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傳敎방법으로서의 科學활동

 

永樂帝北京으로 천도한 뒤에도 나라는 南京에 있던 중앙기구들을 없애지 않고 형식적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공식적 정부기관들은 北京에 새로 만들어진 것과 南京에 남겨진 것의 두 벌이 있었다. 天文曆法을 관장하는 欽天監도 그런 예의 하나였다. 리치는 南京에 자리 잡은 후 欽天監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 연구와 업무 수준을 매우 낮게 보았다:

北京曆算學者 관서가 있는 것처럼 南京에도 같은 관서가 있는데, 이 관서의 훌륭한 점은 그곳 학자들의 학식보다 건물의 규모에 있으니, 이 학자들은 아는 것도 없지만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다. 겨우 하는 일이란 名節을 밝히도록 달력을 손보고 날짜에 干支를 붙이는 정도가 고작이다. 어쩌다가 推算이 잘못된 경우, 일어난 현상이 자기네 계산에서 조금도 벗어난 것이 없다며 착오에 대한 모든 책임을 별들에게 덮어씌운다. 地上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경고라느니 뭐니 하고는 그럴싸한 일을 끌어 붙여 자기네 책임을 회피한다.”[386]

[386] <中國誌> 329.

그러나 欽天監의 관측기구에 대해서는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곳에는 천문관측을 위한 기구, 기계들이 비치되어 있는데, 철로 주조된 것이며 크기나 유려한 디자인에 있어서 유럽에서 보고 들은 바 같은 용도의 어떤 기구보다 훌륭한 것들이다. 이 기구들은 2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눈비를 맞고 온갖 날씨를 겪어 왔지만 그 원래의 웅장한 모습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 중 큰 것이 네 가지가 있다.”[387]

[387] <中國誌> 329.

이처럼 관리자의 수준과 기구의 수준 사이에 차이가 큰 까닭을 이렇게 파악했다: “이 많은 기구들의 한 가지 잘못은 南京 위도가 321/4임에도 36도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아마 다른 지점에서 사용하려고 만들었던 것을 천문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위치와 차이를 생각지 않고 갖다놓은 것 같다. 후에 리치 신부는 北京에서 이와 비슷한 기구들, 아니, 같은 匠人들이 만든 것이 분명한 그 복제품들을 보았다. 몽고족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며, 이것을 설계한 사람은 유럽 천문학도 알고 있던 외국인이었을 것이다.”[388]

[388] <中國誌> 331.

리치의 고찰은 대체로 정확한 것이었다. 리치가 본 천문기구들은 나라 때(1270) 郭守敬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389] 오늘날까지 대부분 紫金山 천문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리치는 네 가지 기구를 설명했는데, 그 내용을 <元史> 天文志내용[390]과 대조해 보면 渾天象, 玲瓏儀, 高表, 簡儀 넷에 해당된다.[391] 郭守敬의 기구들이 사용된 곳은 북위 36도의 平陽(지금의 산서성 臨汾)이었는데 明代 欽天監 기구들은 이것을 옮겨오거나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392] 그러나 北京에 기구들을 비치한 후 南京과의 위도 차이에 맞춰 조정했다는 기록을 볼 때,[393] 南京 기구들이 다른 곳 위도에 맞춰져 있었다고 하는 사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389] <元史> 164 郭守敬 列傳7-8. 郭守敬(1231-1316)元 世祖 때 과학자로, 算術水理 등 기술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여러 분야에 공을 세웠는데, 가장 큰 업적은 1280년부터 시행된 授時曆을 준비한 일이다. 授時曆은 이슬람 관측기술을 포함하여 당시 기술조건을 최대한 융합하여 만든 성과로, 중국 전통역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 준비에 許衡王恂郭守敬과 함께 참여했다고 하지만, 기술적인 면은 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藪內 淸, <中國天文曆法>(東京, 1969) 139-145, 陳遵嬀, <中國天文學史> 1(上海, 1973) 227-229.

[390] <元史> 48, 2-9.

[391] <中國誌> 중문판 302에 세 번째 기구를 仰儀로 비정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392] <明史> 25 天文志15에는 1437南京에 있던 기구들을 복제해서 北京에도 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正統二年 行在欽天監正皇甫仲和奏言 南京觀象臺 設渾天儀簡儀圭表 以窺測七政行度 而北京乃止於齊化門城上觀測 未有儀象 乞令本監官 往南京 用木做造 赴北京 以較驗北極出地高下 然後用銅別鑄 庶幾占測有憑 從之 明年冬 乃鑄銅渾天儀簡儀於北京.

[393] 같은 책 16: 明年冬 監正彭德淸又言 北京北極出地度 太陽出入時刻 與南京不同 冬夏晝長夜短 亦異 今宮禁及官府漏箭 皆南京舊式 不可用 有旨 令內官監改造.

리치는 紫金山의 기구 가운데 유럽 기구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중세 후기의 유럽 관측기술과 元代의 중국 관측기술이 다함께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본 놀라운 기구들이 유럽 천문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元史> 天文志에는 至元 4(1267)札馬魯丁[394]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만든 일이 西域儀象이라는 소제목 아래 나와 있다.[395] 이슬람 천문학이 郭守敬授時曆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실도 알려져 있다.[396]

[394] J Needham은 이 사람을 Jamal al-Din ibn Muhammad al-Najjari라는 마라가(Maragha)의 천문학자로 비정했다. J Needham,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 (Cambridge, 1959): 372-373.

