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절 황제, 관료 및 환관들과의 관계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다이묘들을 포섭함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에 적어도 겉보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신자들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경험이 중국 선교에서도 위로부터 改宗방침을 세우는 근거가 되었다. 리치를 위시한 중국 선교사들은 황제에게 접근하는 데 최대의 목표를 두었다. 그들은 萬曆 황제가 제2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肇慶에 자리 잡을 때부터 그들은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접촉한 중국의 권력자들은 兩廣총독을 위시한 관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관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황제의 대리자들인 이들을 통해 황제의 곁으로 이르는 길을 살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에서의 이들의 권력을 선교사업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지방의 관리들을 통해 황제 곁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아득한 것인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닫게 된 선교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더 빠른 지름길이 있는지 열심히 알아보곤 했다. 1587년 루지에리가 廣西省을 여행할 때 桂林의 한 황족을 방문하려 애쓴 것도,[128] 1595년 리치가 <交友論>을 지어 南昌建安王에게 헌정한 것도[129] 모두 같은 맥락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128] <中國誌> 181-283.

[129] <中國誌> 281-282. 이 책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로 方豪, 利瑪竇交友論新硏(<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이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리치는 황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순찰사 신부의 마음을 아는 리치 신부는 皇都 北京에 이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남김없이 검토했다. 먼저 그는 황제의 가까운 친척인 그의 친구 建安王을 움직일 생각을 했다. 그는 황제에게 갖다 바치려 생각하고 있던 시계와 여러 가지 예물들을 왕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더 생각해 본 뒤 이런 접근방법이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황제가 친척들에게 공직 맡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언제든 자기 자리를 넘겨받을 가능성이 있는 친척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접근방향은 위험한 것으로, 선교사업 전체를 망칠 수도 있는 길이었다.”[130]

[130] <中國誌> 297.

관리들과의 관계에서 리치는 예물을 크게 활용했다. ‘예물뇌물의 경계를 엄격하게 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유럽에서는 값싼 물건이라도 중국에서는 진귀하게 받아들여지는 품목이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예물로 주고도 무거운 뇌물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들이 즐겨 사용되었다. 리치가 광동성의 嶺西道尹 黃時雨에게 프리즘 하나를 예물로 주는 데서 이런 면을 알아볼 수 있다.[131]

[131] <中國誌> 197-198.

 

다음날 嶺西道尹이 지방의 볼일을 끝내고 肇慶으로 돌아왔는데, 새로운 고발사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리치 신부와 알메이다 신부는 신분에 따른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를 관청으로 찾아갔다. 벌어져 있는 일에 대해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리치는 그가 들여다보기를 매우 즐겨하고, 또 몹시 가지고 싶어 하는 삼각형 유리 프리즘을 증정했다. 그는 이 예물에 매우 기쁜 기색이었으며, 프리즘 가격을 물어보고 유럽에서는 몇 푼 하지 않는다는 대답에 더더욱 기뻐했다.

그는 이 대답이 자기가 예물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꾸며서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는 다짐하기를 이토록 귀중한 물건은 어느 곳에서든 높은 값을 받을 것이며, 예물을 일방적으로 받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예물로 받기보다 차라리 값을 치러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심부름꾼을 시켜 금 두 량을 내어주는데,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예모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중국 관리들은 관직에 있는 동안 瀆職에 대한 고발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산다. 이 방문의 결과 신부들은 고위관리 한 사람의 호의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알메이다 신부의 거주 허가도 어렵지 않게 얻어졌다.”

 

유럽에서 프리즘의 가치가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몇 주일 후 공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프리즘 하나를 이십 량에 팔았다고 하고,[132] 몇 년 후 瞿太素는 프리즘 하나를 팔아 오백 량도 넘는 돈을 받았다고 한다.[133]

[132] <中國誌> 153.

[133] <中國誌> 318.

肇慶에서 한 차례 쫓겨날 때 신부들은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에게 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했는데,[134] 이때 상금이라고 한 것이 肇慶 知府 王泮의 몫이 되었다는 사실을 리치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다른 상황의 서술에 연결되어 무심코 밝혀진 곳이 있다.[135] 뒤에(1595) 石星의 일행에 끼어 南京으로 여행할 때는 선교사들을 일행에서 떼어내려 하자 프리즘을 내놓고 흥정을 하다시피 하여 南京까지의 여행을 보장받은 일도 있다.[136]

[134] <中國誌> 144.

[135] “두 번째 거주 허가를 청원한 뒤에 약속했던 금 이십 량과 수많은 자그마한 선물들이 자기 손에 들어왔던 사실을 王泮은 잊지 않고 있었다.”: <中國誌> 185.

[136] <中國誌> 265-266.

더 뒤에(1595) 王弘誨를 따라 北京으로 갈 때도 당시 倭亂으로 소란한 시국 때문에 이 리치 일행을 南京에 떼어놓으려 했으나 시계를 예물로 받으며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부득이 北京으로 데려간 이야기도 나온다.[137] 이렇게 北京까지 갔다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는 까닭도 아래 기록을 보면 관계자들을 만족시킬만한 충분한 재물이 없었던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38]

[137] <中國誌> 299-301.

[138] <中國誌> 313-315.

