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論

 

<中國誌> 520-21장에는 리치의 죽음과 그 직후의 관련된 일들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는 물론 리치 자신의 기록이 아니고 판토하, 우르시스, 롱고바르디 등 리치 주변 선교사들의 기록과 증언을 트리고가 정리한 것이다. 이를 통해 리치가 죽을 당시 중국 선교단이 처해 있던 상황과 선교사들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리치는 1610511일에 세상을 떠났다.[473] <中國誌> 520절에 그가 죽기 전까지 얼마나 일에 열심이었는지, 그리고 죽음에 임하여 얼마나 경건한 태도를 지켰는지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리치가 후계자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유럽으로부터 새로 도착하는 선교사들에게 사려 깊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기존 선교사들의 편협한 태도를 불안해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473] Pfister, Dehergne, 모두 <中國誌> 563-564의 기록에 따라 리치의 죽음을 511일의 일로 보았으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 <中國誌> 568에 수록된 판토하의 탄원서에는 ()318일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양력으로 411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3월에는 윤달이 있었는데 윤3월의 18일은 510일이었다. 판토하의 탄원서가 비상히 빨리 처리되어서 제출한 지 한 달이 안 되어예부가 황제에게 答覆한 날짜가 ()423(양력 614)이었다고 하는데, 리치가 죽은 후 탄원서를 제출하기까지 걸렸을 날짜를 생각하면 윤318(510)보다는 본318(411)이었을 가능성이 크게 보인다.

또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고회사로 활약하고 있던 동료 예수회사 코통[474] 신부를 들어 나는 프랑스 궁정에서 일하고 있는 코통 신부에게 주님 안에서 크나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중국에서 노력해 온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고 싶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의 入敎, 그리고 그에 따를 위로부터의 개종에 얼마나 큰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475]

[474] Pierre Coton. 프랑스 왕 앙리 4(부르봉 왕조의 첫 왕. 1589-1610 재위)의 치세 후기에 왕의 고회사로서 프랑스 궁정뿐 아니라 유럽 가톨릭 세계의 움직임에 큰 작용을 한 예수회 신부. W Bangert,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sus (St Louis, 1986): 123-131, R Fulop-Miller, The Power and Secret of the Jesuits (New York, 1930): 360-363, M Harney, The Jesuits in History (New York, 1941): 184-6, J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New York, 1983): 161, 214 등에 그의 활동이 서술되어 있다.

[475] <中國誌> 563.

리치가 죽을 때 선교소에 모인 신자들이 울음과 슬픔을 억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슬픔이 지나치게 드러나 보일 경우, 신앙의 진실성이 손상되고 리치 신부의 영광이 흐려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북경의 선교소가 그 본래의 목적을 공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신앙의 눈에 띄는 표현을 삼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76] 1년 가까이 지난 후 묘지가 확보되어 운구할 때도 조심스러운 태도가 일관된다: “리치 신부의 유해가 담긴 관은 1년 가까이 선교소의 예배당 제단 옆에 놓여 있었다. 신부들이 묘소의 집을 순조롭게 장악한 뒤 유해가 그곳으로 옮겨져 교회 법규에 맞는 묘지가 만들어지고 예배당이 만들어질 때까지 보관되었다. 장례식보다 개선행렬에 어울리는, 중국인의 요란하고 화려한 풍습은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런 豪奢는 종교적 예법에도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선교소의 재정상태에도 어울리지 않았다.”[477]

[476] <中國誌> 564.

[477] <中國誌> 588.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지 못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했지만, 이처럼 열심히 이유를 설명하려 든 까닭은 화려하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최근 몇 해 동안 韶州南昌에서 두드러진 선교활동이 주민들과의 갈등을 가져왔던 사정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478]

[478] 韶州南昌의 분규에 대해서는 <中國誌> 460-466, 522-535, 554-560 .

리치는 죽기 몇 해 전 선교단 묘지를 장만하려고 계약까지 했다가 무슨 문제인가가 생겨서 포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479] 이제 리치가 죽자 묘지 문제가 생겼는데, 여기서 황제에게 葬地下賜를 청원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479] <中國誌> 565.