[395] <元史> 48, 10-12.

[396] 藪內 淸, 中國におるイスラム天文學, <東方學報(京都)>19(1965), 65-77.

중국 천문학은 당나라 때 인도 천문학을 받아들여 하나의 절정기를 지낸 후, 元代에 이르러 이슬람 천문학을 도입, 융화함으로써 또 한 차례 절정기를 구가했다. 郭守敬이 만든 授時曆은 당시까지 중국 전통역법에서 제기되어 온 제반 문제들을 획기적 수준에서 해결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년 후 왕조가 바뀐 뒤에도 몇 개 常數만 바꿔 大統曆이라는 새 이름으로 明朝 말기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397]

[397] 陳遵, <中國天文學史> 1: 226-230, 藪內 淸, <中國天文曆法>(東京, 1969) 145-147.

따라서 明代 천문학은 前代의 기술체계를 이어받아 운용하는 범위를 넘어 독자적 발전을 꾀할 계기를 가지지 않은 채로 오랜 세월을 보냈고, 그 운용이라는 것은 실제 관측과 관계없이 曆書에 적힌 내용을 정해진 방법에 따라 계산하는 작업에 불과했다. 이런 사정을 리치는 이렇게 기록했다:

중국인들은 도덕철학 뿐 아니라 천문학과 여러 수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들이 헤아리는 별의 숫자는 우리 천문학자들보다 400개나 더 많은데, 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별들까지 계산에 넣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천문가들은 천체현상에 수학 원리를 적용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열중하는 것은 日月食 시각과 행성 운동을 계산해 내는 일이며 이런 추산에도 많은 착오가 따른다. 끝으로 그들의 관심은 우리가 점성술이라 부르는 분야에 집중되는데, 지상의 모든 일이 천체 현상과 상관관계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쪽에서 들어온 사라센인이 수리과학에 관한 약간의 지식을 중국에 전해주기는 했지만 확실한 수학적 증명에 기초를 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전해 준 것은 曆法을 수정하고 행성과 일반 천체들의 운동을 계산하는 데 쓸 계산방법의 목록 정도였다. 현 왕조의 창시자는 세습적 전문가 외에는 아무도 점성술을 연구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 까닭은 천체의 운동을 알게 되는 사람이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가지게 되거나 그럴 의향을 가지게 될 것이 두려운 때문이었다.”[398]

[398] <中國誌> 30-31.

리치가 가져온 유럽 물화 가운데 중국인의 관심을 크게 끈 것으로 기계시계와 해시계가 있었다. 기계시계는 천문학 지식과 직접 관계는 없는 것이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천체 운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통상 생각되기 때문에 시간 관리의 특수한 기술을 가졌다는 사실이 천문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으리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해시계는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지만, 리치가 가져오거나 만들어 준 해시계는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서 유럽의 최신지식을 응용한 것이어서 천문학과 관련하여 중국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리치가 韶州에서 南京 禮部상서 王弘誨를 만났을 때 상서가 北京에 함께 가서 曆法 고치는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는 것도[399] 이런 평판을 바탕에 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399] 앞 제13.

16055, 예수회 간부로 있던 알바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치는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신부님께 끝으로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요청해 왔음에도 아직까지 아무런 회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고 선교에도 유리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부, 아니면 修士라도 한 분을 파견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굳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라고 하는 것은, 기하학이나 해시계, 觀測儀 같은 것은 저도 웬만큼 다룰 수 있고, 또 읽어볼만한 책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보다 중국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성의 운동과 日月食을 계산하는 등 曆書 편찬에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황제가 해마다 큰 비용을 들여 200명의 사람들을 동원, 그 해의 曆書를 편찬해 내고 이 일을 위해 欽天監이라는 관서를 두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曆法大統曆回回曆 두 가지인데, 日月食 추산에서 후자가 조금 낫다고는 하지만 정확치 못하기는 일반입니다. 그들은 법칙에 따라 숫자를 계산해 낼 뿐 그 뜻을 알지 못하며,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경우 옛사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地圖, 해시계, 地球儀, 觀測儀 등 기구와 책들을 지어 보임으로써 최고의 수학자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을 별로 가진 것이 없어서 포르투갈어로 된 항해용 天體曆 정도만을 보면서도 日月食 推算欽天監보다 더 정확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이 모자라서 중국의 曆法을 고쳐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 건의대로 천문학자 한 분을 北京으로 보내 주신다면, 우리 曆法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제게 어렵지 않은 일이니 중국 曆法의 교정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聲價는 높아질 것이고 입국도 쉬워질 것이며, 이곳에서 우리 사업은 더 안정되고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400]

[400] <書信集> 301-302.