 

(상서)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저택에 그들의 숙소를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잘 아는 황궁의 太監에게 그들의 청원 문제를 부탁했다. 太監은 이런 중요한 일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신부들과 황제에게 갈 예물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약조한 날에 太監과 상서는 예물을 보러 함께 신부들의 숙소로 왔다. 그는 리치 신부에게 각별히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오랫동안 존경해 온 분을 처음 만날 때 쓰는 예법을 그에게 베풀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같은 식탁에서 편안히 담소하며 식사를 했다. 리치 신부는 그들에게 시계, 십자가, 성모상, 클라비코드 등 중국인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물건들과 삼각형의 유리 프리즘 두 개를 보여주었다.

太監은 예물들을 보고 매우 좋아했다. 그는 신부들이 水銀으로 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좋았던 모양이다. 이것을 알면 황제도 제일 흥미있어 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며, 여기에는 엄청난 의 소유자인 중국 황제도 예외가 아닌 듯, 그 신하는 신부들에게 그런 재주가 없다는 대답을 듣자 그들의 청원에 등을 돌려버렸다. 그는 많은 이유를 들어 자기가 황제에게 외국인을 위한 말씀을 올릴 수 없다고 했다.

같은 이유로, 그리고 여러 친구들의 충고를 들은 뒤, 상서마저 외국인의 일에 말려드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는, 자기 힘에 한계를 느끼고 신부들을 南京으로 도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신부들은 이 일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그 때까지 들인 많은 노력과 경비를 수포로 돌리지 않기 위해 상서가 떠난 후 따로 집을 세내어 한 달 동안 더 北京에 머물렀다. 후견자가 떠난 후 신부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 보람도 없었다. 아는 사람들 모두, 리치 신부의 친구들이나 관리들까지 그들의 단순한 방문조차 거절했다. 외국인과의 교섭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커서, 상서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해 준 편지를 내밀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성공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肇慶 정착 초기에 선교사들의 知府 王泮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王泮은 자기 직권 안에서 선교사들의 요구에 응해 주었을 뿐 아니라 선교소에 걸도록 편액을 써 줌으로써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139] 중국 측 기록에 아무리 그가 성품이 恬淡하고 생활이 儉素, 廉潔한 관리였다하더라도[140] 리치의 기록을 보면 리치의 눈에는 그가 재물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람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고, 이런 인상이 리치가 다른 관리들을 대하는 데도 바탕이 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신부(루지에리와 리치)가 모든 고충을 일일이 설명하자 王泮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 청원은 건축업자인 譚某에게 넘겨졌는데, 이 사람은 王泮이 선교소에 관한 모든 일을 의논하는 상대였다. 그렇게 한 것은 이 청원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심뽀였다. 둘은 한 패거리였다. 건축업자가 바람잡이 역할이었다. 王泮은 신부들이 처음 거주 허가를 청원할 때 그랬던 것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 거주 허가를 청원한 뒤에 약속했던 금 이십 량과 수많은 자그마한 선물들이 자기 손에 들어왔던 사실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141]

[139] <中國誌> 158-9.

[140] <明人傳記資料索引> 王泮.

[141] <中國誌> 185.

王泮과의 관계가 선교사들에게 계속해서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루지에리가 1584년 마카오에 갈 때 王泮은 커다란 관용선을 빌려주면서 시계 하나를 갖다달라고 했다. 물론 값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그 값은 王泮에게 유리하게 정해질 것이었으니, 실제로 뇌물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142] 그런데 당시 마카오의 경제사정이 몹시 나빠서 루지에리는 일 년이나 肇慶에 돌아오지 못하고 시계를 살 돈도 없어서 결국 시계 만드는 기술자를 肇慶으로 보내 王泮으로 하여금 일꾼과 자재를 들여서 만들어 가지도록 했다.[143]

[142] <中國誌> 19에는 관리들이 장인들에게 물건을 살 때 제멋대로 값을 치르는 관습이 지적되어 있다.

[143] <中國誌> 160.

이런 상황에서 肇慶 주민들과 선교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知府로서 王泮은 단순치 않은 태도를 보여주었다. 재판 결과는 선교소 측에 유리하게 나왔으나 그 과정에서 王泮이 선교소 측에 몹시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144] 리치는 재판 진행 당시 王泮의 태도를 좋은 쪽으로 해석해 놓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王泮의 태도가 선교사들에게 전적으로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음이 분명하며, 여기에는 시계의 제작과정에 대한 불만도 작용한 것 같다. 王泮이 주문을 취소했던 시계를 나중에 완성해서 갖다 주었을 때는 기꺼이 받았다고 한다.[145]

[144] <中國誌> 163-165.

[145] <中國誌> 168.

주민들이 리치 등을 知府에게 고발하기까지 이른 것도 知府가 이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낌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그 후 王泮嶺西道尹으로 있을 때 그 동생이 비단을 팔러 廣州에 왔다가 원하는 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선교사들이 주선하여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좋은 값을 받도록 해 주는 등[146] 王泮은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통해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146] <中國誌> 177-178.

王泮이 선교사들에게 바란 것은 재물의 이익만이 아니었다. 肇慶 知府에서 嶺西道尹으로 승진했을 때는 선교사들이 그에게 행운을 가져왔다고 기뻐하고,[147] 몇 해가 지나 다시 승진을 기다리며 초조할 때는 선교사들이 불운을 가져다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 냉담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고 리치는 적어놓았다.[148] 그러나 무엇보다도 王泮의 태도를 크게 좌우한 것은 자신의 직무와 체면에 대한 위협이었다.

