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헌법에 문제가 많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고, 따라서 개헌이 빨리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답답했다. 그러나 개헌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지금은 개헌을 서두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헌은 외과수술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건강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영양을 섭취하면서 살다가 더러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정상적 입법활동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신체 구조에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뜯어 고치지 않고는 건강과 기능이 길게 유지될 수 없을 때 수술을 행한다.

 

수술 중에도 응급을 요하는 것이 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급성 질환이 발견되었거나 사고로 부상을 당했을 때는 미리 계획하지 않았던 수술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십 년 시행되어 온 헌법을 개정하는 일은 그런 응급수술이 아니다. 만성 심장질환이나 디스크 수술처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편한 대로 살아가다가, 여러 가지 조건을 차분하게 고려해서 수술 여부와 수술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수술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의 준비가 중요하다. 수술 생각이 났다고 바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즉흥적인 생각대로 뜯어고쳐 놨다가 결과가 신통치 않다고 얼마 안 가 다시 수술대에 올려놓는 식으로는 안 된다. 최소한의 부담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되 상당 기간 재수술의 필요가 제기되지 않도록 확실한 계획을 세워놓은 뒤에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

 

87헌법 제정에는 졸속의 문제가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과제가 너무 절박하게 떠올라 있어서 시간을 넉넉히 끌기 어려웠다. 지금은 훨씬 더 차분한 준비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우선 진찰에 시간이 필요하다. 개헌이 '블랙홀'이라며 집권세력이 며칠 전까지도 개헌 논의를 가로막아 왔다. 지금 '개헌'이라 하면 권력구조 문제 이외의 내용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것이 그 때문이다. 나 역시 헌법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개헌 내용에 관한 의견이 별로 없다. 하지만 헌법의 내용이 권력구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밖의 내용 중에도 바꾸거나 고칠 것이 적지 않으리라는 상식적인 생각은 갖고 있다. 개헌 논의가 차분히 진행된다면 바람직한 개헌 방향에 관한 중요한 의견이 많이 나올 것이다.

 

'헌정 위기'가 개헌 논의 봉쇄를 푸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위기는 현행 헌법의 잘못된 내용에 직접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잘못으로 인한 위기다. 이 위기를 정치적 노력으로 해소한 뒤에 개헌 논의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 오래된 병을 고치기 위한 수술을 일시적인 열병에 걸린 상태에서 행해서는 안 될 것 아닌가.

 

그 동안 개헌을 '지론'으로 주장해 온 정치인들도 지금의 위기 상황이 해소될 때까지는 자제하기 바란다. 하물며 '개헌 주도'를 명분으로 이 상황에서 '거국내각'의 칼자루를 넘겨다보는 추한 꼴은 보고 싶지 않다. 거국내각 자체가 '무책임'의 행태가 되기 쉬운 것인데, '기회주의'까지 겹쳐져서는 안 될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