肇慶시절 리치가 처음으로 중국 지식인들의 경탄을 자아낸 것은 세계지도 덕분이었는데, 이 지도가 중국인에게 놀라웠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중국이 세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는 중국인의 일반적 믿음과 달리 세계 육지의 십분의 일 정도 밖에는 점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직접 실증될 수 없는 주장이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에게 얼마만큼 알려져 있던 인접지역 묘사가 그럴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신빙성을 가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치가 소개하는 문명의 규모가 더욱 더 커다랗게 느껴지게 됨에 따라 신빙성도 늘어났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구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나라에 대한 엄청난 자존심 때문에 이 세상에 중국 이외에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규모, 행정과 학문의 수준에서 다른 모든 민족을 야만인 정도를 넘어 마치 이성을 가지지 않은 동물처럼 여긴다. 군주, 왕조, 문화를 가진 나라는 지구 위에 중국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無知 위에 쌓아올린 자존심이 클수록 진실이 밝혀질 때의 모욕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세계지도를 처음 봤을 때 그들 중 무식한 사람들은 이것을 비웃었지만, 학식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특히 경도와 위도, 적도와 회귀선 등을 유심히 보았고, 다섯 氣候帶의 대칭성 설명과 많은 민족들의 관습에 관한 기록을 보고는 많은 地名이 중국 옛 기록과 잘 합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 지도에 나타난 세계의 모양과 크기가 사실과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401]

[401] <中國誌> 167.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세계의 모습을 球形으로 규정하고 曆算學에 쓰이는 것과 같은 좌표계, 즉 경도와 위도로 지구 표면을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의 타당성은 남북으로 250리를 이동하는 데 따라 北極高度, 즉 위도가 1도씩 변한다고 하는,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로 뒷받침되었다. 중국인들도 지구의 모습이 둥글 것이라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 왔지만 하나의 관념에 그쳤을 뿐, 기하학적 연구법을 적용시킬 만큼 확실한 사실로 검증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치가 유럽 과학을 중국인에게 소개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유클리드의 전수를 앞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말하자면 리치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지식체계를 전달하기 위한 言語로 유클리드의 기하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韶州에서 瞿太素를 가르칠 때도 유클리드로 시작했고, 南京에서 젊은 수학자들을 가르칠 때도 그러했으며, 北京에서 徐光啓와 만나서는 1년 이상 공을 들여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을 함께 번역했다.

1600進貢을 명분으로 두 번째 北京으로 향할 때 중국 曆法을 교정하는 일에 마음속으로 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은 그가 천문서적을 짐 속에 소중히 챙긴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짐을 되찾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 한 토막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신의 섭리가 또 한 차례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馬堂이 두 번째 짐을 뒤질 때 뽑아낸 물건 가운데는 중국 曆法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황제가 맡길 경우에 대비해서 리치 신부가 各方으로 모아놓았던 천문서적이 몽땅 들어 있었다. 이 나라에는 실제로 운용되지 않은지 오래된 법이 하나 있었는데, 궁중 학자를 제외한 누구라도 천문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옛날 이 법을 만든 까닭은 천제 운행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자신의 운을 뒷받침하는 天象을 포착해서 나라를 빼앗으려 들 염려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馬堂은 흔적만 남아 있는 이 법에 따라 이 책들을 다른 예물과 분리해서 상자에 넣어놓고 그 위에 쪽지를 붙여 稅監 馬堂이 외국인 利瑪竇의 짐에서 이 책들을 적발하였다. 국법으로 금지된 물품이므로 황제께 보고 드려 처분을 받을 때까지 별도로 경호 하에 보관한다고 표시해 놓았다.”[402]

[402] <中國誌> 370-371.

신의 섭리로 馬堂의 고발은 면할 수 있었지만 여러 해 지나도록 曆法 교정의 명령은 받아내지 못했다. 16055월 알바레스 신부에게 보낸 앞에 인용한 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문가 아닌 리치가 충분한 자료도 없이 착수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일을 꾸미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 대신 리치가 노력을 집중한 것은 <幾何原本> 번역이었다.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 曆法 작업을 위해 필수적인 준비물이었다:

徐光啓가 가진 생각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책들이 이미 나온 이상, 이제 유럽의 과학에 관한 책을 만들어 앞으로 공부해 나갈 준비로 삼되, 신기한 내용과 견실한 증명을 아우르도록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하기로 되었는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책은 유클리드의 <幾何原本>이었다. 그 까닭은 중국인들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수학을 높이 여기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학습방법은 온갖 명제를 다 다루면서도 증명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수학에 관한 한 누구든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은 채 생각나는 대로 무슨 소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유클리드에 있어서는 명제들이 질서정연하게 제기되고 확고무비하게 증명되기 때문에 아무리 고집불통인 사람이라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403]

[403] <中國誌> 476.

리치는 徐光啓와 함께 1606-07년에 걸쳐 <幾何原本>의 앞부분, 평면기하학을 다룬 여섯 장을 번역해서 한 책으로 간행했다. 처음에 擧人의 자격을 가진 유생 한 사람이 선교소에 함께 살면서 한편으로는 신부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면서 이 작업을 하려 했지만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리치는 특출한 재능을 가진 학자가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 하였고, 이에 徐光啓가 응하여 이를 해낸 것이다. 작업 결과에 리치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여기서 또한 주목할 사실은 중국어가 그 어휘에 있어서나 용법에 있어서나 우리 과학의 개념들을 제대로 표현해 내는 데 전혀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이라 한 것으로 알아볼 수 있다.[404]

[404] <中國誌> 477.