[147] <中國誌> 169.

[148] <中國誌> 189.

王泮의 후임 知府王泮과 같이 浙江省 紹興 출신이었는데, 그의 호의로 루지에리와 알메이다가 紹興에 여행할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마침 위에 말한 것처럼 王泮의 동생을 도와준 일을 계기로 선교사들이 王泮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王泮老父와 죽어가는 아이들 몇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149] 둘 다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곳에서는 통역도 여의치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충분한 의사소통 없이 무리하게 선교를 앞세운 것으로 보인다. 王泮의 친척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일, 그리고 그 후 王泮의 태도 변화를 보면 전후 사정이 대략 이해된다.

[149] <中國誌> 176-179.

 

그러나 浙江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좋은 결과를 빚어내지 못했다. 嶺西道尹의 친척들은 신부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무슨 문제라도 일어날까 걱정한 나머지, 루지에리 신부가 없는 동안 廣東 선교소에 위험이 닥쳤으니 신부들이 빨리 돌아오라고 하는 가짜 편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가짜라는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에 신부들은 그곳에 그냥 눌러 있다가,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잘못 전해들은 우리의 친구 肇慶 知府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마지못해 내리자 그제야 어쩔 수 없이 肇慶으로 돌아와 우리와 합류했다.

이 사건의 결과, 그리고 친척들이 보낸 편지로 인하여 우리의 열렬한 보호자였던 嶺西道尹은 그 우정을 차츰차츰 거두어들이고, 마침내는 우리와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심지어 매달 초하루 예식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예방하는 것도 그만두고, 선교소 정문과 응접실에 걸도록 보내주었던 편액과 리치가 만든 지도에 자기가 서명했던 것까지 삭제해 달라고 통보했다. 끝으로, 공적인 장소에서 신부들과 마주칠 때는 전처럼 예절바른 인사를 하는 대신 얼굴을 찌푸려댔지만 선교소를 위협하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뜻밖의 냉담한 태도에 직면한 신부들은 마치 돛으로 달리던 배가 바람을 잃은 것과 같이 되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노를 가지고 낑낑댈 수밖에 없이 되었다.”[150]

[150] <中國誌> 181.

 

루지에리와 리치가 肇慶에 정착할 때 다른 외국인을 그곳으로 초대하지 않고 중국의 모든 법(중국 관리의 모든 명령도 포함하는 뜻이었을 것이다)을 엄격히 지킬 것을 王泮에게 서약했었다.[151] 위의 일이 있기 얼마 전 그들은 동료 한 사람을 더 데려다가 살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王泮에게 청원했다. 王泮은 방문은 허락하지만, 며칠 내로 마카오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산데가 肇慶으로 왔는데, 선교사들은 몇 가지 예물을 가지고 새 知府를 찾아가 산데에게도 거주 허가를 내려줄 것을 부탁했다. 知府는 이 일에 총독의 허가를 얻도록 주선했으나 실패하고, 더 이상의 증원이 없는 한에서 자기 책임 하에 산데의 거주를 묵인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152] 이것은 명백히 王泮의 체면을 깎는 행위였는데, 여기에 紹興 방문을 빌미로 알메이다까지 불러들였던 것이다.

[151] <中國誌> 149.

[152] <中國誌> 175-176.

여기에 겹쳐서 루지에리가 1587桂林에서 황족을 면담하겠다고 廣西 순무를 찾아가는 등 물의를 빚은 일이 肇慶에 알려져, 王泮을 비롯하여 선교사들과 관계를 가졌던 관리들이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게다가 루지에리가 억지로 찾아가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던 廣西 순무 劉繼文이 얼마 후 兩廣총독으로 오게 되었으니, 그 휘하의 관원으로서 선교사들의 존재에 책임을 져야 할 위험이 이들에게 닥쳤다. 그래서 知府는 선교사들에게 즉각 마카오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선교사들은 힘들여 이 일을 무마한 끝에 선교소의 규모를 원래의 규모로 줄이고 더 이상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약속 아래 잔류를 허가받았다.[153]

[153] <中國誌> 184-185.

그러나 결국 총독이 부임한 후 리치 일행은 肇慶에서 쫓겨나 韶州로 옮겨갔다. 韶州에서 관리들과의 관계도 肇慶에서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154] 여기서는 瞿泰素라는 특이한 인물과의 교분이 새로운 요소로 등장한다. 명문 출신이면서 관직에 오르지 않고,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이 사람으로부터 리치는 중국의 상류층 처세술을 많이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1591년 봄 주민들과의 사이에 조그만 분쟁이 생겼을 때 가 이 일을 가지고 知府에게 접근한 방법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154] 정착 장소를 韶州로 정하는 데부터 肇慶에서 소개받은 韶州 관리들의 호의적인 태도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中國誌> 220-225.

