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보다 천하를 생각할 때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나 ‘국익(國益)’을 ‘공익(公益)’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이 점을 반성하기 위해 국익에 관한 맹자와 양혜왕의 대화를 되새겨 본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선생께서 천리를 머다 않고 오셨으니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지신 것이겠지요.” 할 때 맹자가 “임금께서는 왜 꼭 이로움[利]을 말씀하십니까. 어질음[仁]과 옳음[義]이 있을 따름입니다.” 대답한 장면이다.

 

현대인은 이 이야기에서 맹자의 비현실적 도덕주의를 읽는다.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도덕적 가치를 현실적 국익에 앞세우는 자세를 보며 “역시 어수룩한 시절이었어.” 생각한다. 하지만 맹자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제들이 근년에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환경 오염, 자원 한계, 핵 위협, 경제 불안 등. 인민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어질음과 자연과 잘 어울리려는 옳음이 경제적 이익에 밀려나기 때문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작게 끝나야 할 일이 커지는 것이다.

 

맹자가 스승 자사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무엇을 앞세워야 합니까?” 물었더니 “먼저 이롭게 해주느니라.” 대답한 일이 있다. “임금의 백성을 가르침이 어질음과 옳음에 있을 뿐인데 어찌 꼭 이로움이겠습니까?” 맹자가 캐묻자 자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질음과 옳음도 사실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수단이니라. 위에서 어질지 아니하면 아래에서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고 위에서 옳지 못하면 아래에서 속이기를 즐겨하게 될 것이니, 그 이롭지 못함이 크지 않은가. 그러기에 <주역>에 이르기를 ‘이로움은 옳음의 어울림’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롭게 쓰고 몸을 편안히 함은 덕을 받드는 길’이라 하였으니, 이 모두 이로움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仁義 固所以利之也 上不仁則下不得其所 上不義則下樂爲詐也 此爲不利大矣 故 易曰 利者 義之和也 又曰 利用安身 以崇德也 此皆利之大者也)

 

스승인 자사는 이로움의 중요성을 앞세웠는데, 제자인 맹자는 후에 양혜왕에게 이로움을 앞세우지 말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맹자가 자사의 가르침을 버린 것일까? 뒷날 사마광은 이렇게 풀이했다.

 

“자사와 맹자의 말은 같은 것이다. 무릇 어진 자라야만 어질음과 옳음의 이로움을 알고 어질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맹자가 양혜왕에게 대답함에 바로 인의를 말하고 이로움을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하는 상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子思孟子之言 一也 夫唯仁者 爲知仁義之利 不仁者 不知也 故 孟子之對梁王 直以仁義而不及利者 所與言之人 異故也)

 

자사와 맹자 같은 프로선수끼리는 인의와 이익의 미묘한 선후관계를 거리낌 없이 논할 수 있지만 양혜왕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정확한 대답보다 명확한 대답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 자사가 이로움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정치의 목적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는 원론이다.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인의를 앞세워야 한다는 데는 자사와 맹자의 생각이 같다. 목적이어야 할 이로움에 방법에서부터 매몰된다면 그 이로움은 공익(公益) 아닌 사익(私益)이 될 위험이 크다. 천하의 이로움보다 특정 국가의 이로움이 되고 백성의 이로움보다 위정자의 이로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익을 앞세우지 말라는 맹자의 말씀을 우활한 것으로 현대인이 보는 까닭은 근대적 국민국가의 현상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근대세계에서는 ‘국익’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맹자는 ‘국익’도 공익보다 사익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자기 나라의 국익에 지나치게 매진하는 것이 천하의 공익을 해칠 수 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제국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세계는 국익 추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세상이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익을 넘어선 ‘세계질서’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20세기 후반에 자원과 환경 문제들이 부각됨에 따라 더욱 절실해졌다. 자오팅양의 <천하체계>에는 국가를 최종 단위로 여기던 근대 정치철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세계에서 중국이 공헌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는 새로운 형태의 대국, 세계를 책임지는 대국, 세계사에 출현한 갖가지 제국과 아주 다른 대국이 되는 것이다. 세계를 책임지는 것은 단지 자신의 국가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에서 중국 철학의 관점이고 실천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천하’를 정치/경제적 이익에 관한 분석 단위로 삼아 문제를 분석하여 서양의 민족/국가의 사유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를 책임지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결여되었던 이 세계의 가치관이자 질서였다. 일찍이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는 지금까지 모두 국가 이념만 존재했다. 따라서 모두 자국의 이익만 고려했기 때문에 세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영국과 미국은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합법성도 없었고 특히 철학적인 합법성도 없었다.”

 

맹자가 ‘인의’를 앞세운 것은 공익과 사익의 판별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의에 어긋나는 이익은 사사로운 이익일 뿐이며 천하의 공익에 해로운 것이다. 양혜왕이 이익을 앞세울 때 자기 한 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말도 되지 않는 암군(暗君)이다. 자기 나라 전체의 이익을 꾀할 정도의 명군(明君)이라는 가정 하에, 이익을 앞세우지 말 것을 맹자는 권했다. 그 나라의 국익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천하의 공익이 훼손될 수 있으니, 인의의 실천에 힘을 쏟으며 그 결과로 이익이 저절로 생겨나게 하라는 것이었다.