16105월 리치가 죽을 때까지 리치가 청원한 수학자는 중국에 파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 12(중국력으로 11월 초하루) 日食 예보에 큰 착오가 나타났을 때 五官正 周子愚大西洋에서 귀화한 龐迪我熊三拔 등은 曆法에 매우 밝고 가지고 있는 曆書 가운데 중국 문헌에서 미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번역해 올리도록 하여 쓸 만한 것을 고르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상소하고 禮部시랑 翁正春 등도 洪武 초년에 回回曆科를 둔 예에 따라 龐迪我 등에게 測驗을 시키도록 해 주십사고 청하여 황제의 윤허를 얻었다.[405] 리치가 韶州에서 王弘誨를 만났을 때(1592 또는 1593)부터 십여 년에 걸쳐 꾸준히 키워온 꿈, 유럽의 수학과 천문학을 중국 曆法에 도입하는 사업은 이렇게 그가 죽은 직후 실현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405] <明史> 31, 15-16.

리치가 세상을 떠난 직후 서양인을 중국 曆法校正에 동원할 논의가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전문 수학자와 서적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중국의 公事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리치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사라짐으로써 주변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406] 논의의 계기가 되었던 16101215일의 日食 경우 예보가 30분 내지 한 시간 가량 틀렸다고 하는데,[407] 리치는 중국의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日食月食을 꾸준히 관측하고 있었으며,[408] 1603511일의 日食 예보에도 14분 내지 43분의 착오가 있었던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409]

[406] 리치의 조심성과 입교자들의 열의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대목이 있다(<中國誌> 396): “리치 신부는 <天主實義>의 원고를 검토해 달라고 이 사람(馮應京)에게 보냈다. 그 목적은 사실 원고를 바꾸는 데보다 馮應京의 마음을 바꾸는 데 있었다. 그는 그 글이 몹시 마음에 든다고 회답하고 즉각 출판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지만, 리치 신부는 출판 전에 다시 더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따먹기에 덜 익은 과일이니 햇볕 속에 좀 더 놓아두어야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馮應京은 아주 재미있는 故事로 응수했는데, 기독교의 사명에 아주 적절한 이야기였다. 옛날 어떤 사람이 고질적인 만성병에 시달린 끝에 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지나던 사람이 보고는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을 안다고 장담을 하더라는 것이다. 지금 환자 상태가 급박하니 장담만 할 것이 아니라 빨리 손을 써 달라고 주변사람들이 청하자, 이 사람은 좋습니다. 내 이제 집에 가서 곱게 먹을 갈아 멋들어진 처방전을 써 오리다하더라고. 이에 사람들이 지금 필요한 것은 잘 듣는 처방이지 멋들어진 처방전이 아니라오.’ 했다는 것이다.”

[407] <明 神宗實錄> 477, 6-7: (3811) 丙寅 禮部上言 先據欽天監 奏稱本年十一月壬寅朔 日食七分五十七秒 未時正一刻初虧 申時初三刻食甚 酉時初刻復圓 食甚日躔 尾宿一十五度八十五分一十三秒 至救護日隨 據該監五官靈臺郞劉臣等呈稱 先該春官正戈謙亭等推算 到本年此月壬寅朔日食 候至未正三刻觀見 初虧西南 申初三刻食甚正南 復圓酉初初刻東南 約至有七分餘 食甚日躔黃道 測在尾宿度分 臣等移文 以時刻之差責之 臣等復閱邸報 見兵部職方司員外郞范守所稱親驗日晷 未時正一刻不虧 正二正三正四刻俱不虧 至申初二刻 始見西南略有虧形 正二刻方食甚 又以分數 不至七分五十餘秒.

[408] 경도 측정의 기술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앞 제22절에서 언급하였음.

[409] Bernard, Scientific Contribution: 64.

리치가 죽을 때 北京에 함께 있던 선교사는 판토하(龐迪我, 1599 입국)와 우르시스(熊三拔, 1606 입국)였기 때문에 두 사람 이름이 周子愚의 상주문에도 거명되었다. 판토하는 1600년 리치가 북행할 때부터 그와 함께 있으면서 수학 등 리치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는 있었지만,[410] 직접적 선교사업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우르시스는 1607년에야 리치와 합류했지만 로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바 있고,[411] 중국에 오기 전 고아에서 1년간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412] 161012월의 日食을 정밀하게 예측한 것도 우르시스였다.

[410] Pfister: 19번에는 풍금 타는 법, 시계 손보는 법, 위도 측정법, 해시계 만드는 법 등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위도 측정법은 천문관측에서 초보 중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굳이 언급된 것을 보면 그 수준 이상의 고급 천문관측 기술은 습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411] Pfister: 30.

[412] Bernard, Scientific Contribution: 74.

