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언어는 흔히 ‘공식 언어’(lingua franca)와 ‘지역 언어’(vernacular)로 구분되어 있었다. 공식 언어는 문명의 상부구조에 쓰인 것이므로 하나의 문명권에 공통되는 언어였고, 지역 언어는 각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쓰이는 언어였다. 중세문명은 상부구조와 주민의 일상생활 사이의 거리가 컸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가 따로따로 사용되었다.


근대화는 문명의 상부구조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공식 언어가 퇴화하고 지역 언어가 공식화하는 변화를 수반했다.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을 계기로 성서가 지역 언어로 번역되면서 지역 언어가 발전의 계기를 맞았고, 18세기 들어 외교와 학술을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를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15세기 중엽의 훈민정음 제정도 지역 언어의 공식화로서 근대화의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공식 언어인 한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기층문화의 성장과 발전이 훈민정음 제정을 촉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화’는 물론 급격한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유럽식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 농업사회 체제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나름대로 중세 체제의 해체 현상이 일어난, 넓은 의미의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해 시조와 소설 등 한글 문학이 자라난 과정을 보면 한글 공식화의 필요에 대한 세종의 판단은 충분한 근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간의 한글 사용은 늘어나는 반면 한글의 공식화 작업은 세조 이후 지체되었다. 중세적 천하체제의 핵심 원리인 성리학이 지배층의 담론을 독점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개항기에 이르러 국어(國語)로서 지역 언어의 역할이 갑자기 부각되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담기 위해 기능성이 뛰어난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문의 본고향인 중국에서도 백화문의 역할을 키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글이라는 ‘준비된 근대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근대화의 충격 속에서도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은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주시경(1876~1924)이 1896년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며 한글 연구에 착수하게 된 것이 의미심장한 일이다. 독립신문의 한글 사용에는 그 전과 다른 수준의 엄밀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 주시경의 연구업적이 한글의 현대적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 한글 연구자들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세움으로써 한글 연구와 보급의 조직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사업이 “우리말광”이란 이름의 사전편찬 작업이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결성으로 시작된 이 작업이 완성을 바라보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1930년대까지 조선어 사용과 연구를 별로 탄압하지 않았다.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에 조선어-조선문학과를 두어 연구 기반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이것은 당시의 식민통치가 종속주의였기 때문이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7쪽에 이렇게 썼다.


일본의 학자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정책을 종속-동화-자주의 3주의로 나누고, 종속주의의 전형을 18세기 말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식민정책에서 찾았는데, 한국은 야나이하라가 말한 동화주의와 자주주의의 범주에 들기는커녕, 종속주의의 경우에도 가혹한 예에 속할 것이다. 야나이하라는 종속주의를 식민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식민활동을 하는 주의로 정의하였지만, 일제는 시종일관 경찰과 군대에 의한 직접통치 아래 수탈정책-‘동화주의’-황국식민화정책을 강행하였다.


종속주의 식민통치에서는 동화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수탈의 효율성에 도움이 되는 통치 대상의 연구를 꺼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1937년 이후 전면적 전쟁 상태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동화를 강조하게 된다. 원론적인 동화주의도 못 되고, 극한적 동원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탄압할 필요가 떠올랐고, 조그만 빌미를 잡아 한글 연구자와 그 협력자들을 일망타진한 것이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1945년 1월 함흥지방재판소에서 11명에게 내린 내란죄 등 명목의 판결문에는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 사건은 일제 말기 식민통치의 폭력성과 혼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건 와중에 압수되었다가 종적을 감췄던 사전 원고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1929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여러 한글학자들이 애써 만든 원고의 일부는 영영 찾지 못했지만 대부분이 발견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1947년 10월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이 발간되었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0년 후인 1957년 10월까지 여섯 권이 모두 나왔다. 현대 한글의 모습이 처음으로 정리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조선어학회의 김병제는 원고 발견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만 3년 전 즉 1942년 10월 1일에 李允宰, 한승, 李克魯, 崔鉉培, 李熙昇, 鄭寅承, 金允經 제씨를 함경남도 洪原경찰서에서 검속하였습니다. 이분들 외에도 조선어학회에 관계하고 있던 여러분이 같이 검속되었는데 그 때 증거물로 말광 원고를 압수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함흥 지방법원 검사국에 송국된 후 재판결과는 최고 6년 최하 2년의 극형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윤재와 한승 두 분은 잔인무도한 학대로 인하여 우리말광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원한의 눈을 감지 못한 채 옥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은 여러분은 가진 곤경을 참아 가며 학자로서의 정의를 밝히고 초지관철을 위하여 경성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광원고는 증거물로 금년 7월 28일에 서울로 전송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의 길이 열린 8월 15일에 석방되어 상고 중이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제씨는 서울로 올라오자 말광원고를 전력을 다하여 찾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도 일본관헌의 방해로 찾을 길이 아득하여 일시는 매우 염려되던 차에 정성과 이 꾸준한 노력의 보람으로 10월 2일 만2년에 경성역에 있는 조선운송주식회사(朝運) 창고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상고하지 않았더라면 찾을 수 없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제씨와 내가 주간이 되어 완성을 기하기로 되었는데 4·6배판으로 약 6,000 페이지나 되는 것으로 일본제국주의 하에 된 것인 만큼 註釋에 수정할 것도 있어 좀 시일이 걸리겠습니다. 그러나 인쇄가 원활하면 넉넉잡고 2년 만에는 출판되리라고 믿습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06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