 

瞿泰素는 일어난 일을 즉각 知府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선교소 측에서는 마카오에서 동료 한 사람을 데려오려는 참이었기 때문에 두 가지 청원을 한꺼번에 집어넣지 않는 편이 좋다는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한 가지를 들어주는 대신 다른 한 가지를 거절하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瞿泰素는 도발행위는 처벌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고집했는데,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번 일을 그냥 넘길 경우,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질 뿐이라는 것이어서 결국 그 의견을 관철했다. 다음날 그는 知府를 찾아가서는, 이런저런 일을 이야기하기 편리한 장소인 선교소로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가 신부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생각은 적중해서 며칠 후 知府가 그를 찾아왔다. 담화가 이어지던 중에 知府가 선교소의 지내는 형편은 어떠한지 묻자 瞿泰素는 피해를 과장해 가면서 습격사건을 세세히 알려준 다음, 리치 신부는 이 일로 괴로워하면서도 참을성을 발휘해서 조용히 넘기는 편이 좋다는 생각으로 고발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동안 知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도발자들에 대해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를 냈다. 하인들을 불러들여 모습을 살펴보고 그의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 그는 즉각 명령을 내려 포교들을 집합시키고는, 자기의 보호 하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외국인들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한 자들을 밝혀내라고 호통을 쳤다.[155]

[155] <中國誌> 236-238.

 

리치는 韶州 체류기간 동안(1589-95) 중국 고전 연구에 노력을 집중하고 1594년 말부터는 儒生의 복장으로 사대부 행세를 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는 것은 앞 장에서 밝힌 대로다. 1595년 봄 石星을 따라 廣東省을 떠나면서 새로운 신분으로 자리 잡을 기회를 얻었으나, 그 첫 시도는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南京에 자리 잡고 싶은 마음에 리치는 南京 工部시랑 徐大任을 찾아 다음 단계의 후원자로 삼으려 했다. 徐大任廣東省 兵備道로 있을 때 리치와 교분이 있었다고 하고,[156] 1592南京으로 전임하는 길에 韶州에서 리치와 만나서는 南京 여행을 권했다고 한다.[157] 그런데 徐大任의 반응이 리치의 기대를 크게 벗어났다.

[156] <中國誌> 202.

[157] <中國誌> 271-272.

 

리치는 즉각 이 관리를 방문했는데, 선비의 정식 복장을 갖추고, 이런 경우에 많은 관리들이 기대하는 예물을 가지고 갔다. 그는 극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집에서의 생활이 거의 거지와 같을 정도로 검소했다. 인생에 있어서 그의 한 가지 야심은 한 급 한 급 높은 관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그는 南京 시랑이라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치 신부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는 뜻밖의 복장에 놀란 것 같았지만, 탐스러운 예물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그의 놀라움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 욕망은 그로 하여금 방문자를 정중하게 맞아들여 앉기를 청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왔는지를 묻게 만들었다. 리치는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상대방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兵部시랑에게 南京까지의 여행허가증을 받아서 왔다고 대답하고, 그가 보호해 줄 수 있는 도시에 주거를 잡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듣자 그 불쌍한 사내는 너무나 겁을 집어먹어서, 먼저 큰 숨을 한 차례 몰아쉬고는, 이 도시로 온 것은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서 방문자에게 야단을 했다. 南京은 외국인이 거주할 곳이 아니다, 외국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리가 날 것이다, 하고 그는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외국인을 南京에 초대했다는 혐의로 다른 관리들이 자기를 비난할 것이므로 자기를 찾아온 일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리치 신부는 상대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北京 시랑의 허가증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보고도 상대방은 진정의 기색이 없었다. 그는 진정할 생각이 없었고, 리치를 쫓아 보내면서 도와주지 못하는 이유를 수없이 늘어놓고, 빨리 南京을 떠나 어디로든 다른 곳으로 빨리 꺼지라고 일렀다. 는 뒤이어 리치가 머물던 집의 주인을 불러들이도록 사람을 보내서, 리치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그가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의 부하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집주인이 나타나자마자 徐大任은 마구 화를 내며 그를 외국인과 내통했다는, 중국에서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집주인은 심문에 답하여 이 외국인은 北京의 시랑이 데려왔으며, 허가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北京의 시랑이 그런 불법을 행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우기면서 이 불쌍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뜻을 분명히 했다.

증인은 廣東省 肇慶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즉각 대답하기를 그는 이 외국인을 잘 안다, 몇 해 전 난동을 야기함으로써 중국 왕조에 폐를 끼친 이유로 肇慶의 총독에게 추방을 당했던 사람이다, 하였다. 그러자 이 영악한 배우 는 격앙된 말투로 피고가 이런 수상한 인물을 집에 받아들인 죄는 死刑에 해당한다고 했다. 는 자기 자신이 이 외국인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쇼를 벌인 것이다. 마침내 그는 피고인 집주인이 자기 집에 머물게 했던 이 외국인을 廣東省까지 호송하고 지나갈 江西省의 관리로부터 이 외국인을 분명히 호송했다는 확인서를 받아오도록 하라고 결정했다.”[158]

[158] <中國誌> 271-272.

 

리치의 기록에 와 친구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적은 것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1592년에 南京까지의 동행을 권했다고 하는 것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잠깐 가는 정도를 얘기했다면 모를까, 선교사들의 이주를 권유할 이유가 없었다. 승려 노릇하던 리치가 몇 해만에 유삼을 걸치고 나타나 친한 척 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겠지만, 王泮을 업고 肇慶에서 그토록 말썽을 피우던 서양인이 이제 南京에 와서 자기에게 王泮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은 정말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石星은 임진왜란에 관여해서 沈惟敬을 일본 측에 사자로 보내 공작을 펴다가 실패한 죄로 下獄되어 죽은 인물이라 하니 正人君子의 인상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159] 이에 반해 徐大任淸節로 이름을 떨친, 石星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160] 리치는 石星보다 한참 높은 신분인 줄 알고 의 서류만 들이대면 가 꼼짝 못할 줄 알았던 모양인데,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동급의 侍郞으로서 반발심을 느꼈을 것도 이해된다.