우르시스는 리치 사후 수학자와 서적을 보내달라고 로마에 조르는 일도 물려받았다. 그는 16109월 로마의 마스카레나스 신부에게 편지로 이런 요청을 했다.[413] 이 편지에서 그는 北京에 있는 천문학 서적이 클라비우스의 Gnomica, Sphaera, Astrolabe 세 가지뿐이라고 했다고 했는데, 세 책 모두 중국어로 번역되었다.[414] 리치로부터 중국선교단 지휘책임을 물려받은 롱고바르디 역시 161011월과 161210월 거듭해서 예수회 총장에게 수학자와 서적의 파송을 요청하면서 이 사업이 성공할 경우, 두어 명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과학사업에 종사하고, 그동안 다른 선교사들은 각 지방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교인들을 돌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415] 당시 선교사들은 徐光啓, 李之藻 등 고위 입교자들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리치의 요청을 되풀이하게 되었으리라고 이해된다.

[413] P d'Elia, Galileo in China: 21.

[414] <表度說>, <環容較義>, <乾坤體義>로 번역되었다. <幾何學原本>의 대본 역시 클라비우스의 주석본이었으므로 리치의 천문학-수학 지식이 클라비우스의 울타리 안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15] P d'Elia, Galileo in China: 22.

앞에 인용한 萬曆 3811丙寅日(1611. 1. 8) 禮部 上言에 이어 禮部는 이듬해 5庚子日(1611. 6. 11) 다시 글을 올려 曆法 修改를 청하고 大西洋 歸化人曆法을 거둘 것을 청했다.[416] 明 太祖回回曆을 거두기 위해 曆書 번역사업을 벌인 일을 따르도록 청한 것이니,[417] 그야말로 왕조 중흥을 꾀하는 획기적 사업을 제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 曆法의 역할은 이 修曆사업에 기술적 요소를 단편적으로 보충해 주는 제한된 의미만 가진 것이었다. <疇人傳> 利瑪竇의 말처럼 그들의 하늘에 대한 공부가 모두 얻은 바가 있으니, 이를 가려서 쓰는 것은 를 잃으면 오랑캐로부터라도 이를 구한다는 뜻[418]이라 할 수 있다.

[416] <明 神宗實錄> 483 1-1: 治曆明時 國家要務 萬曆元年至今 日食凡十餘次 其差或一刻 或二刻 多至四刻而止 卽交食有差 恐推算未的 宜講究者一也 前代若干年修改一次 漢凡修改五次 宋凡修十八次 金至元末凡修改三次 本朝二百餘年未經修改 豈能必無差訛 宜講究二也 又欽監官正周子愚言 大西洋歸化龐迪我熊三拔等 携有彼國曆法 參互考證 固有典籍所載者也 亦有典籍所未備者 當悉譯以資採用 乞照洪武十五年 命翰林李种 吳伯宗 及本監靈臺郞海達兒 兀丁 回回大師馬黑亦沙 馬哈麻等 譯修西域曆法 例取知曆儒臣 率同監官 將諸書盡譯 以補典籍之闕

[417] 이 일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 吳伯宗, <(明譯)天文書>(四部叢刊 廣編 32) 에 이런 기록이 있다: 爰自洪武初 大將軍平元都 收其圖籍 經傳子史凡若干萬卷 悉上進京師 藏之書府. 萬機之暇 卽召儒臣進講 以資治道. 其間西域書數百冊 言殊字異 無能知者. 十五年秋九月癸亥 上御奉天門 召翰林臣李种 臣吳伯宗 而諭之曰 天道幽微 垂象以示人 人君體天行道 乃成治功. 古之帝王 仰觀天文 俯察地理 以修人事 育萬物 由是文籍以興 彛倫攸敍. 邇來西域陰陽家 推測天象 至爲精密有驗 其緯度之法 又中國書之所未備 此其有關於天人甚大. 宜譯其書以時披閱 庶幾觀象 可以省躬修德 思患預防 順天心 立民命焉. 遂召欽天監靈臺郞臣海達兒 臣阿答兀丁 回回大師臣馬沙亦黑 臣馬哈麻等 咸至于廷 出所藏書 擇其言天文陰陽曆象者 此際譯之. 且命之曰 爾西域人 素習本音 兼通華語 其口以授儒. 爾儒 繹其意 緝成文焉. 惟直述 母藻繪 母忽. 臣等奉命惟謹 開局於右順門之右 相與切摩 達厥本指 不敢有毫髮增損.

[418] <疇人傳> 44, 20: 其於天學 皆有所得. 采而用之 此禮失求野之義也.

이로부터 7개월 후(같은 해 125, 서력 1612. 1. 7) 禮部에서 다시 上奏하여 修曆사업을 청했는데,[419] 그 내용은 전번 上奏와 거의 같은 내용이고, 한림원 簡討 徐光啓原任 南京 공부원외랑 李之藻를 등용할 일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神宗 재위 중 뚜렷한 진척을 보지 못했다. 만력 46(1618) 10欽天副監 周子愚上言하여 7년 전 논의를 진척시킬 것을 청했고,[420] 2년 후, 光宗을 거쳐 熹宗이 즉위한 후 修曆사업을 총괄할 적임자로 지목되어 오던 刑雲路修曆에 대비한 上言에서 臣今犬馬齒七十有三 老病矣 止求進言 非求進身이라 하여[421] 전통역법을 위주로 修曆사업을 펼칠 종래의 대책이 한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419] <明 神宗實錄> 490, 1-1. 최소자, 17, 18세기 서구문화의 유입에 관한 몇가지 문제(<중국학보> 31, 1991)“1611년 흠천감의 회회력관은 일식을 오측하여 명 조정은 서양인을 흠천감에 관리시키고 역법을 개수하였다고 한 것은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1629徐光啓가 주재하는 曆局이 개설된 뒤에야 선교사들이 동원되었으며, 그때도 흠천감에 정식으로 소속되지는 않았다.