장례 미사에 참석했던 많은 신자들 가운데 황궁의 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뛰어난 신분의 학인 한 사람이 혹시 황제께서 리치 신부에게 장지를 하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집에 돌아간 뒤에 했다. 그런 일이 이뤄진다면 이 나라에서 선교단과 신앙의 합법적인 존재도 확인하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부들에게 제안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선교소로 돌아가 신부들에게 자기 의견을 내놓고, 이처럼 중요한 시도에 노력을 쏟아보고 그 결과를 기대해 볼만하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신부들은 그와 의논해서 황제에게 보낼 탄원서의 초안을 만든 다음 이것을 리치 신부가 최근에 세례 준 李之藻에게 보내 올바른 문체로 다듬어달라고 부탁했다. 우아한 문체의 소유자로 평판 있는 관리인 李之藻는 탄원서를 다듬어주고 신부들의 시도에 찬성했을 뿐 아니라 그 추진을 도와주겠다고 자원했다. 그 후 그는 조정에 있는 동안 이 일의 진척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어서 신부들은 탄원서를 가장 영향력 있는 친구 몇몇에게 보여서 그들의 의견이 어떠한지, 너무 주제넘은 일을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지 알아보고, 또 그들이 찬성할 경우 장차 그 일을 추진할 때 그들의 협조를 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찬성하고 그 추진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는데, 이런 일에는 위험이 개재되는 수가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480]

[480] <中國誌> 567.

탄원서의 감수를 빙자해서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한 것이다. 선교단장 서리 판토하의 이름으로 작성된 탄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臣 龐迪我泰西 사람으로서 얼마 전에 죽은 같은 泰西사람 하나를 위해 삼가 이 탄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올립니다. 폐하의 넓으신 도량에 의지하여 바라옵는 바는 이 사람에게 葬地下賜해 주심으로써 폐하의 어지심이 천하의 어느 곳에서 온 사람도 다 덮어주실 수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臣 龐迪我는 먼 나라 출생으로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이 위대한 나라의 名聲을 흠모하여 3년의 항해로 구만리의 바다를 건너,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뛰어넘은 끝에 萬曆 2812, 利瑪竇 및 다른 동료 셋과 함께 폐하의 都城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신들은 저희 고향에서 가져온 초라한 方物 몇 가지를 폐하께 進貢하였으며, 그 이래 皇家柴粮을 지급받아 왔읍니다.

萬曆 38318일에 利瑪竇老病으로 세상을 떠나매 먼 나라에서 온 孤兒처럼 남겨져 萬人의 동정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屍身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나 그 긴 航路에 선원들이 屍身을 배에 실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들이 오랫동안 폐하의 그늘에서 살아온 것을 생각해서 폐하의 백성처럼 여겨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들을 살아있는 동안 먹여 살려 주신 것처럼 들이 죽은 뒤에도 몸 덮을 흙 한 자락을 베풀어 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감히 이런 바램을 가지는 것은 의 동료 利瑪竇가 중국 도착 이래 중국의 학문을 연마하는 데 게으름이 없었고 중국의 經典에 적힌 을 닦는 데 온 힘을 다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遠方에서 온 들이 지금 누리는 것을 넘어 어찌 더 바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죽은 동료를 매장할 땅 한 조각이 없음을 슬퍼하며 눈물로 폐하께 앙청하옵나니, 亡者를 묻을 곳을 정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살아있는 저희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앞서 죽은 동료의 모범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맹서합니다. 그가 했던 그대로 폐하와 태후 전하의 만수무강을 천주님께 기도하면서 폐하 아래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합니다. 이처럼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비록 개미처럼 미미한 저희들이지만 감격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게 클 것이며, 그 은혜를 한 순간이라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폐하의 뜻을 엎드려 기다립니다.”[481]

[481] <中國誌> 567-569.

