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모델>은 불과 몇 달 동안에 내 다른 어느 책보다도 많은 비평과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공론의 장에서 이런 주목을 받은 것이 내게는 물론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비판의 화살도 받을 만큼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도발적 표현을 피하려고 일부러 노력도 했고 책의 3분의 1 분량을 따분한 주석으로 채워놓기까지 했는데도 원색적인 정치적 감정을 꽤 불러일으킨 것 같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그리 도발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의 정치이론과 제도에 진지한 고려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 그리고 중국에서의 정치 발전(또는 퇴보)을 논하는 기준으로 중국의 정치문화와 역사를 채택해야 한다는 관점 정도를 담은 책이다. 미국의 정치제도 개혁을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논한다면 우스운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중국의 정치체게 개혁을 미국의 건국이념이나 칸트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 자유민주주의만이 절대적 정당성을 지닌 정치지도자 선출방법이라는 맹목적 믿음(“역사의 종말”)이 하나의 이유일 것 같다. 11표만이 정치지도자 선출의 도덕적으로 정당한 방법이며 다른 방법을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죄악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 위에서는 중국 자체의 문화와 역사에서 다른 정치이념을 추출해 볼 필요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중국의 정치체제에서 어떤 좋은 것도 나올 수가 없다는 독단적 믿음이다. 소련이나 북한과 본질적으로 같은 사악한 공산정권이므로 빨리 무너질수록 좋다는 믿음이다. 이런 관점에 대해 책 안에 써놓은 것을 넘어 따로 응대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열린 마음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서는 더 설명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최근 중국의 정치적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몇 가지 중요한 비판점에 응대하고자 한다.

 

 

민주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내 책을 민주주의 비판으로 받아들인 독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스타인 링겐은 이 책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에게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설득하려는책이라고 주장했다. 내 의도는 민주주의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 고약한 책이다. 벨은 중국 체제의 신봉자로서 내 편이 잘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내 적이 망해야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내 의도는 민주주의 자체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나는 선거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나라에서 선거민주주의가 지켜질 것을 강력히 원한다. 민주주의가 능력주의 제도 중 훌륭한 것으로 보완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보완도 선거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이뤄지기 바란다. 다른 대안이란 것이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포퓰리즘 같은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투표권을 한 번 쥐면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체제를 바꾸는 길은 폭력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바꾼 결과는 선거민주주의보다 못하기 마련이다. 타일란드나 이집트를 보라. (이집트에서 소수의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군사독재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슬람형제단 정권을 뒤엎었을 때 얼마나 낙담했던지!) 그러므로 어떤 나라든 11표 원리를 체제화하고 나면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폭력을 통하지 않고는) 바꿀 길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선거민주주의체제도 능력주의 제도 중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도입할 수 있고, 도입해야 한다. 유능한 직업관료층의 육성이나 각 분야에서 전문가의 권한 강화 등이 그런 예다.