[420] <明 神宗實錄> 575, 11.

[421] <明 熹宗實錄> 7, 14-16.

 

리치가 중국 진입 직후에는 중국의 과학수준에 상당히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15849월 편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인의 지혜는 그 영리한 발명품에 나타나 있으니, 그 문자로 말하자면 그들이 또 이 문자를 사용해서 의약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 등 학문을 일으켜 놓은 것을 보면 참으로 총명하고도 박학하다. 日月食 추산은 매우 분명하고 정확한데,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와 전연 다른 것이다. 특히 산학을 비롯해서 각종 기술과 기계학의 수준은 진정 놀라운 것이다. 종래 유럽과 아무런 왕래가 없었는데도 우리가 전 세계의 힘을 모아 이루어낸 것과 대등한 성과를 자기네 경험만을 가지고 얻어낸 것이 아닌가!”[422]

[422] <書信集> 52.

그런데 <中國誌> 4권에는 중국 과학수준을 훨씬 낮춰 보는 견해가 실려 있다:

리치 신부가 전 중국 철학계를 경탄시킨 것은 중국인이 모르고 있던 유럽 과학을 통해서였으며, 그 신기한 내용의 진실함을 확실한 추론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였다.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던,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리치로부터 배웠다. 그 전까지 그들은 天圓地方이라는 낡은 구절을 우주의 기본원리처럼 붙잡고 있었다. 지구가 무거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사실, 즉 중력의 힘이 낙하체를 땅으로 향해 이끈다는 사실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구의 모든 부분에 사람이 살고 있으며, 서로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쪽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月食이 생기는 까닭이 지구가 달과 해의 중간을 가로막는 데 있다는 사실도 리치가 가르쳐 줄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月食의 원인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황당무계한 설명을 보면 달보다도 그들의 마음이 더 심한 어두움에 싸여 있었던 것 같다. 달이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게 되면 너무나 기가 질려 빛을 잃는 것이라고 어느 성현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태양 복판에 구멍이 하나 있어서, 달이 이 구멍의 정면을 지나갈 때는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태양이 지구보다 크다고 하는 사실도 그들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쉽게 수긍하려는 사람들도 있는 것은, 옛날 수학자들이 어떤 기구로 측정한 결과 태양의 크기가 몇 천 리가 넘는다고 기록해 놓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그토록 작은 별들 가운데 지구보다 큰 것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天球들이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별들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天球에 박혀 있다는 것, 天球는 열 개가 포개져 있으며 서로 다른 힘에 의해 회전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원시적인 천문학에는 周轉圓離心圓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北極高度가 위도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적도 반대편에서는 밤과 낮의 길이가 반대가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423]

[423] <中國誌> 325-326. 원리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의 천구설을 지키고 있지만 눈으로 보기에 그토록 작은 별들중에 지구보다 큰 것도 있다고 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의 성과가 혼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력 설명은 뉴턴 이전의 일이니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른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우주 구조에 대해서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나온 지 50년이 자났어도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렇게 중국 과학을 낮보는 태도가 1595년 편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 들어온 지 10년 남짓 지나는 동안 처음 가졌던 동경의 마음이 씻겨나가고, 반대로 유럽 과학을 가지고 정복할 대상으로서 그 약점을 열심히 파악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424]

[424] <書信集> 171-190에는 15951028일에 쓴 두 편의 서신이 실려 있다. 그 하나는 친구인 코스타 신부에게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신인이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두 편지 내용이 거의 똑같은 것으로 보아 다른 친구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리치의 서양과학 소개는 거의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425] 실제로 리치가 펴낸 과학 분야 책들은 <幾何原本>을 위시해서 <測量法義>, <同文算指>, <勾股義>, <環容較儀>, <乾坤體義>, <渾蓋通憲圖說>, <萬國輿圖> , 천문학, 수학, 우주론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편향성은 로마대학에서 리치의 교육배경에도 얼마간 영향 받은 것이겠지만,[426] 선교 목적에 입각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동료들의 불평을 무릅쓰고 徐光啓, 李之藻 등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시간을 집중해서 쓸 수 없었을 것이다.[427]

[425] H Bernard, "Notes on the Introduction of the Natural Sciences into the Chinese Empire", The Yenching Journal of Social Studies, -2(1941) 220-221, 224-225: “중국에 대한 리치의 과학 분야 공헌은 수학과 그 응용분야들에 있어서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426] H Bernard, Scientific Contribution, (Peking, 1935), Ch.2 "Ricci’s Scientific Training".