死者를 공경하고 屍身 처리를 중시하는 중국의 관습, 그리고 천하만민을 赤子로 여기는 중국의 통치이념에 호소하는 요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중국에 체재하는 이유가 중국의 문화를 흠모하는데 공식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일 진행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東閣大學士로 있던 葉向高였다.[482] 政事의 처리에 별 열의가 없는 神宗황제에게 그의 작용이 없었다면, 아무리 이 탄원을 지지하는 관리들이 많았더라도 그렇게 신속히 처리될 수 없었을 것이다.[483] 그리고 또 한 사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都御史라는 신분만 밝혀져 있고 d'Elia에 의해서도 누구인지가 고증되지 않고 있는데,[484] 曹于汴일 가능성이 크다.[485] 그리고 이 일을 관장한 禮部의 상서 吳道南李之藻의 설득으로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486]

[482] 1562-1627. 그는 南京에서부터 선교사들과 상당한 교분이 있었고, 나중에 福建省의 고향에 은거한 뒤에도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483] <中國誌> 577-578에 문서의 수발에 결재를 담당하는 照磨官의 임명을 황제가 비준하지 않고 있어서 일이 지체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은 편법을 써서까지 이 일의 진행을 서둘러주었다고 한다.

[484] 리치의 원래 기록에는 극히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 이름을 밝혀 놓았다. 대부분 중요한 인물은 d'Elia의 작업으로 고증되었다.

[485] 는 리치가 북경에 도착해서 환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부터 먼저 찾아와서 호의를 표시한 사람이며,(<中國誌> 377-378, 387-388) <畸人十篇> 5편의 상대방으로 나오는 曹給諫이기도 하다. 그는 吏科給事中左僉都御史, 左都御史 등의 직책에 오래 있었다.

[486] <中國誌> 572에 보면 원래 이 일이 황제의 下賜를 담당하는 호부에 배당되었으나, 신부들에게 우호적인 관리들이 예부에 많았기 때문에 (?)都御史의 주선으로 夷狄의 업무를 관장하는 예부에 이 일을 돌렸다고 한다.

애초에 판토하가 탄원한 목표는 葬地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은 葬地만이 아니라 선교소로 쓸 수 있는 큼직한 건물까지 붙어 있었다. 황제의 지시에 대한 禮部()423일부 答覆 내용을 은 폐하께서 順天府尹에게 명하시어 주인 없는 廟宇와 한 필지 땅을 찾게 해서 利瑪竇를 매장케 하고 龐迪我 등이 廟宇에 살면서 天主를 섬기는 자신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받들면서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게끔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487] 인용한 것은 곧이듣기 어렵다. 하사받을 땅과 집이 결정된 뒤 順天府尹 이름으로 그 집 앞에 붙인 포고문 내용을 황제가 이 재산을 그들에게 하사하시는 뜻은 그들을 赤子로 여기셔서 利瑪竇屍身을 매장케 하고 그의 동료들이 이곳에 항구히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받들고 황제 폐하와 태후 전하의 만수무강, 그리고 帝國의 태평을 빌도록 하는 것이다. [488] 인용한 것도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의 윤색을 겪은 것 같다. 實錄에는 427일부로 賜西洋國故陪臣利瑪竇空閑地畝埋葬이라고만 되어 있다.[489]

[487] <中國誌> 575.

[488] <中國誌> 583.

[489] <明 神宗實錄> 470, 8.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일방적인 은혜를 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받는 쪽에서 입맛을 내세울 계제가 아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閣老 葉向高의 영향력으로 시작해서 禮部상서 吳道南, 順天府尹 黃吉士 등 긴요한 위치의 고관들이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고를 수 있었다.[490]

[490] <中國誌> 578-579.