내가 첫 장에서 민주주의체제의 전형적 문제 네 가지를 논한 까닭이 무엇이었나? 내 목적은 널리 인정되는 좋은 정치의 기준으로 볼 때 선거민주주의가 능력주의 정치제도보다 무조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11표 이념을 신성시하는 믿음을 해제하는 데 있었다. 그래야 중국의 정치체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내 노력에 독자들을 동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면 거의 종교적 신앙 대상이 되어 있는 정치적 가치를 상대화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서방세계의 정치문화 속에서 자라난 내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뒤집어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십여 년에 걸친 도덕관의 충격이 필요했다. 이 책의 한 장을 읽어보고 그런 관점의 전환을 일으키기 바란 것이 너무 비현실적인 희망은 아니었을까? 1장이 독자들의 마음을 열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닫아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어떤 나라에는 적합하고 중국 같은 나라에는 적합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인도 같은 야만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J S 밀을 연상시키는 오리엔털리즘에서는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중국인의 소질이 너무 낮아 선거민주주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 주장은 그와 다른 것이다. 1장에서 나는 확실한 경험적 증거에 입각해서 미국 같은 나라에도 유권자의 소질 문제가 있음을 밝힌 다음 중국인이라 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공공성 의식이 높기를 기대할 이유가 없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우수한 지적-사회적-도덕적 특성을 갖춘 정치지도자들을 뽑아 등용하는 능력주의 체제가 (매우 불완전한 형태지만) 개발되고 운영되어 왔으니, 이 체제를 발전시키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개선해서 그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길을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중국처럼 능력주의 이념이 긴 역사를 가진 곳, 지난 30년간 정치개혁의 지표로 작용해 온 곳,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에서 인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에서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북토크에 나서면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선거민주주의가 타이완에서는 잘 작동되는데, 본토라 해서 다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대답은 정치적 맥락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타이완은 여유가 있는 편의 조그만 사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본토 중국의 거대한 문제들(환경 파괴, 빈부 격차, 거대 인구의 절대빈곤 등)에 비하면 두드러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설령 타이완 정치가 마비 상태에 빠지더라도, 세상이 무너질 일은 아니다. 반면 본토 중국의 정치에 문제가 생기면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크기가 문제가 된다. 조그만 정치공동체가 포퓰리즘과 근시안적 정치로 장기적 계획이나 미래 세대와 외부 세계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중국처럼 거대한 정치공동체의 정책은 현재와 미래 중국의 십여 억 인민의 생활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 본토 중국에서는 타이완식 선거민주주의의 약점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능력주의 정치제도의 개선 노력에서 민주주의사회의 특성 중 도입에서 제외할 것이 많지 않다. 11표의 원칙은 빼더라도 언론의 자유나 법치주의는 그대로 들여올 수 있고, 결사의 자유 중 최상층 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당의 결성 정도가 문제될 것이다. 주민(국민)투표나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같은 진보적 과제들도 포함될 수 있다. 중국의 현대화가 계속된다면 이런 민주적 가치나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나는 밝히고자 노력했다.

 

 

내가 현실옹호론자라고?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언급하는, 고전의 반열에 내 책이 들었다고 축하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과연 그런지 나는 모르겠다. 한 번 자리 잡은 오해를 털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비난이 내가 중국 정부의 변호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하나의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지, 특정한 정치 현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딱지를 붙인다면 나는 정치이론가이고 내 방법은 상황정치론이다. 사회의 공적 문화를 주도하는 정치적 이념을 합리적인 방어가 가능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베이징에서 살며 일한 지 십년이 넘기 때문에 이 방법이 자연히 현재 중국의 중심적 정치논쟁에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서방국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이 책을 쓸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이고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베이징의 연구자와 정치개혁가들은 정치지도자에게 필요한 특성이 무엇인가, 그런 특성을 가진 인재를 잘 골라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논쟁을 벌인다. 능력주의 원리에 따라 선출된 지도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민주주의와 능력주의를 어떻게 하면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논쟁도 벌인다. 서방의 정치계나 학계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주제들인데, 중국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내 책의 목적은 그런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중국에서 관리, 개혁가, 지식인에서 일반인까지 널리 지지받는 정치적 이념은 이 책에서 내가 말한 민주적 능력주의의 수직 모형이다. 하층부는 민주주의 원리를, 그리고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능력주의 원리를 더 많이 따르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 과격한 포퓰리즘과 자의적 독재의 끔찍한 경험을 통해 중국에는 능력주의 원리에 따른 최고지도부 구성을 반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중국 지도자들은 시험에 의한 지도층의 선발과 고과考課에 의한 승진 등 능력주의 전통의 여러 요소들을 별 논란 없이 재현할 수 있었다.