[427] Hashimoto 전게서: 11에는 앞 44절에서 인용한 <中國誌> 476, 徐光啓가 과학서적의 번역을 제한했다는 대목을 들어 리치보다도 중국인들의 의지에 따라 과학 소개가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했지만, 너무 피상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疇人傳> 44에서 선교사들의 과학 분야 업적을 논한 가운데 우르시스의 <泰西水法>이 단연 두드러진 칭찬을 받았는데, 농사에 공헌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아도 리치가 단순히 중국 지식인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하는 입장이었다면 하필 수학-천문 분야에 그토록 집중할 까닭이 없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리치가 李之藻에게 수학 가르치는 일에 너무 시간을 쓰는 데 대한 판토하가 불평한 일은 G Dunne, The Generation of Giants (London, 1962): 99.

리치의 목표는 曆法에 있었다. 이 목표에는 몇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첫째로, 중국에서 曆法은 제국 체제가 잡히기 이전 상고시대부터 天子의 권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天子는 시간과 공간의 주재자로서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이 기능을 담당한 요소가 바로 曆法이었다.[428] 따라서 중국에서 曆法에 관련된 역할을 선교사들이 맡을 경우 높은 신분과 위상이 보장될 것을 리치는 기대했다.

[428] 藪內 淸 상게서: 3-17.

둘째로, 曆法 분야는 당시 유럽의 관측기술과 수학의 상대적 우월성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분야였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문화적 우월성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관측기술이나 수학처럼 그 장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을 경우, 유럽문명의 위신을 높이고 蠻夷에 대한 반감을 완화시킬 것이 기대되었다.[429]

[429] 1605년 알바레스 신부 앞의 편지(<書信集> 301-2)에 이 점이 강조되어 있다.

셋째로, 선교사들이 曆法에 관여할 경우, 유럽 천문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우주관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리치 당시까지 유행하고 있던 스콜라철학에서는 우주관과 신학이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그 우주관이 받아들여질 경우 이와 얽혀진 신학도 절반 이상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430]

[430] <四庫全書總目><天問略>(陽瑪諾) 且擧所謂第十二重不動之天 爲諸聖之所居天堂之所在 信奉天主者 乃得升之 以歆動下愚 蓋欲借推測之有驗 以證天主堂之不誣 用意極爲詭譎 然其考驗天象 則實較古法爲善이라 한 데서 우주관과 신학의 결합이 지적된 것을 본다. 이에 비해 <乾坤體義> 에는 雖篇帙無多 而其言皆驗諸實測 其法皆具得變通 可謂詞簡而義者 是以 御製數理精蘊多採其說而用之 是書固亦大輅之椎輪矣라 한 것을 보아도 리치 자신은 이런 결합을 드러내는 데 훨씬 더 조심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목표를 크게 잡은 만큼 접근이 더 조심스러웠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리치가 죽은 후 유럽 천문학을 중국 曆法에 도입하는 사업을 주도한 것은 徐光啓였다. 리치는 유럽으로부터 최고급의 인력과 자료가 확보된 뒤에 완전한 유럽식 曆法을 가지고 중국의 曆法에 대한 전면적 대안을 내놓으려 한 데 비해 徐光啓는 중국 曆法에 드러난 결함을 메우는 데 유럽 기술을 부분적으로 선별 채택할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처지가 다른 데서 비롯된 당연한 것이다. 리치는 아무리 적응주의의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중국의 전통 밖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전통과 맞서는 위치를 추구할 입장인 반면, 徐光啓는 비록 기독교로 입교했다고는 해도 중국의 전통 안에 서 있었기 때문에 曆法 개혁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또는 단편적인 방법을 취할 입장이었던 것이다.[431]

[431] 윤리사상 면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적 차이점을 볼 수 있다. Gernet: 47-57.

16129, 우르시스는 중국 천문역법을 개관하는 보고서를 마카오에 있던 일본-중국 관구장 파시오에게 보냈다.[432] 이 보고서의 배경 자료는 (1) 우르시스가 리치로부터 배운 내용, (2) 徐光啓 등 입교자로부터 들은 사정 외에 (3) 正史 天文志曆志까지도 우르시스가 섭렵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물론 이 분야 사업에 큰 희망을 걸고 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내용 한 가지는 徐光啓가 생각하는 修曆사업 내용이 명초에 回回曆을 채택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대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432] 이 보고서는 포르투갈어로 작성되었는데, P d'Elia, Galileo in China: 63-82에 영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리치가 죽기 전 몇 년 동안 徐光啓, 李之藻와 함께 번역한 <測量法義>, <同文算指> 등 여러 數學書1610년대 초반에 간행된 것도 서양역법의 활용이 임박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616년의 南京敎案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徐光啓, 楊廷筠, 李之藻 등 고위 입교자들도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修曆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포부는 10년 너머 파묻혀 있게 되었다.[433] 1627崇禎帝가 즉위하고 뒤이어 魏忠賢이 실각하는 과정에서 徐光啓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뒤에야 修曆사업이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433] 이 시기에 徐光啓를 비롯한 입교자들이 선교사들의 학문과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위상을 확보해 주려 애쓴 분야는 대포 제조와 조작 등 군사기술 쪽이었다. 滿洲族과의 전쟁, 魏忠賢의 전횡 등 긴박한 상황 아래 중국의 時務에 선교사들이 공헌하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조정, 입교 관료, 선교사들이 모두 혜택을 얻는 관계를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修曆사업과 같은 방향의 노력으로 이해된다.