그런데 선교사들이 고른 곳은 권세를 누리다가 무슨 죄목인가로 하옥되어 있던 환관이 사찰 명목으로 가지고 있던 별장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크고 튼튼한 건물이 끼워져 있는 것이 아마 그들이 이곳을 고른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것은 결과적으로 불상 모시던 자리를 빼앗아 天主를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관리들의 도움을 통해 환관의 재산을 빼앗게 되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옥중의 환관은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별장을 외국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애를 써 보았지만 여의치 않자 어느 고위의 태감에게 그 집을 넘겨주고 그에게 별장 지켜내는 일을 맡겼다. 그 태감이 府尹에게 압력을 가하려 하자 黃 府尹은 한편으로는 이 일이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에게 이 태감을 찾아가서 인사를 닦도록 눈치를 주었다. 그런데 이 인사가 그리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찾아간 날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기다린 뒤에 그 환관은 심부름꾼을 보내, 그 날은 너무 바빠 접견할 시간이 없으니 용무를 서면으로 심부름꾼 편에 들여보내면 나중에 읽어보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의 첫 방문을 거절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제야 그들을 불러들였는데, 그들은 중국 사대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접견에 임해 그는 자리 잡고 앉아 찾아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신부들도 무릎 꿇고 인사 올릴 것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높은 관리들을 대할 때보다 이 자에게 더 공손하게 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뻣뻣이 서 있었다. 수작이 먹혀들지 않는 것이 분명하자 그 환관은 일어나 중국인들 사이의 平交의 예로 그들을 맞았다. 그 뒤의 대화는 그대로 서서 마주보는 채로 진행되었다. 신부들은 일부 환관들의 농간 때문에 관리들을 통해 얻은 황제의 은혜를 아직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고 그의 영향력을 통해 일을 바로잡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동료의 매장을 위한, 그리고 자신들의 거주를 위한 재산권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고, 황제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라고 했다. 그들은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가지고 간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491]

[491] <中國誌> 584-585.

태감 馬堂의 주선으로 進貢을 성취하고 북경 거주의 허가도 환관을 통해 口頭로 전달받던[492], 북경에 처음 자리 잡을 때를 생각하면 금석지감을 느낄 일이다. 관리들의 도움을 통해 葬地 下賜라는 형태로 황제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이제 환관들 앞에 무릎을 꿇기는커녕 그들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관리들의 호의를 얻는 데 유리하리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환관과의 대립을 과장해서 선전한 면도 있을 것 같다.[493]

[492] <中國誌> 389. 앞 제24.

[493] <中國誌> 333-334: 1599년 남경에서 守備太監 馮保에게 리치가 거만하게 대했다는 기록도 같은 방법으로 굴절된 것일 수 있다.

失勢한 환관의 집을 빼앗는 마당에 짐을 정리하러 온 환관의 하인이 중국인 修士에게 환관의 재산을 가로챌 정도로 강한 권세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너희 주인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이 무엇이냐?” 물은 데 대해 우리 주인은 德性學問, 書籍, 그리고 가장 높은 하느님의 법률을 가진 분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이 하느님의 법률만큼 강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대목은 매우 상징적이다.[494] 이어서 비꼬는 투로 그렇게 설득력이 있다면 이 절보다 더 크고 더 좋은 절을 달라고 관리들을 설득하지 그러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그분은 겸손하고 검소한 분이어서 더 크고 더 화려한 집은 어울리지 않는다. 황제 폐하와 관리들이 주는 것이면 그분에게는 제일 좋은 것이다하고 빠져나갔다고 한다.

[494] <中國誌> 582.

환관뿐 아니라 관리들 가운데 입장이 어긋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녹녹치 않은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애초에 葬地 下賜 件戶部에 배당된 것을 禮部로 돌렸다고 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었던 탓인지 이 일이 조세 면제 관계로 戶部에 돌아왔을 때 戶部상서가 너무 큰 집을 준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공문을 順天府로 보냈다. 順天府 관리는 이 공문 사본을 판토하에게 보내고 회답에 어떤 내용을 넣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는데, 판토하는 회답을 보낼 필요 없이 공문 보낸 사람이 스스로 철회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판토하 신부는 戶部상서를 찾아가서, 황제께서 그들에게 葬地만이 아니라 거처할 집까지 하사하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집이 좀 거창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황제의 도량이 넓으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신부들의 신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서 공문을 철회할 것을 청했다.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요구하는 태도에 상서는 적지 않게 놀라서 대답하기를 戶部의 조치에 불만이 있으면 서면으로 제출해 달라, 내일 회의에서 검토하겠다고 했다. 상서와 작별한 판토하 신부는 같은 戶部에서 일하는 친분이 있는 관리를 찾아갔다. 상서의 친구이기도 한 이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한 다음, 많은 관리들이 함께 결정한 일에 혼자 나서서 반대해 가지고 좋을 일이 없다, 여러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면 본인에게 손해가 클 것이라고 상서에게 충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람은 신부의 부탁을 아주 철저하게 따라 주었다. 이튿날 戶部상서는 판토하 신부에게 매우 정중한 편지를 보내 모든 일이 신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판토하 신부는 답신과 함께 유럽에서 가져온 신기한 물건으로 조그만 선물을 보냈고, 이것으로 이 일은 모두 마무리된 것으로 보였다. 며칠 후 문제의 공문은 정식으로 철회되었고, 새 집과 묘지는 영구히 조세가 감면될 것이 통보되었다.”[495]