[159] <明人傳記資料索引> 石星: 倭入朝鮮 朝鮮乞援 星力主沈惟敬封貢議 及封事敗 奪星職 未幾 倭破南原閑山 帝大怒 逮星下獄死 年六十二.

[160] <明人傳記資料索引> 徐大任: 歷官中外 皆以廉稱 神宗嘗稱其淸節爲天下第一 以工部侍郞致仕.

결국 리치의 南京 정착 시도가 좌절한 까닭은 역시 廣東省에서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치는 徐大任의 도움으로 새 출발을 하려 하였으나 는 이것을 거절했고, 할 수 없이 리치는 가 있는 南京을 피해 南昌으로 갔는데, 여기서는 江西 순무 陸萬垓의 호의를 입어 西士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된다.[161]

[161] 陸萬垓隆慶 戊辰(1568)進士에 든 사람으로, 1594()7월부터 1598()8월 병으로 물러날 때까지 江西 순무로 있었으니 리치의 체류기간 내내 그 보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明 督撫年表> 470. 이 퇴직한 불과 닷새 후에 리치가 韶州를 떠난 것도 과 리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

순무가 리치에게 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리치의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얼마나 리치를 좋아하고 반가워하고 도와주기 위해 열심이었는지만 적어놓았다.[162]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은 리치가 순무에게 南京에서 시랑에게 쫓겨난 일을 이야기했을 때 순무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시랑은 자기 친구이며, 리치가 그토록 정직한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과 알고 있다는 것이 반갑다는 말만 했다는 부분이다.[163]

[162] <中國誌> 277-280.

[163] <中國誌> 279.

후에 리치의 여러 가지 능력을 알게 된 순무는 시계를 만들어 줄 것과 기억술을 자기 아들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도록 중국어로 적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프리즘을 구경하고 싶어 했는데, 나중에 리치가 프리즘을 그에게 선물하려 하자 다음과 같은 옛날이야기를 해 주며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옛날 어떤 수도자가 귀중한 보석을 갖고 있었다. 덕이 높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찾아왔을 때 그 보석을 바쳤다. 찾아온 사람은 보석을 받아들였다가 곧바로 되돌려주면서 말했다. ‘이 보석은 당신 소유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덕이 높은 사람에게가 아니면 이 보석을 바치려 하지 않지요. 그런데 덕이 정말로 높은 사람이라면 물론 보석을 받아 가질 리가 없지요. 그래서 보석은 언제나 당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치 신부, 그대와 나는 똑같은 덕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요.”[164]

[164] <中國誌> 280.

南昌에 와서는 관리들에 대한 접근방법에서도 廣東省 시절에 비해 뚜렷한 발전을 본 것이 나타난다. 예물 돌리는 데도 적당한 을 넘거나 나중에 계속해서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했고, 거주 허가를 문서로 공식화하려 애쓰다가 여의치 않자 이런 입장을 취했다 한다. “주거 확보를 위해 필요한 허가를 관청에 한 차례 신청한 이상, 더 치근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신부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그대로 진행시키는 것이 더 안전한 길이라고 판단했는데, 도장을 찍은 바로 그 관원이 겁을 집어먹어 선교소를 쫓아내려고 제일 안달을 떨리라는 것이 그 추론이었다. 그는 애초에 문제가 생길 상황이 생겨나도록 허가해준 책임이 자기 발등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肇慶에서도 몇 차례 겪은 일이지만, 관리들이 문서를 발급해 주지 않았을 때 선교소에 도움을 주기도 더 쉬울 것이다. 나아가, 신부들이 문서 발급을 고집한다면 관리들에게 의심과 불안감을 심어줄 염려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 몇 해 지낸 경험으로 볼 때, 內國人들이 하는 것처럼 믿거라 하고 처신하는 것이 外國人 티를 내는 것보다 안전할 것 같기도 했다.”[165]

[165] <中國誌> 286.

北京에 헛걸음을 하고 돌아온 후 1599년 초, 南京 정착을 추진하는 동안 리치는 刑部상서 趙參魯, 刑部시랑 王樵, 戶部상서 張孟男, 禮部시랑 葉向高, 御使 祝世祿 등과 방문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166] 짧은 기간 중에 이렇게 많은 고관, 명사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을 리치는 상서의 권위와 瞿太素의 수완으로 돌렸지만, 리치가 가진 과학 지식과 신기한 서양 물건들도 적지 않은 몫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166] <中國誌> 321-323.

王弘誨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데도 리치의 과학 지식이 중요한 몫을 맡았지만, 그를 따라 南京에 왔을 때, 과학 지식에 근거한 자신의 명성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 절감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王弘誨에게 준 예물 가운데 <山海輿地全圖> 한 부가 들어 있었는데, 상서의 南京 도착을 축하하는 다른 관리들의 예물 가운데 같은 지도의 草稿를 복제한 지도가 들어 있었다. 재미있게 생각한 상서가 그 지도를 보낸 南京순무 趙可懷에게 리치를 소개해 주자 순무는 리치의 학식에 감복해서 여러 날 동안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극진히 대접하는 바람에 北京행 출발이 일행보다 늦어져 중간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167]

[167] <中國誌> 301-304.