수직형 민주적 능력주의 이념은 지난 30년간 정치개혁의 지침으로 작용해 왔지만 이념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도 큰 간극이 남아있다. 따라서 내 책에는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측면이 들어있다. 정치적 현실옹호가 아니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 지지받는 이념을 개혁의 기준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이기는 하다. 중국의 역사와도, 근년의 정치개혁 방향과도, 그리고 지금 중국인들의 생각과도 어울리지 않는, 해외에서 수입된 이념에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상황정치론은 서방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이 널리 활용하는 방법이다. 널리 통용되는 민주주의 이념에 해석을 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정치현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이 비민주적 사회, 즉 지도자를 인민이 선택하지 않는 사회를 대상으로는 거의 쓰이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활동 중인 정치이론가 중에서 그런 방향으로 책 한 권도 나온 것이 없다.

이론가들이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다루기 꺼리는 이유는 말할 나위 없이 20세기의 경험에 있다. 나치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서방 지식인 가운데 이들 정치체제를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모두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린 것은 마땅한 일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옹호하고자 하는 정치체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현실과 관계없는 이론적 구조물로 그 정치체제를 포장하려 든 것일 뿐이었다.

내 책에 대한 비평 중에는 이 책 또한 이러한, 비도덕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방향을 잘못 잡은 정치사상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들 비평가들이 내 선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평 대상인 사회로부터 격리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북한처럼) 불투명하고 의문에 싸여 있는 사회에 자기 이념을 투영한 것이다. 무엇보다 큰 그들의 잘못은 폐쇄된 사회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안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중국은 다른 종류의 연구 대상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이고, 그곳에 검열이 있고 시민권의 제약이 있고 정치적 투명성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치체제와 기본 가치가 뭔지 제대로 알아보기에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 누구든 중국어를 알고, 중국 안팎을 여행하고, 여러 종류 사람들을 (각급 관리들을 포함하여) 만나고, 중문과 영문 자료를 찾아 읽고, 여러 성향의 웹사이트를 섭렵하는 사람이라면 중국사회의 지배적 정치이념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그려볼 수 있다. 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각자 마음대로지만, 수천만 명을 학살한 독재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폐쇄된 정치체제를 실상도 모르는 채로 옹호하던 예전 사람들과 내 작업을 비교하는 짓은 마음대로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방법이 중요한 까닭은 어떤 이념을 기준으로 정치현실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중국의 정치적 진보와 퇴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정치 전통 내의 이념들을 활용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J S 밀로 시작해 헤겔과 마르크스까지 참여한 서방 정치사상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관점이다. 그런데 그 사상가들이 명성을 떨친 때가 바로 서양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중국은 식민지가 아니다. 자부심을 갖고 힘을 키워가는 나라이며, 풍부하고 다양한 정치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그리고 그 지도자, 개혁가, 지식인과 일반인들이 날이 갈수록 자기네 전통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중국의 정치 현실을 중국 자체의 전통과 아무 관계없는 이념으로 재단하려 드는 서방 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학자들이 서양세계에 현존하는 민주주의를 유교적 이념으로 재단하려 들면 반감을 일으킬 것과 마찬가지다.

서방 민주주의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중국 정치문화의 중요한 이념들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라도) 공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장애를 겪을 것이다. 물론 말보다 실천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떠오르고 있는 중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유토피아 홍보물이라고?

 

반대 방향에서 쏟아지는 비판도 있다. 내가 중국의 정치현실과 너무 가까워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멀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앤드루 네이선은 내 책이 픽션이라는 주장을 담은 세 차례 리뷰를 내놓았다. 12년간 베이징에서 살며 일해 왔고, 많은 지식인과 관리들을 만나 왔고, 중국 최고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에서 가르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책은 중국의 진정한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기층부의 선거민주주의나 중간층의 실험공간에 대한 내 설명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그 영역의 현실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상층부 정치권의 능력주의 이념에 대한 내 긍정적 관점이 그에게는 문제되는 것이다.