[495] <中國誌> 587-588.

대단한 수준의 파워게임이다. 知彼知己의 자신감 없이는 이런 강공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中國誌의 기록에는 선교사들의 위상이 아주 높아서 고위관리들과 대등하게 왕래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관리들의 집에 불려가거나 서재에 불려 들어가는 것만도 대단한 기회로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일이 이만큼 진척되자 신부들은 황제로부터 이토록 커다란 혜택을 얻는 데 긴요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런 일에 전문가인 판토하 신부는 상아를 깎아서 해, , 별을 관측하는 晷儀(해시계 모양의 관측기구)를 여러 개 만들었다. 재정이 넉넉지 않아서 더 값비싼 재료를 쓸 수가 없었지만 상아로 만든 물건도 보기 좋고 재미있게 생겼고, 받는 사람들이 그 사용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신부들이 그들의 집과 서재 안에까지 찾아들어가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방문으로 인해 관리들 사이에서 위신이 높아지기도 했고 추진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었다.”[496]

[496] <中國誌> 575-576.

이 일을 추진한 주체는 판토하였다. <七克>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는 판토하는 1599년 중국에 도착한 이래 계속해서 리치를 수행해 왔고, 리치가 죽은 후에는 롱고바르디가 선교단장 업무를 넘겨받을 때까지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롱고바르디가 북경에 도착한 것은 161153, 葬地 下賜의 일이 완전히 낙착되어 리치의 유해를 새 집으로 옮겨놓은 후였다. 그 뒤 묘소와 예배당의 설계, 시공도 그 지휘 하에 진행되어 그 해 111일 만성절을 기해 리치의 매장과 새 교회의 祝聖이 행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래 있던 불상들이 파괴되었는데, 그 기록을 보면 선교사들이 불상의 파괴에 얼마나 강한 집착을 가졌는지 느낄 수 있다:

우상들을 원래의 제단에서 치운 다음, 진흙으로 만든 것은 부숴서 가루로 만들고 나무로 만든 것은 불태워버렸다. 선교소 하인들은 이 파괴의 작업에 아주 신명이 나서 서로 누가 많이 부수는지 시합까지 했는데, 부수는 과정에서 뭔가 찾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은 우상을 만들 때 그 뱃속에 동전이나 구슬 따위를 집어넣는 관습이 있는데, 하인들은 우상을 뜯어 발기면서 이런 물건들을 찾아내는 경쟁을 했다. 우상을 때려 부수는 일이 그 집 원래 주인들에게도 알려졌지만, 재산을 되찾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집을 우상의 전당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재산을 지키려는 핑계였을 뿐이지, 정말로 그 우상들을 지키려는 뜻이 아니었다. 제단도 헐어내고 벽화 위에는 회칠을 했다. 새로 만든 제단 위쪽에는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修士 한 사람이 아름답게 그린 구세주 예수님의 초상화를 걸 자리가 마련되었다.”[497]

[497] <中國誌> 591.

예수회 선교사로 리치보다 앞서서 중국 땅에 정착을 시도한 것은 루지에리와 파시오였다.[498] 그리고 리치보다 앞서서 중국 땅에서 죽은 사람이 넷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평생의 일을 마치고 중국 땅에 묻힌 것은 리치가 처음이었다.[499] 그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방법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판토하의 노력에 의해 묘지와 교회를 하사받은 일은 선교사의 존재를 공식화하기 위해 평생을 애써 온 리치의 노력을 마무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 교회의 대문에 선교사들이 자랑스레 써 붙인 欽賜라는 두 글자가 리치 자신의 눈으로 볼 때는 자신의 최대의 업적이었을 것이다.