관리들과의 관계도 南京에 온 후로 더욱 수준이 높아졌다. 정착 준비를 할 때 방문을 주고받은 고관들 몇 사람 이름을 앞에도 인용해 놓았지만, 그 후에도 魏國公, 豊城侯 등 신분이 높은 인물들, , 李贄 등 명망 높은 인물들과 교류했다 한다.[168] 廣東省에서 관리들을 예물로만 다루던 데서 벗어나 리치 자신이 한 사람의 선비로 행세하기 위해 南昌에 있는 동안 기울인 노력이 결실을 맺어, <交友論>, <西國記法><輿地全圖>[169]著者로서, 수학과 천문역법에 탁월한 지식을 가진 학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중을 받게 된 것이다.[170]

[168] <中國傳敎史>에는 魏國公이 개국공신 徐達의 자손 徐弘基로 고증되어 있다.

[169] <中國誌> 331: 南京에 정착한 얼마 후 다시 그린 세계지도.

[170] 廣東省에 있을 때 관리들을 상대한 일을 기록하면서 리치는 대등한 를 취한 것처럼 기록하려 애쓴 흔적이 있는데, 정황으로 보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선교사들이 승복을 입었을 때는 중국인 친구들도 동격으로 대하기 어려웠다고 하는 리치 자신의 기록(<中國誌> 259)이 있다.

 

명나라 말기 중국에서 관리보다 황제의 대리자 노릇을 더 알뜰하게 맡고 있던 것은 환관이었다. 특히 정치를 외면하고 있던 萬曆황제 아래서는 환관의 권력이 극히 강성했다.[171] 리치의 기록에 환관의 존재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599南京에 자리 잡을 무렵의 일이고, 이듬해 北京에 올라가 황제에게 진공을 올리는 과정에서 깊이 얽혀들고, 리치가 죽은 후 葬地를 하사받는 과정에까지 환관들과 이해가 엇갈리는 등 많은 관계를 가졌다. 환관과의 관계에 대한 리치의 첫 기록은 권세 높은 환관인 南京 守備太監 馮保의 오만함에 굽히지 않았다는 自讚이다.

[171] 神宗이 정치를 외면한 상황은 R Huang,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New Haven, 1981): 85-86 A Chan, "Late Ming Society and the Jesuit Missionaries": 153-155 참조.

 

황제를 알현할 때 萬萬歲를 외치는 관습이 있다. 한 급 아래인 황후나 그 자녀를 뵐 때는 萬歲라고만 한다. 황궁 환관들은 얼마나 거만한지 자기들에게도 무릎을 굽히며 萬歲를 외칠 것을 바란다. 리치 신부는 고관들에게보다 더 무거운 를 환관에게 베품으로써 고관들에게 모욕이 가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황궁의 청지기에게 그런 식으로 인사할 것을 거절했다. 리치 신부는 중국인이나 다른 동양의 외교인들을 대할 때 일정한 합리적인 예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워 왔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도 인사를 하는 통상 예법을 지키도록 조심했다. 太監은 귀가 어두워서 상대방의 말을 귓전에 대고 큰 소리로 되풀이해 주는 비서를 데리고 있었다. 첫 인사 때 이 친구가 제멋대로 자기 상전에게 만세를 불러대니 늙은이가 하도 기뻐서 접견이 끝날 때 훌륭한 선물을 리치 신부에게 주었다. 신부는 이 선물을 사양하고, 太監이 프리즘 하나 달라고 하는 것도 거절했다. 이것으로 그는 이 권세 높은 환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었고, 이 때 그가 취한 태도를 南京의 다른 모든 환관들이 칭찬해 마지않았다.”[172]

[172] <中國誌> 333-334. <中國傳敎史>에는 뒷부분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으나 대의에는 차이가 없다.

 

리치는 중국인들과의 수작을 기록함에 있어 자기 입장을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이 高位太監에게 얼마나 결연한 태도를 보였는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뒤에 겪은 일에서도 환관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계속 보여준다. 南京 정착 당시의 사회상을 그릴 때 환관의 횡포와 강직한 관리들의 저항을 기록하면서 환관이란 부류는 무식하고 야만스러우며 염치도 도덕도 알지 못하고 말할 수 없이 거만스러운, 바로 化身이라 할 존재들이다. 이 짐승 같은 것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니 탐욕으로 더더욱 야비해진 그들은 몇 달 안 돼 전국을 전쟁 중보다도 더 심한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173]고 극단적 표현을 쓰기도 했다.

[173] <中國誌> 343-344. 이 대목에서는 리치의 협조자 馮應京을 염두에 두었을 것 같다. 馮應京은 환관의 횡포에 대항하다가 관직을 빼앗기고 투옥된 인물이다.

南昌 있을 때 황족 建安王北京행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쳐다보다가 중국에서 황족이 처한 위치를 알게 되면서 포기한 일이 있다.[174] 리치가 南昌을 떠난 뒤에도 소에리오가 建安王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建安王北京행을 주선하도록 鹽政을 담당하는 태감을 소개해 주었다. 이에 신부들은 환관들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일을 그 불성실한 족속들에게 맡겨서는 안 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 리치의 기록이다.[175]

[174] <中國誌> 281-282, 297.