 

 

2. 투쟁보다 협력을 생각할 때

 

1990년대 초, 동유럽 공산권과 소련의 붕괴 등 세계정세의 구조적 변화 앞에서 미국 사회과학자 두 사람의 담론이 세계를 휩쓸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의 담론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후쿠야마의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에 입각한 담론이 아니라 역사의 단선적 발전에 대한 근대적 믿음을 ‘미국 자본주의 승리’에 뒤집어씌운 나팔수 노릇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행로가 어지러워지면서 후쿠야마의 담론은 다시 거론할 가치가 없게 되었다.

 

헌팅턴의 담론은 현실의 관찰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아직도 음미할 여지가 남아있다. 냉전시대에 진영 논리에 갇혀있던 문명의 잠재적 역할을 냉전 해소 직후의 몇 개 국지적 분쟁에서 읽어낸 것은 훌륭한 통찰력이다. 그러나 그 또한 문명 간의 관계 전개를 “충돌”로만 본 것은 근대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였다.

 

후쿠야마와 헌팅턴의 담론이 풍미하던 1990년대 중엽까지 월러스틴 등의 세계체제론은 사회과학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파탄이 드러나는 데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립되면서 근대자본주의와 다른 경제발전 경로까지 밝히고 있다. 프랑크의 <Reorient>(1998)와 포머런츠의 <The Great Divergence>(2000)가 새로운 시야를 열었고, 아리기의 <Adam Smith in Beijing>(2007)은 더 면밀한 시각을 확보했다.

 

세계체제론의 확장에 따라 근대자본주의를 문명발전의 유일한 진로로 보던 믿음이 무너지고, 그 믿음에 얽혀 있던 근대적 세계관도 퇴조하고 있다. 원자론에 입각한 근대적 세계관은 물질세계가 독립적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인간세계도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사회의 조직도 독립적 국가를 위주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헌팅턴이 장래의 세계구조에서 문명권의 역할을 떠올리면서도 그 사이의 관계를 “충돌”로만 본 것은 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돌턴이 발표한 원자론은 19세기 유럽 사상계를 지배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도 원자론의 틀에 맞춰 형성되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원자론은 물리학계에서 힘을 잃었지만 사상계로 번진 원자론의 여파는 20세기까지 계속되며 세계로 퍼져나갔다. 19세기에 구축된 자본주의 세계체제도 20세기까지 세계를 지배했다. 독립주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체제도 마찬가지였다.

 

물질세계나 인간세계나 원자론적 원리와 유기론적 원리가 어울려 작용한다는 것은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안정성을 가진 사회조직은 이 두 가지 원리를 함께 작동시킨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근대적 조직 원리는 원자론에 치우쳐서 안정성에 한계를 가진 것인데,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생산력 발전의 배경 위에서 일시적으로 성립한 체제다. 경쟁을 제1원리로 삼는 국가체제도 마찬가지다.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부딪친 21세기 상황에서는 유기론적 원리의 보강이 필요하다. 중국 지도부가 근년 제기해온 “화해(和諧)세계” 구호에 이 필요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음을 ‘1帶1路’ 사업의 진행방법에서 알아볼 수 있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경쟁과 대결 위주의 지속성 없는 국제관계가 전개된 사례는 전국시대 말기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나타난 바 있다. 낭비적 전쟁을 최소화하는 춘추시대 이래의 전통을 뒤집고 진나라가 이 정책을 채택한 것은 철기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 발전 덕분이었다. 잉여생산력 소화를 위해 전쟁의 대형화를 추구한 이 노선은 기원전 3세기 초 진 소양왕에게 채택되어 기원전 2세기 말 한 무제의 흉노 원정까지 계속되었는데,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세계적 전쟁시대와 방불하다.

 

국가 간의 맹목적 경쟁과 대립을 억제할 필요는 1차대전 때부터 인식되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등을 통해 대립의 완화가 시도되어 왔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다. 앞에 인용한 자오팅양은 근대 정치철학에 ‘세계정치’ 개념이 취약한 점을 지적했는데, 구체제의 관성 속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기득권세력의 반동적 저항이 최근까지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효과를 거둬온 것이다. 근년 들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구체제 핵심국가들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이 저항이 마지막 한계에 도달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중국과 한국은 긴 역사를 통해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서로 뒤얽힌 관계를 펼쳐왔다. 19세기 후반 ‘서세동점’ 상황에서 강요된 ‘만국공법’ 체제는 이 특별한 관계를 부정하고 표준적 국제관계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강요된 조건으로 인해 두 나라는 이웃 간의 신뢰와 협력을 통해 혜택을 나눌 기회를 빼앗겼다. 국교가 수립되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세의 요구에 따른 불편함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사드’ 배치 문제에서 확인한다.