[498] 마카오를 중국 땅에서 제외시키는 관점은 당시 선교사들의 시각에 따름.

[499] 앞서 죽은 알메이다(1591), 페트리스(1593), 소에리오(1607), 테데시(1609)는 모두 마카오에 운구되어 그곳에 묻혔다. 祝聖되지 않은 묘지에 묻을 수 없기 때문에 알메이다의 경우는 운구되기까지 2년간이나 韶州의 선교소에 유해가 보관되기도 했다. 祝聖된 묘지를 가지게 된 것이 선교단의 정착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失澤利彦는 예수회의 성공을 뒷받침한 중국 布敎방침으로 讀書人重視주의, 北京中心주의, 科學주의, 禮物주의의 네 가지를 꼽고, 발리냐노가 발명한 적응주의를 그 바탕으로 제시했다.[500] 이 방침들은 누구보다도 리치의 활동 속에서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며, 하나하나의 방침이 나름의 효과를 일으킨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침들을 평면적으로 나란히 나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500] 失澤利彦, <中國とキリスト>(東京, 1972) 64-66.

이른바 北京中心주의禮物주의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전술적으로 대응하는 방침을 가리킬 뿐, 아무런 신학적 의미도 개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主義라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어색하다. ‘讀書人重視주의科學주의도 표현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들에 비해서는 선교의 원리가 함축된 것이며 중국 선교에 고유한 뜻을 가진 것으로, 최소한 전략적인 의미는 읽을 수 있는 것이다.

士大夫 계층, 특히 지식인층을 중시하고 과학활동을 선교활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세운 것은 리치가 중국 체류 경험을 통해 빚어낸 방침이다. 肇慶에서 王泮을 비롯한 관리들과 접하면서 리치는 관료-학인 계층이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제면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 절실히 느꼈다. , 세계지도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반응을 살피며, 그리고 瞿太素, 王弘誨 등의 曆算學에 대한 관심에 부딪히며 과학활동의 전망을 키우게 되었다.

리치와 루지에리는 중국에 들어갈 때부터 황제에게 접근, ‘위로부터의 傳敎를 꿈꾸었는데, 이것은 예수회의 일본에서의 경험이 발리냐노를 통해 이식된 것이었다. 이 꿈을 리치는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고, 그의 葬地 下賜가 이 꿈의 한 부분이나마 이루어 준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北京에 자리 잡은 후로는 이 꿈의 양상이 처음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 변화는 리치의 환관에 대한 태도에서 읽을 수 있다. <中國誌>의 기록을 보면 1599南京에 있을 때부터 환관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적어 놓았는데, 과연 그런 태도가 당시에 분명히 드러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501] 北京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도 환관의 힘을 많이 빌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환관들과의 관계는 그 후에 정리된 것 같다.[502] 이것은 일차적으로 환관과 관료 사이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황제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감춰져 있었다. 황제에의 접근이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501] 리치가 해마다 10-11월에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상급자들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는 공식 보고서의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1608년 이후 <中國誌>를 작성할 때 중요한 과거의 일들을 이 편지들에서 되살려낸 것이 많다. 그러나 북경에 자리 잡기 전까지 환관들을 강하게 비판한 내용은 편지에서 찾아볼 수 없다.

[502] 北京에서 교유하게 된 曹于汴, 葉向高 東林 계열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리치의 葬地 下賜라는 것이 관료들의 힘을 빌려 환관의 재산을 빼앗는 형태로 진행된 데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판토하의 관점에서 볼 때, 황제라는 것은 관료들을 통해 일정한 작용을 가했을 때 그에 따라 일정한 반응을 나타내는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리치와 함께 主客司 관리들을 따라 1601년에 빈 옥좌에 알현하던 때와는 다른 인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황제가 차지하고 있던 큰 자리는 그동안 葉向高를 위시한 우호적인 관료들, 徐光啓, 李之藻를 비롯한 힘 있는 입교자들에 의해 채워져 왔을 것이다.