[175] <中國誌> 351.

16005월 두 번째 北行에 나설 때 리치 일행은 劉氏 성의 太監이 인솔하는 船團에 편승했다. 승선을 주선해준 御史 祝世祿의 안면이 작용한 덕분도 있었겠지만, 劉 太監이 리치 일행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지 리치는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臨淸에 이르렀을 때 권세 높은 稅監 馬堂과의 사이에 어려운 사정이 생기자 劉 太監은 리치 일행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한다.[176]

[176] <中國誌> 355-360.

이렇게 해서 최고위 太監의 하나인 馬堂의 손아귀에 들어간 리치는 중국에 들어온 이래 최악의 상태에 몇 달 동안 빠져 있으면서 환관의 횡포를 극한까지 겪게 된다. 어느 날 소지품 검사를 빙자한 노략질 끝에 聖物들까지 빼앗기는 장면에서 리치의 감정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찬배만은 그럴 수 없었다. 리치 신부는 돌려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馬堂에게 설명하기를 그것은 천지의 에게 예물을 올리는 그릇이며 기독교인은 그것을 매우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특별한 자격을 서품받은 사람이 아니면 만지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馬堂은 성찬배를 집어들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그대는 아무도 만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만지고 있지 않은가?’ 하였다. 사악하고 무지한 자들은 힘으로 되는 일이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런 모독은 리치 신부의 인내심으로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일이라서 그는 화가 나 거의 눈물이 터질 지경이 되어 錢袋馬堂의 발밑에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제발 그릇의 무게만큼 금을 가시시오. 아니,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지시오. 그러나 그릇만은 내게 돌려주시오.’”[177]

[177] <中國誌> 366.

1600518南京을 떠난 리치 일행이 臨淸에 도착한 날짜는 기록이 없으나 두 달 정도의 여정이었다고 생각하면 臨淸에서 馬堂에게 억류된 후, 그 이듬해 124北京에 도착하기까지 반 년 가량의 幽囚생활을 한 셈이다. 馬堂이 리치 일행을 억류한 동기에 대해 進貢물품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고 리치는 일관되게 기록해 놓았지만, 정황으로 보아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 馬堂臨淸에서 劉 太監으로부터 리치 일행을 넘겨받을 때, 선교사들의 進貢 청원을 속히 황제에게 올려 허가를 받아 주겠다고 했으며, 결국 꽤 늦기는 했어도 황제가 리치를 北京으로 불러올린 것은 결국 이 馬堂의 보고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178]

[178] <中國誌> 361-362.

그 후 禮部에서 리치 일행을 처리하는 방안에 대해 황제에게 奏章을 올릴 때, 리치는 환관들을 통해 일의 경위를 세밀하게 알고 대처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대목에서는 신부들의 친구인 환관들이라고까지 표현되어 있다.[179] 황제가 批答을 계속 거부해서 禮部 관리들이 난처한 입장에 빠졌을 때 리치가 찾아가 자기네 北京 거주를 윤허하도록 내용을 고치면 批答이 내릴 것이라고 훈수까지 했다고 하는데,[180] 환관들과 내통해서 일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책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한 듯하다.

[179] <中國誌> 385-386.

[180] <中國誌> 387.

그리고 황제로부터 北京 거주 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써 보았지만 끝내 공식 허가를 얻지 못하고 황제의 구두 허가를 환관들을 통해 얻었다고 한다.[181] 北京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리치가 환관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분명한 일인데, 관리들과 환관들이 대립한 사이에서 결국 관리들 쪽으로 편을 정함에 따라 환관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논조를 취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81] <中國誌> 389.

리치 일행의 일이 정상적 행정계통을 거치지 않고 환관들을 통해 진행되는 데 대한 불만이 藩邦使節을 관장하는 禮部 主客司에서 터져 나왔다.[182] 관리들은 상황을 공식화하여 처리하기 위해 리치 일행이 환관들의 관장 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하고 리치 일행이 進貢奏章을 올린 다음 官府에 보고하지 않고 잠적해 버린죄로 수배했다. 이로 빚어진 충돌을 리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2] <明史> 326, 18상하: 至二十九年 中官馬堂以其方物進獻 自稱大西洋人 禮部言 會典有西洋里國 無大西洋 其眞僞不可知 又寄居二十年 方進貢 則與遠方慕義特來獻琛者不同 且其所貢天主及天主母圖 其屬不經 而所携又有神仙骨諸物 夫旣稱神仙 自能飛昇 安得有骨 有骨則唐韓愈所謂凶穢之餘 不宜入宮禁者也 況此等方物 未經臣部譯驗 徑行進獻 則內臣混進之非與.

 

어느 날 놀랍게도 여나문 명 병졸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자기들 대장이 할 말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처음에 일행은 외국인을 골려 돈을 울거내려는 수작이거니 생각하고 명령에 따르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병졸들이 즉각 포승으로 그들의 목을 묶기에, 그제야 관부의 공식 명령임을 깨닫고 그 대장을 만나러 갔다. 대장은 그들에게 使臣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명령을 전해 주었는데, 일단 進貢을 마친 이상 관리들의 힘을 빌어 환관들에게 당하는 곤욕을 면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 명령을 반가워했다. 대장은 일행을 다음날까지 자기 집에 유치시켰는데, 도망가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우고 보초까지 세워 놓았다.

