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Bell, <The China Model> 번역 작업이 마무리 단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용 중 벨 교수의 생각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을 몇 뽑아 손님들께 보여드린다.

 

 

선거민주주의는 근대 서방사회에서 거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의심한다 해서 바로 도덕파탄자로 몰리지는 않지만, 11표의 원칙에 의문을 표하고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사악한독재정권의 나팔수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나아가 우리 사이에는 선거민주주의가 보편적 선으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일 뿐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위해 좋은 것이다. 따라서 사악한독재정권이 쓰러지면 11표의 원칙에 따라 구성되는 정부가 그 뒤를 이을 것을 기대한다. 다른 대안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최상의 정치체제로 간주된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최상의 정치체제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말이다. 정치지도자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원칙 위에 여러 가지 좋은 장치들이 부가되어야 하고, 이런 부속장치를 놓고는 한없는 논쟁이 계속된다. 시민사회, 사회적 정의, 직장 민주주의, 협의를 위한 포럼들, 권력 감시 장치의 확장, 등등. 그러나 어떤 장치든 부착되는 대상이 선거민주주의의 몸통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현실주의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가 빈곤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주의를 주기도 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 (1968)에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해 정치적 질서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저개발사회에서 정치 참여를 늘리려는 조급한 시도는 연약한 정치체제의 균형을 무너트려 버릴 수 있으므로 정치적 질서와 법치 등 경제적-사회적 발전에 필요한 조건을 제공하는 개발독재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헌팅턴이 독재를 항구적 대책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었다. 발전이 어느 정도 이뤄지면 민주주의 시행을 위한 조건이 갖춰지는 것이고, 그럼에도 독재를 계속한다는 것은 도덕적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상주의현실주의의 차이는 시간이 늦고 빠른 데 있을 뿐이다. 선거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이의가 없는 것이다. 인종전쟁, 극심한 빈곤, 만연한 부패, 교육의 미비 같은 조건들이 민주주의체제의 수립과 발전을 가로막더라도,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인 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표현으로는 역사의 종말을 늦추는 일시적 조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합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도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선거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체제라고 하는 믿음이 중국에서도 우세하다는 사실을 뜻밖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중국과 서방 사이의 문명의 차이에 관계없이, 많은 중국 정치사상가들도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체제라고 하는 견해를 갖고 있다. 다당제 선거체제 도입을 꾀하는 정치운동의 조직은 중국에서 위험한 짓이다. 그래서 류샤오보가 감옥에 간 것이다. 그러나 학술계의 선거민주주의 논의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선거민주주의가 이처럼 광범한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국가 최고지도부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뽑는 제도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 아닌가. 백년을 넘는 나라가 몇 안 되는데, 중국 과거제의 1,300년 역사와 비교가 되는가? 어떤 정치체제나 마찬가지로 장점도 갖고 단점도 가진 제도인데, 언제 어디서나 최상의 제도라고 단정하기에는 충분한 경험이 못 되는 것 같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지도자에게 경험(과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제도가 거의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직장이건, 학교건, 병원이건, 감옥이건, 어디에나 권력의 행사가 있게 마련이다. 어느 곳에서나 최고지도자의 권력 행사는 경험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어느 회사나 대학에서도 최고지도자의 채용에는 지도력의 경험, 특히 같은 분야에서의 경험을 참고로 한다. 그런데 유독 정치권력만이 예외다. 11표의 원칙에 따라 선출된 사람이기만 하면 경험의 유무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거민주주의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정치체제의 필수 요소라고 하는 믿음을 우리가 갖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정치학 잡지의 논의를 찾아 읽을 동기와 시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으니, 학술문헌의 세밀한 검토를 통해 이런 믿음이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소외되어 있던 여성이나 소수집단이 참정권 획득을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오는 과정에서 평등한 투표권에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를 통해 국가 정체성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과 연계시키는 추세 속에 참정권을 인간 존엄성의 핵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하나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헤게모니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선거민주주의를 유일한 정치게임으로 보급했고 전 세계 인민이 그 강의를 들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대로, 지배국의 이념이 지배적 이념이 되는 것이다.

신의 앞에서 우리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는 관념이 정부 앞에서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관념으로 이어지고, 그 정치적 평등이 11표의 원칙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것 같다. 투표 행위에는 뭔가 심리적 권력의 경험을 부여하는 느낌이 있다. 나를 지배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 내가 한 몫 했다는 느낌.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까지 뻗칠 것 같은 권력의 느낌을 주는 이 투표의 권리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11표의 원칙을 폐기하거나 조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동등한 투표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패배자, 정치적 판단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낙인을 찍혔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