Gernet는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인 관료-학인들이 儒家 가치의 실현 및 확장을 위해 선교사들에게 동조한 측면을 강조,[503] 補儒論에 대한 중국 측의 반응을 부각시켰다. 왕조 말기의 위기상황에서 중국 일부 지식인들이 필요로 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선교사들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리치가 북경에 자리 잡은 뒤 황제에의 접근에 집중하던 자세를 바꿔 관료-학인층을 주된 포섭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이 계층의 요구에 포괄적으로 부응하는 방향을 취함에 따라 윤리와 과학 분야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503] J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1985): 64-68.

윤리 분야의 가장 큰 업적이 <畸人十篇>이고 그 先驅<天主實義>였다면 과학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幾何原本>이었고 그 先驅<萬國全圖>였다. 歐羅巴人들의 天文推算工匠製作은 훌륭하지만 그 議論誇詐하고 迂怪하다고 비판한 四庫全書 편찬자도 <畸人十篇>에 대해서는 그 말이 힘있고도 부드러워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족하다하고 談禪에 비유했다.[504] 한편 <幾何原本>은 짧게는 崇禎 연간의 修曆사업의 근거가 되고, 길게는 淸朝 時憲曆을 통해 18세기 후반까지 北京에서 예수회 활동의 보루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들이 北京에 자리 잡은 후 십년 안 되는 기간 동안 리치가 이룩한 업적의 精髓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04] <四庫全書總目> 125.

리치가 죽기 직전에 세례를 준 李之藻는 자신이 죽기 직전, 1629년에 선교사들의 업적을 모아 <天學初函>을 간행했다. 수록된 理編 9가운데는 리치의 것이 5, 器編 10가운데는 6들어 있었다. Gernet는 이 체제가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西學兩面一體로 본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는데,[505] 또 어떤 차원에서는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方以智(1611-71) 같은 사람은 과학 방면을 받아들이는 데는 적극적이면서도 종교로서의 西學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506] 이런 태도는 淸代에 접어들어 더욱 심화되어, 西學의 과학을 기독교에서 분리, 고대 중국의 학술이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西藝東源論으로까지 발전했다.[507]

[505] J Gernet, 상게서: 58.

[506] W Peterson, “From Interest to Indifference: Fang I-chih and Western Learning.” Ch'ing-shih wen-t'i (1976): 60-80 “Fang I-chih: Western Learning and the 'Investigation of Things'.” in Wm de Bary,(ed.) The Unfolding of Neo-Confucianism (New York, 1975).

[507] J Henderson, “Ch‘ing scholars’ views of Western astronomy.” HJAS, 46-1, 1986, 121-148.

리치 자신이 생각한 과학은 로마대학에서 클라비우스에게 배웠던 울타리 안에서 기독교의 세계관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中國誌> 도처에서 서양 과학 소개가 중국인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의 을 이해할 바탕을 만들어줄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가 북경에서 활동하는 동안 유럽에서는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활약하고 있었고, 톨레미의 우주관을 토대로 한 그의 과학활동이 時憲曆으로 결실을 맺자 얼마 되지 않아 케플러에 입각한 新法으로 바뀐다.[508] 유럽에서 종교와 우주관 사이의 결별이 중국에까지 파급된 것이다.

[508] 陳遵嬀, <中國天文學史>(3, 上海, 1973-83) 240-243, 藪內 淸, <中國天文曆法> (東京, 1969) 164-167.

전례논쟁을 통해 리치가 제창한 補儒論적 적응주의가 中西 양측의 정통주의자들에게 공박을 받아 立地를 잃은 일은 많은 연구가 되어 왔고,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이와 어느 정도 를 같이하는 일이 과학 분야에서도 일어났던 사실은 적응주의의 기본 구조에 같은 문제의 근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시사해 준다. 리치의 적응주의가 明末 중국 지식인들의 요구에 맞춰 형성되었다고 보는 Gernet의 관점과 리치가 제시한 西學의 틀이 르네상스的 全人性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하는 Spence의 관점이 겹쳐지는 곳에서 그 선교노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