시험제도를 통해 지도자를 선발하고 수십 년에 걸친 고과제도를 통해 승진시키는 능력주의 제도가 정기적인 선거의 경쟁을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제도보다 우월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쉽게 인정된다. 하급 단계에서 뛰어난 실적을 거둔 사람들이 상급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든가, 능력에 의거해 선발된 지도자에게는 시행착오의 위험이 적다든가, 다음 선거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미래 세대의 복리를 위주로 장기 정책을 세울 수 있다든가, 권력 상층부의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몇 년, 몇 십 년을 기다려야 성과를 볼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든가, 선거자금 모금을 위해 똑같은 연설을 돌아다니며 되풀이할 시간을 아껴 진짜 정책의 구상과 실행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든가 하는 장점들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정치 현실은 능력주의 이념과 관계가 없거나 아주 멀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있다이런 냉소적 태도는 중국공산당의 절대적 과제가 완벽한 권력 통제에만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에 대해 마오쩌둥 시대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고 모든 독재체제와 비슷한 성격이라고밖에 말할 것이 없다면 중국 정치사의 중요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자기네 몰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확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다른 비민주적 정치체제들과 분명한 차별점이며, 지난 30년간 거둬 온 성공의 열쇠이기도 하다.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존재 여부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복잡성을 띤 질문임에 틀림없다. 능력주의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선발해서 권력을 맡긴다는 이념인데, “뛰어난 능력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는 맥락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제2장에서 밝혔다. 비교적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현대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능력주의 정치체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거대한 나라에서 관리들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능력이 어떤 것인지 밝히는 데 나는 주력하고, 그 결과를 중국의 경우에 적용시켜 본다.

내 주장인즉 정치체제가 뛰어난 지성과 사교능력, 그리고 덕성을 갖춘 인물을 선발, 등용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이는 장치를 나는 제안한다. 그러나 능력주의 정치제도를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적 선거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처럼 빈곤하고 혼란스러운 지역에서도 시행될 수 있는(결과야 어떻든) 것과 달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선발하고 등용하는 목적의 공정하고 안정성 있는 체제가 자리 잡는 데는 적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지난 30년간 능력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을 어떤 근거 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념과 현실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남아 있다. 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권력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파벌과 연줄이 작용한다. 관리 선발과 임용의 기준을 세우는 조직국의 업무는 몇 해 전보다는 조금 더 개방되어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이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체제가 마오쩌둥 시대보다 능력주의 쪽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지도자의 선발과 등용에서 교육과 시험의 역할은 꾸준히 늘어나 왔다. 내 책에는 하급 직위에서의 우수한 실적을 발판으로 승진된 예가 많다는 경험적 근거가 실려 있는데, 실적의 내용은 대개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평가된 것이다. 이런 연구의 대략적 결론은 경력 중 어느 단계에서든 경제성장정책의 성공이 출세의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지만,(내놓을 만한 경제 실적 없이 고위직에 이른 관리는 거의 없다.) 정부 최고위층에 이르면 파벌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런 현상을 좋게 말한다면, 중국의 고위 지도자 대부분은 경제에 관한 높은 수준의 이해력과 집행력을 갖고 있으며,(북한 같은 나라들은 차치하고 선거민주주의체제 국가 지도자들과 비교해도) 특히 최고위층에 들기 위해서는 정책 집행에 도움이 될 만한 수준 높은 사교능력도 필요하다.

수억 인구를 빈곤으로부터 건져내는 데 통치자들의 공로를 회의적으로 보는 비판자들도 있다. 정부가 아니라 인민의 노고를 통해 이뤄진 일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활동은 정책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중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능력주의 정치제도와 빈곤 퇴치의 기적 사이의 연관성을 나는 이렇게 지적한다. 관리들은 기층에서 중간층까지 직위에서 실적을 근거로 승진된다. 실적은 대개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경제성장은 빈곤 퇴치의 열쇠다. 그러므로 관리 승진의 평가제도가 빈곤 퇴치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위계질서 하의 실험과 토지개혁을 실행한 관리들의 선발과 등용에도 경제 관련 능력이 적어도 부분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경제 관련 능력이 관리들의 출세 전망을 좌우하는 상당히 큰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누가 올라가는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옳다. 링겐은 하급 관리를 승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치안 확보의 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치안 능력이 문제 되는 것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에서다. 담당 구역에서 소요와 불안이 나타날 경우 승진에서 제외되기 쉽다는 말이다. “당에 대한 충성도 마찬가지다. 당에 대한 배신이 드러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치안 능력이나 당에 대한 충성은 승진의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없다.

