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에서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개헌이 응급수술이 아니라고 보는 의견을 말했다. 30년 동안 운영해 온 헌정체제의 문제점을 차분히 검토해서 더 바람직한 체제를 빚어내는 과제로 보는 것이다. 지금 상황을 헌정 위기로 보는 것은 옳다. 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응급조치는 필요하다. 단 그 응급조치는 개헌 자체가 아니라 개헌이라는 큰 수술의 준비를 위해 건강을 확보하는 조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 ‘거국내각얘기에서 보는 것처럼 권력구조 문제에 관심이 집중된다. “누가권력을 운용하느냐 하는 것만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누가 맡느냐에 따라 권력의 운용 방향이 크게 좌우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만 관심을 쏟다가는 현직 대통령과 여러 정당 사이의 힘겨루기와 눈치보기 속에 지금의 위기 상황이 요구하는 국가적 과제가 소홀히 되기 쉽다. 국가를 어느 정도 정상상태로 되돌려놓는 데 필요한 과제들을 시급히 파악해야 한다. 과제가 파악되면 누가 그 과제를 맡아야 할지도 갈피가 잡힐 것이다.

 

국무총리의 큰 역할이 필요할 것을 모두들 내다본다. 대통령 직이 유고가 되었으니 행정부 수반으로서 총리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럴싸한 이름들이(더러는 그럴싸하지 않은 이름들도) 들먹여지기 시작한다. 이 이름의 주인들이 눈치만 보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난국 극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총리를 맡는다면어떤 일들을 꼭 해야겠다는 의견을 내놓아 국가의 당면 과제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시켜 주기 바란다는 말이다.

 

나서주는 이가 없으니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 “내가 총리를 맡는다면어떤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밝히겠다.

 

바둑 초보자의 솜씨가 늘기 위해서는 큰 곳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소탐대실(小貪大失)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만 지키면 아마추어 고수까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진짜 고수가 되려면 급한 곳을 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광치(狂治)’가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부문이 없다시피 하지만, 그중에서 문제가 급한 곳을 먼저 찾고 이어서 큰 곳을 찾아야겠다.

 

가장 급한 문제는 남북관계다. 박근혜는 북한이 곧 망한다는 확신을 갖고 남북관계에 임해 왔다. 20년 전에 유행하던 북한붕괴론에 지금까지 집착한다는 것은 그의 정신질환 증세 중 가장 분명한 것이다. 개성공단 폐쇄에서 사드 배치, 북한 주민 이탈 권유까지, 제 정신 가진 사람의 행동으로 볼 수 없는 짓으로 일관해 오지 않았는가.

 

어떤 일보다 이 문제가 급한 것은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관계국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 관련된 박근혜의 소행 중에는 제대로 결정된 대한민국 정책이 아닌 것이 많으니까 우리 정부가 정신 차려 정책을 정비하는 동안 기다려달라고 국제사회에 부탁해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에게 지난 몇 해 동안의 맹목적 적대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을 심어줄 필요가 크다. 북핵문제의 심화를 남한 정부가 부채질해 온 것은 민족사회에 대한 죄악일 뿐 아니라 인류사회에도 큰 폐를 끼친 것이다.

 

그보다 덜 급하지만 크기는 훨씬 더 큰 과제가 증세(增稅)’. 박근혜의 광치만이 아니라 앞서 이명박의 우치(愚治)’를 조장한 것이 내야 할 세금 줄이고 싶어 하는 자들의 욕심이다. 어찌 보면 눈에 보이는 정치계의 잘못은 그림자일 뿐이고 대한민국 고질병의 실체가 이 욕심이다. 이번에 드러난 두 개 재단의 문제를 보더라도, ‘삥 뜯기의 전형이 아닌가. 몇 백억 삥을 뜯기 위해 해마다 수십조 국가 세입을 포기하는 조세정책이 여러 해 계속되었으니 국민의 복리와 안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서도 국고는 계속 쫄아들을 수밖에.

 

기업하기 좋은 나라”? 그런 걸 왜 일부러 만들어 줘야 하나? 기초 인프라 제공이라면 국가가 해줘야 하겠지만 왜 세금을 깎아줘야 하나? 세금 깎아줘서 기업하는 사람에게 좋은 조건 만들어주면 기업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금을 더 내고 국가의 서비스를 덜 받게 된다. 소수 집단에게 특혜를 줘야 삥 뜯기가 원활하겠지만 한도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적어도 OECD 평균 수준까지는 법인세 등 세율을 높이는 것을 국정의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는 공권력의 순화(馴化). 사법부 쪽에도 살필 문제가 있지만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검찰과 경찰이다. 검찰과 경찰의 일원적 전국조직은 파시스트국가의 확실한 조건이다. 이명박의 우치와 박근혜의 광치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데 검찰과 경찰의 파시스트조직 성격이 큰 몫을 했다. 두 조직이 공권력 행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집권세력의 범죄행각이 이 수준에 이를 수 없었다. 두 조직을 지역 별로 분할해서 정치권력의 행동대 노릇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

 

현 헌법상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임명을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깜냥도 안 되는 위인들을 편의상 앉혀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들통이 크게 나다 보니 박근혜도 진짜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판국이다. 민심이 정부에게 어떤 과제를 요구하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그 과제에 적합한 인물에게 자리를 맡기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위 세 가지 과제만 확실히 내거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지지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