공교롭게도 정치적 상황 때문에 修曆사업이 십여 년간 늦어지는 동안 리치가 바랐던 대로 자료와 기술의 준비는 많이 확충될 수 있었다. 1610년 리치가 죽은 직후에 입국했던 니콜라스 트리고가 리치의 <中國誌> 유고를 가지고 1613년 로마로 돌아간 일은 <中國誌> 설명과정에서 언급했는데, <中國誌> 출판으로 인해 중국선교가 많은 유럽인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트리고가 1621년 중국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과학사업을 위해 가장 절실한 요망사항이었던 일류 과학자라 할 만한 선교사도 세 사람이나 함께 떠났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은 중국에 도착하기 전 항해 중에 죽었고, 또 한 사람도 본격적인 활동을 해 보지 못한 채 1626년에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1629년에 시작된 修曆사업에 참여한 것이 요한 테렌츠(Johann Terrenz 鄧玉函, 1576-1630)였는데, 그마저 이듬해에 죽었다. 그러나 일류 과학자는 아니지만 기본적 과학교육을 받은 바 있고, 항해 중부터 테렌츠 등에게 필요한 분야의 강습을 받아 온 샬폰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과 지아코모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 등이 테렌츠의 뒤를 이어 <崇禎曆書>를 완성할 수 있었다.[434] 그리고 트리고의 재입국 때는 7천 권의 서적이 반입되어 北京에 명실 공히 유럽 문명의 基地가 만들어졌다.[435]

[434] 이들의 과학 배경과 활동범위는 橋本敬浩, 明末中國えられた科學革命成果(<關西大學社會學部紀要> 12-2, 1980); Hashimoto Keizo, "Longomontanus' Astronomia Danica in China", The Journal of History of Astronomy, 18, 1987; 方豪, 伽利略與科學輸入我國之關係明淸間西洋機械工程學物理學與火器入華考略(<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 등을 참고로 할 수 있다.

[435] 7서적에 대한 연구로 H Verhaeren, "Aperçu historique de la Bibliothèque du Pét'ang" in Catalogue de la Bibliotheque du Pé-t'ang (Pekin, 1949)方豪, 明季西書七千部流入中國考(<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가 있다. 1952년에 方豪가 확인할 때까지 이 책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으로 분명한 것이 428, 그럴 가능성이 있으나 완전히 확인할 수 없는 것이 151종 있었다고 한다.

崇禎 2(1629) 5() 초하루 日食이 있을 때 大統曆回回曆이 모두 상당한 착오를 일으키고 徐光啓西法으로 예측한 것만 적중했다. 이에 監官을 문책하자 五官正 戈豊年 등은 曆法이 오래되면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음을 上言했고, 禮部에서는 曆局을 열어 修曆사업을 벌이되 徐光啓에게 督修를 맡길 것을 상주했다.[436] 이에 徐光啓上言하여 西法의 원리들을 채용하지 않을 경우 정밀한 曆法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혀서 修曆사업의 방향을 밝힌 다음 曆局을 개설하고 테렌츠 등 선교사들을 동원했다.

[436] <明史> 31, 17上下: 崇禎二年五月乙酉朔日食 禮部侍郞徐光啓 依西法預推 順天府見食二分有奇 瓊州食旣 大寧以北不食. 大統回回所推順天食分時刻 與光啓互異 而光啓法驗 餘皆疎 帝切責監官. 時五官正戈豊年等言 大統乃國初所定 實卽郭守敬授時曆也 二百六十年毫未增損. 自至元十八年造曆 越十八年爲大德三年八月 當食不食 六年六月 又食而失推. 是時守敬方知院事 亦付之無可奈何 況斤斤守法者哉. 今若徇舊 向後不能無差. 於是禮部奏開局修改 乃以光啓督修曆法.

曆局 사업은 1633년 가을 徐光啓가 죽기 전까지 세 차례, 그리고 李天經督修를 이어받은 뒤 두 차례에 걸쳐 전부 137권의 <崇禎曆書>를 황제에게 올림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했다. 1610년 리치가 죽을 무렵, 리치는 충분한 기술과 자료를 도입한 뒤에 修曆사업에 착수하고, 한 번 착수하면 曆法의 전 체계를 기독교적 우주관에 입각한 유럽 曆法체계로 대치할 것을 생각한 것에 반해 徐光啓는 즉각 修曆사업에 착수하고 전통역법이 약점을 드러낸 부분에만 서양 역법을 선별적으로 채택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1635년에 완성된 <崇禎曆書>는 두 사람 생각의 중간어림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0년 후, 오랑캐에서 일어나 중국의 천명을 물려받은 청조가 <崇禎曆書>의 이름을 <時憲曆>으로 바꿔 왕조의 曆法으로 채택한 것은 어찌 보면 리치와 徐光啓, 두 사람의 이념이 절충된 소산인 이 새 曆法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