대규모의 빈곤 퇴치가 다른 정치체제 아래서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 입증 책임이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한국과 타이완이 민주주의체제 아래 고소득 국가가 되었다는 링겐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을 벗어난 사람의 숫자를 놓고 본다면 중국과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타이완의 경제성장은 대부분 별로 민주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고, 본격적인 민주화 이후에는 성장이 둔화되었다.

정치에 있어서 우수성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비평들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는 우수한 특성을 가진 지도자를 뽑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이 다 말이 안 되는 짓이다. 네이선은 이렇게 주장했다. “벨의 능력주의 이론에서 제일 큰 문제는 좋은 결정을 내릴 우수한 지도자를 확보한다는 생각이 결정 중에 옳은 결정이 있고 틀린 결정이 있다는 관념을 발판으로 한다는 점이다.”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결정이 있을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결정 중에는 좋은 결정이 있고 덜 좋은 결정이 있는 것 아닌가. 기후 변화를 방치한다든지, 멋대로 전쟁을 건다든지 하는 끔찍한 결정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지난 30년간 빈곤 퇴치에 역량을 집중하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만큼 양식 있는 지도자들이 중국에서 선발되어 정치를 맡아 온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중국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변화를 겪어 나갈지 몰라도, 정치제도의 개선이 지금까지의 능력주의 제도를 폐기하는 방향이 아니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는 분명하다.

능력주의 원리에 따라 선발된 지도자들의 권력에 제약의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나는 제3장에서 밝혔다. 제대로 된 정치체제라면 지도자가 좋은 일을 하도록 권한을 부여함과 동시에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 그런데 두 가지 요건 사이의 균형점을 놓고는 타당성을 가진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정치문화의 차이나 중국인들이 국가적 상황이라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중국인들은 권한 부여 쪽에, 미국인들은 제한 쪽에 대개 무게를 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세계에서 예상하기 힘든 금융위기나 환경 재앙에 대비해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부의 대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권한 부여 쪽으로 앞으로 더 기울어져 갈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이 보이기 시작한 노쇠현상으로 인해 앞으로 국가 운영이 어려워질 우려가 있다.

 

 

차이나 모델이 끝났다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유능하고 열성적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무한질주의 경제열차처럼 보였고, 세계무대에서 미국에 도전하는 위치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그런데 지금은 중국경제가 내부붕괴를 일으켜 전 세계가 거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떠돌고 있다.

