민세안재홍선집> 6-7권 해제를 대신해에 안재홍에 관한 기존 연구를 개관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어떤 이들은 안재홍 등을 고대적인 단군 숭배에 근대 민주주의의 가치를 불어넣음으로써 단군민족주의로 근대화시키고, 한국 민족주의에 보편성의 계기를 부여한 인물로 적극적으로 파악한다. 또한 혈연적 동일성을 매개로 좌우 연합전선에 기여하고 사회-국가 체제의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진보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안재홍이 전통을 통해 근대를 완성하려다 전통 그 자체의 함정에 빠져버렸고, 그 결과 민족종교를 통해 사회의 통합성을 뒷받침하려 했다는 점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 (<선집> 7, 336)

 

이 대목은 박한용의 앞선 글 안재홍의 민족주의론: 근대를 넘어선 근대?”에도 그대로 나왔던 것이다. (<민족에서 세계로>, 244) “안재홍이 실패한 지점에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는 박한용의 지적은 신랄하면서도 적절하다. 안재홍이 해방공간에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고 그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시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지적에 동의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그 실패 원인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실패에 가려졌던 그 사상의 가치를 되살려낼 여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다시 생각해보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시대 변화에 대한 안재홍의 거시적 관점을 19356월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세기 현 단계의 인류문화의 특징은, 각개민족의 세계적 大同의 방향, 즉 국제주의적 방향에 향하여 자동적 求心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이요, 그 반면에 각개민족이 이 세계적 즉 국제적 영향 하에 있으면서 오히려 각각 각자의 민족문화로서 純化 深化하려는 의욕 및 그 노력 중에 있는 것입니다. , 가장 온건타당한 각 국민 각 민족의 태도는, 민족으로 세계에, 세계로 민족에, 交互되고 調合되는 민족적 국제주의 - 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狀勢이니, 이를 세분하여 말한다면, 가장 핍근하게 상대되는 1국가 1국민과의 관계에 그러하여, 주면서 받고 다투면서 배우는 연속하는 途程에서, 자기의 향상과 발전이 있고 획득과 생장이 있는 것이요, 전 세계 전 국제에 처해서의 1국민 1민족으로서도 그러한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가 그 교통 통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멀지 않은 미래에 국가와 민족의 界線을 철폐하는 시기가 있음이 미래의 形相이라고 치더라도, 금일에 吾人은 우선 세계의 1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순화 향상의 길을 강맹하게 걸어 나아가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미래를 지나 금일에”, <선집> 1, 512)

 

교통 통신의 발달을 통해 세계화의 전망을 세우면서도 그 진행 과정이 기계적,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국가-민족 단위의 발전이 서로 어울려 유기적, 점진적으로 진행된다고 본 것은 20세기 세계의 변화 방향을 적절하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식 위에서 그는 민족주의라는 조선의 특수성이 어떻게 세계사의 보편성인 민주주의를 담지할 것인가 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회통의 문제”(박한용, “안재홍의 민족주의론”, <민족에서 세계로> 218)를 추구하게 된 것이었다.

변화의 방향은 잘 읽었지만 그 속도를 너무 낙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위 글을 쓴 10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그는 자본주의도 문제점을 드러냈고 공산주의도 모순을 드러냈으므로 지양-회통의 새로운 길을 찾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안재홍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일반인도 가졌던 것이었음을 19468월의 여론조사에서 읽을 수 있다. 해방 1주년을 맞아 군정청 여론국에서 실시한 조사 중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아래와 같은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 자본주의 1,189(14%)

() 사회주의 6,037(70%)

() 공산주의 574(7%)

() 모릅니다 653(8%) (<동아일보> 1946. 8. 13)

 

사회주의를 선택한 사람 중 대다수는 사회주의를 좌익 체제로 보기보다,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절충하는, 제한된 범위에서 소유권을 인정하는 체제로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의식 위에서는 민족주의가 1차적 이념으로 성립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부차적인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므로 안재홍의 지향이 적절한 것이었다.

문제는 서구의 근대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적대적인 근대가 경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고 박한용은 지적한다. (“안재홍의 민족주의론” <민족에서 세계로> 202) 그것이 당시 국제정세의 현실이었다. 변형된 형태의 제국주의시대라 할 수 있는 냉전시대가 그 후 수십 년간 펼쳐진 사실을 지금의 우리는 알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강대한 힘이 배타적 선택을 전 세계에 강요한 그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1차적 이념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냉전이 끝난 지 30년이 되어 간다. 아직도 한반도는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냉전 논리가 세계적 확대재생산을 멈추었기 때문에 냉전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냉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냉전 논리가 학술 연구를 얽매는 힘도 컸다는 사실을 냉전이 끝난 후 제기되는 새로운 관점들에 접하며 새삼 깨닫게 된다.

사회주의 이론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악셀 호네트는 <사회주의 재발명>에서 사회적 자유를 말한다. 장석준은 이 책 리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에 대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응수는 '사회주의'라는 작명 안에 집약돼 있다. 한 마디로 사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들은 이미 '함께' 살고 있다. 사회를 이룸으로써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이는 더욱 절실해진다. 개인적 자유 관념은 이런 진실에 눈 감는다. 그래서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로 나아간다. 이것이 참된 자유일리 없다.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 누려야만 진정한 자유다.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자유다. 한데 호네트는 사회적 자유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상대방에게 끼칠 피해를 걱정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된다. '서로를 위한' 행동을 하면서 삶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이 경험을 지속, 확대하려 노력하게 된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원리가 중심이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사회다워진다고 믿었다. (“사회주의의 해체인가 재발명인가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2171)

 

인간적 가치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실현된다고 보는 이런 관점은 안재홍의 지양-회통관념과 통하는 것이며, 민족국가 확립의 목표를 좌우대립으로부터 초연한 위치에 설정하려는 안재홍의 의도와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해방공간의 좌익에게도 받아들여지기를 안재홍은 바랐을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 자오팅양은 <천하체계-21세기 중국의 세계 인식>(노승현 옮김, 길 펴냄)에서 근대 정치철학에 세계정치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철학의 이념이 없는 곳은 반드시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서양의 정치철학이 주도하는 세계는 반드시 혼란스러운 세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제도가 있고 관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세계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지만, 지리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세계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황무지가 되거나 멋대로 약탈하고 쟁탈할 수 있는 공공 자원이 되거나 정복을 일삼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난제이다. 즉 전체적으로 무질서한 세계이자 정치적 의미도 없는 세계는 단지 폭력이 주도하는 세계일 뿐이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세계가 되지 못한다. 마치 국가는 국가 제도 때문에 국가가 되는 것처럼 세계는 세계 제도 때문에 세계가 되는 것이다. (31-32)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정치를 향한 정치철학의 발전이 냉전으로 막혀 있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에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계 차원에서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해주는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의 자기파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전체제 아래서는 세계정부가 설 자리가 없었고 유엔의 권능도 자라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방향의 연구도 발전할 수 없었다.

신민족주의를 향한 안재홍의 논설은 당시 조선인의 민심에 부합할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의 변화 방향에도 맞는 것이었다. 그의 실패의 원인은 그 이념 정합성의 부족이 아니라 한반도가 냉전의 와중에 말려든 현실에 있었다. 한반도가 냉전의 초점 아닌 제3세계에 있었다면 안재홍의 노력이 그렇게 허망한 실패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적 냉전 구조가 해소된 이제 그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음미하는 것이 냉전의 여파를 걷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바라볼 때가 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