황궁에서 일하는 馬堂의 동료가 이 소식을 듣고 대장 집으로 쳐들어와 자물통을 부수고, 외국인에게 폭력을 써서 강도질했다는 죄목으로 요란하게 보초들을 닦달하는 바람에 다들 도망가 버렸다. 그는 신부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다며, 使臣을 담당하는 관리들에게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황제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들을 황궁으로 데려가려 한다고 환관이 말했지만 리치 신부는 이 제안을 사양했다. 그리고 양측이 모두 다음날 使臣을 담당하는 관아에 출두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그 환관은 관아에 먼저 나타나 담당 관리에게 이 일은 황제께서 馬堂에게 맡겨놓으신 일이니 禮部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전날 동원된 대장과 병졸들을 외국인에게 폭력을 쓰고 소지품을 빼앗은 혐의로 잡아넣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관리는 동료들과 의논하고 나서 말하기를 강도질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신부들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며, 법률에 따라 그들을 藩邦 사신들의 숙소인 四夷館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환관은 자기 말이 먹혀들지 않는 것을 알자 일행을 관리들에게 맡겨놓은 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183]

[183] <中國誌> 379-380.

 

관리들에게 맡겨진 리치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환관들을 통해 황제에게 접근한 혐의에 대해, 자기들은 환관들의 강압에 의해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고관들도 환관들에게 어쩌지를 못하는데 한낱 외국인으로서 어찌할 수 있었겠느냐고 항변했다. 그러면서도 또, 자기들은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여러 해 동안 구속 없이 살아왔고 北京에도 다녀간 적이 있으니 자기들은 외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모순된 탄원도 했다고 한다.[184] 이에 대해 담당 관리는 단호하게 이제 리치 일행의 일은 자기 관아에서 처리할 것이며, 北京 시내 거주는 허락할 수 없으니 四夷館에 들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184] <中國誌> 380-381.

이때까지 進貢物을 올리고도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없었던 리치는 四夷館으로 옮긴지 사흘 후 藩邦 사신의 자격으로 황궁으로 알현하러 가게 되었으니, 정상적 행정절차를 밟게 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전날 예행연습까지 하고 새벽부터 대기해서 알현한 대상은 황제가 아니라 빈 옥좌였다.[185] 황제의 사보타지로 제국의 행정이 空洞化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186]

[185] <中國誌> 383-384.

[186] 15783, 동방으로 떠나기 직전 동료 예수회사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세바스챤 왕을 알현한 것을 리치는 壯途의 출발점으로 소중히 기억하고 있었다.(Spence 전게서: 36) 이에 대칭이 되는 클라이막스로 이 날을 기다려 왔을 리치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이 되었으리라.

리치 일행이 환관들과의 결탁에 대한 禮部 관리들의 추궁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吏部 僉事로 있던 曺于汴[187]이었는데, 그는 四夷館 책임자를 찾아가 리치 일행의 선처를 부탁하다가 거절당하자 馬堂이 길을 막고 강도, 살인을 한들 관리들 중에 나서서 제지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의지가지없는 외국인이 그에게 항거하지 못했다고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가?” 윽박질렀다고 한다. 그 결과 리치는 신병 때문에 四夷館 밖에서 살아야겠다는 형식적인 탄원을 올리고 北京 시내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188]

[187] <畸人十篇>의 제5편 상대로 나오는 曺給諫’. 萬曆 20(1592)進士에 들고 曺南星을 따라 東林黨에 들었다가 魏忠賢의 배척을 받았다. <明人傳記資料索引>에는 崇禎 초에 左都御史함에 憲規振擧하여 臺中肅然하였으며 古大臣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188] <中國誌> 387-388.

자유로운 활동을 시작한 리치는 다른 도시에 처음 정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고관들의 호감을 얻는 데 제일 먼저 주력하고, 또 그 성과를 가장 앞세워서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았다.[189] 그 명단에는 武英殿大學士 沈一貫, (南京)刑部시랑 王汝訓, 刑部상서 蕭大亨, 吏部상서 李戴, 吏部시랑 馮琦 등이 나와 있다.

[189] <中國誌> 390-392.

그 가운데 李戴, 馮琦와 대화한 내용이라고 해서 뒤에 <畸人十篇>의 두 편을 만든 것이 있는데,(1편과 제2) 그 중 馮琦馮大宗伯으로 등장시킨 제2편의 내용이 <天主實義> 3편의 앞부분과 거의 똑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天主實義> 출간은 1603년의 일이지만 그 내용은 1596년까지 완성되어 라틴어로 번역, 이듬해에 일본 주교 체르케이라의 승인을 받았던 것이므로,[190] 馮琦와의 실제 대화내용이 <天主實義>에 들어갔다고 보기 어렵다. <畸人十篇>에서 馮琦가 죽기 전에 귀의할 뜻을 비쳤다고 하는데, 馮琦李贄 탄압에 앞장서는 등 당대의 보수적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곧이듣기 어렵다. 신분이 높은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리치의 서술에 恣意的인 면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예라고 하겠다.

[190] J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1985): 8.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