중국 비관론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려에는 과장된 감이 있다. 경제적 성공이 중국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최근의 경제 난관이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많은 서방 분석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 성적의 하락으로 인해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잃고 정치체제가 위기에 빠지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는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다. 주식시장의 거품을 키운 것이 가장 뚜렷한 사례다. 관영언론의 부채질 아래 개인투자자들이 상하이 주식시장에 몰려들어 주가 기록을 거듭거듭 갱신시켰다. 2015421일까지 주가가 연초보다 80%나 상승해 있는데도 온라인 판 <인민일보>에는 독자들에게 저축한 돈을 주식시장에 가져가라고 부추기는 기사가 실리고 있었다. “국가의 개발전략과 경제개혁의 확고한 뒷받침으로 주식의 수익성이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거품이 터진 것은 2015612일이었다. 78일까지 상하이 시장의 총가치가 30% 줄어들었고, 727일에 8.5% 더 떨어졌다. 이에 대한 정부의 행정적-사법적 대응은 외부 관찰자들에게 갈피가 없고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자원의 분배의 결정적역할을 시장에 맡겼다고 하는 정부의 공식 해명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제적 능력에 의거하여 발탁된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었을까? 어차피 주식가격을 낮추는 쪽으로 작용했을 국유기업 개혁이나 IPO 개혁처럼 어려운 개혁을 쉽게 하기 위해 시장을 이용한 것으로 보는 정도가 너그러운 시각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불장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거품이 터졌을 때, 대응은 차치하고 책임이 정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여부에 있다. 아무리 유능한 정부라도(또는 개인이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고, 중국의 정치체제에는 완미하지 못한 구석들이 있다. 중국 정부가 시장개혁을 더 일관성 있는 방법으로 추진하는 정책으로 바꿀 수도 있다. 실패에 책임 있는 관리들을 더 투명하고 공개적인 방법으로 밝혀낼 수도 있다. 정부의 아래 층위에서 실험을 진행해 거기서 가려낸 결과가 좋은 정책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상황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잘 대응하는 관리들을 우대, 등용하는 쪽으로 인센티브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 정책결정 전의 토론과 심의 장치를 키우고 늘릴 수도 있다. 이런 조치는 정치체제를 크게 손보지 않고도 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정권의 정당성을 판별할 진짜 시금석은 경제 운용에 실패할 때가 있느냐 여부가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을 능력이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중국인 중 주식 투자자의 비율이 아주 작기 때문에 주식시장의 실수가 중국공산당 지배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훨씬 더 심각한 경제 실패라도 정권의 근거를 흔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0019-11 테러 후 싱가포르 경제 붕괴 때 정권의 지지율이 (전에는 경제 상황에 연계되어 움직이는 지수였는데) 오히려 더 높아진 일이 있다. 경제 붕괴가 정부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정부 지도부를 여전히 유능한 경제 관리자로 보는 시각 덕분이었다. 사실 경제 상황이 나쁠 때는 모험적 정치개혁의 욕구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만약 중국의 경제 불황이 길어진다면, 그리고 중국 인민이 불황의 책임을 정부에 묻게 되고 상황 개선의 능력에도 불신을 갖게 된다면, 그러면 차이나 모델은 진짜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10%대 고성장 시대는 지나갔지만 중국이 부유해지고 서비스업 비중이 높은 경제체제로 옮겨감에 따라 그보다 낮은 성장률의 시기에 접어들 것이 예상된다.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이미 세계 최대 규모인 중국경제로는 넉넉잡아 5-6% 성장률만 하더라도 고속성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의 경제 실적이 35년간 우수했기 때문에 쉽게 비관적 전망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 인민이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은 생활수준 향상, 취업 기회의 확대,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이다. 이 조건들을 더 잘 충족시킬 다른 정치체제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더 심각한 위협은 그 정당성의 근거로 경제성장이 누리던 힘이 약해지는 현상이다. 지난 30년간 정부의 첫 번째 임무가 높은 성장률을 이루는 데 있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계속되어 온 것은 경제성장이 바로 빈곤 퇴치의 열쇠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리의 승진이 다른 무엇보다 경제 실적을 기준으로 한다는 데 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훨씬 다양해졌고, 그중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관점의 전환에 말미암은 것도 있다. 부패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오염, 빈부격차, 복지정책의 부실, 정부부채의 폭발적 증가 등 문제들이 있다. 앞으로는 경제성장률이 어떠하든 이 문제들을 다 잘 처리하지 못하면 정부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 것이다.

이러면 관리의 선발과 등용에 능력주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정치체제가 복잡한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능력? 사회복지를 개선하는 능력? 부패를 줄이는 능력? 환경을 보호하는 능력? 빈부격차를 좁히는 능력? 정부부채를 줄이는 능력? 도대체 어떤 능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단 말인가? 여러 능력을 종합한다면 그 배합 비율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 논란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정부가 인민으로부터 힘을 얻을 필요가 있게 된다. 최선의 결정을 찾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정책에 불만을 품는 각종 집단의 비판으로부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인민의 힘이 필요하다.