 

 

3. 잃었던 시간을 되찾을 때

 

근대세계에서 역사학은 많은 일자리를 품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그 일자리는 대개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활동 목적을 국익에 맞추라는 압력을 일반적으로 받게 된다. 이 압력의 노골성과 변덕스러움은 상황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지만, 완전한 무압력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맥밀런은 <The Uses and Abuses of History>에서 역사학이 정체성 확보와 강화에 이용되는 역할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는 ‘상상의 공동체’를 강요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면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민족이 ‘태곳적’부터 아득한 곳에서 늘 존재해왔다고 입맛대로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 집단을 조사해 봐도 정체성은 과정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집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적 발전, 종교적 각성, 외적 압력에 따라 정체성을 규정하고 다시 규정한다.”

 

‘상상의 공동체’가 나왔으니 ‘발명된 전통’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만들어내는 전도된 현상이 전통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표현처럼, 역설적이게도 ‘민족주의는 현대의 것이지만 자기 스스로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민족주의를 먹여 살리고 있는 역사는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용한다. 그것들 중에는 대개 사실인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민족이 오랜 세월 온전하게 존재해왔다고 확인시키거나 민족이 앞으로도 존속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오는 러시아인들의 재미있는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과거를 지닌 나라에 살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실감나는 말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난 11월 7일은 소련시대 국경일이었다. 옐친은 이 기념일을 없애고 싶었지만 공휴일을 없애 서민들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 ‘화합과 화해의 날’로 바꿨다. 푸틴은 2005년 그 날짜를 당겨 11월 4일을 ‘국민통합일’로 지정했다. 현재의 정치상황이 과거의 기념일을 바꾼 것이다. 한국의 건국절 논란이나 중국에서 악비(岳飛)에 대한 평가의 추이를 보면 과거를 예측하기 힘든 것은 러시아인들만이 아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이 있다. 많은 역사학도의 마음을 설레게 한 이 말이 근대적 역사관의 큰 질곡 하나를 담은 것임을 나는 근년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과거’를 왜 ‘현재’와 격리된 실재로 세워야만 하는 것인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가 카 자신에게도 석연치 않았던 모양이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그의 근대적 관념 속에서 ‘현재’란 과거와 미래 사이를 구분하는 점으로, 실체가 없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뜻한 것은 “미래와 과거 사이의 대화”이며, 역사가의 상상력이 미래의 역할을 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를 카처럼 보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으며, 카의 관점은 근대인의 오만을 표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인간의 인식능력이 무한히 발전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니 역사학의 과학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도 시간에 대해, 진보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카와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을 가진 역사학도에게 나는 의미있는 작업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을 갖고는 과거와의 스킨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역사산업에서는 재생산된 현재가 역사학의 탈을 쓰고 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에 카와 같은 관점이 유행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근대역사학은 종전보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다. 민족과 문명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난 상황 때문이었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에게 민족의 영광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사’를 경쟁적으로 개발했고, 이 경쟁에 ‘과학성’이 동원되었다. 그래서 근대역사학은 유사과학(pseudo-science)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성격을 더욱 강화한 것이 계급투쟁을 제창한 유물사관이었다. 20세기의 한국사 서술은 일본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출발했다. 과학성을 위장한 식민사관이 1945년까지 학계를 지배한 것은 물론이고, 이에 반발하는 민족사관 역시 이 시대배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한국의 영광’을 외치는 역사 담론 중에는 과거 ‘일본의 영광’을 부르짖던 제국사관의 틀을 안팎만 뒤집어 그대로 쓰는 것이 많다. (...) 내가 잘나기 위해 남을 깎아내려야 하는 계량적 사고는 사이비 과학성의 등에 업혀 근대역사학을 삭막한 싸움터로 만들어왔다.”

 

카의 시간관을 배척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시간관을 가졌냐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확실한 대답이 없다. 사람마다 얼마간씩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나 자신도 명확히 단정하지 못하는 점들이 있다. 그러나 카와 다른 점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과거는 현재와 격리될 수 없고, 현실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개인으로서 내가 과거에 겪은 일을 지금의 나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사회도 과거의 축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도 나는 이 생각 위에서 바라본다. 한국에게 지금 최대의 교역 상대국으로서의 중국, 적대국 “중공오랑캐”로서의 중국, 항일운동의 동지로서의 중국, 조공 대상국으로서의 중국, 문명 전수자로서의 중국,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뒤얽혔던 이웃으로서의 중국, 모두 현실 속의 한-중 관계를 구성하는 부분들이다. 그 전체를 보기 어렵게 만드는 장벽이 하나 있다. 19세기 후반 만국공법 전래 이후 동아시아인들이 길들여진, 국가를 완전한 독립체로 보는 관념이다. 이 관념에 얽매여서는 19세기 이전 두 나라의 관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두 나라 관계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꼭 생각해야 할 점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