요컨대 차이나 모델이 살아남는 길은 정부가 체제를 개방해서 기층부의 참여와 숙의 통로를 확충하는 것뿐이다. 숙의를 위한 얼마간의 장치는 그 정치체제 안에 이미 갖춰져 있다. 예를 들어 재산법이 전인대全人代를 통과하는 데 걸린 9년 동안 전문가 의견 청취와 공개토론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더 넓은 영역에서 비전문가들을 토론에 참여시키고 발언권을 키워줄 필요가 있다. 정책결정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감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런 개방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확대할 필요가 있고 당 내외에 토론과 숙의를 위한 장치를 늘릴 필요가 있으며, 실적이 나쁜 관리들을 도태시키는 투명한 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기층부의 선거민주주의가 개선되고 시급市級까지 확대되고 당 안에서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공개청문회, 공론조사, 주요 의제에 대한 주민투표 등 현대 민주사회의 여러 개선책을 도입하는 것도 정치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기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치의 원칙을 더욱 굳건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이런 방향의 변화가 많은 서방 분석가들의 견해처럼 11표의 원칙이 최고지도부 선출에도 적용되는 목표를 향해 필연적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완전한 선거민주주의의 시행이 중국을 과거의 혼란과 대외적 굴욕으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걱정은 중국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다수 일반인이 가진 것이다. 아무리 바람직한 민주화의 길을 걷더라도 최고지도부까지 일반선거에 맡길 경우 현행 정치체제의 장점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현행 정치체제의 확실한 장점은 지도자들이 수십 년 단련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숙성의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정책 결정에 장기적 관점을 취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밝힌 2030년까지의 기후변화 대응책을 보라. 중국 정부니까 이 정책을 지킬 것을 믿을 수 있지, 미국 정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집권당이 바뀌면 전임 정권과의 차별성을 내세우기 위해 일부러라도 정책을 바꾸는 일이 많지 않은가. 최고지도부의 안정성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 모르는 기층부의 체제개혁 실험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중국이 완전한 선거민주주의를 도입할 경우, 공산당의 집권이 계속될 수도 있지만 국가 운영 경험이 적은 선동가가 권력을 쥘 수도 있다. 부유층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에 전쟁을 걸고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몽땅 취소하자는 공산당 판 도널드 트럼프가 어느 날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치가들도 다음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정책결정 과정에서 재선에 도움이 될 단기적 효과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정책 관련 능력의 연마보다 선거자금 모금을 위해 똑같은 연설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써야 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최고지도부 선출을 제외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도입하면서 기존 정치체제의 능력주의 측면을 보강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금의 추세로는 전망이 밝지 않다. 지난 2년간 정부는 검열을 늘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차이나 모델의 전망이 괜찮다면 억압적 통치방법에 의존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의 필요성은 시진핑 주석의 부패추방 운동에 있다. 중국근대사상 가장 길고 가장 치밀한 부패추방 운동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 부패, 즉 사적 이익을 위한 공권력의 남용이 치명적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성과 공공심이 지도자 자격의 중요한 일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부패한 관리를 선거로 퇴출시킬 수 있는데, 능력주의 체제에는 그런 안전판이 없다. 중국의 전체적 부패 수준은 지난 30년간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근년의 소셜미디어 발달과 과시적 소비의 증가에 따라 더욱더 눈에 드러나는 현상이 되고 있다. 이것을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한 시 주석이 부패추방을 정권의 최우선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운동에 부작용이나 편향성도 다소 있는지 모르지만, 체제 정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런데 운동의 주도세력이 당 내에 공포감을 불어넣음으로써(빠른 효과를 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적대자들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지도부가 평소보다 더 심한 불안감을 가지고 인권 억압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부패축소를 위한 장기적 대책으로 독립적 감찰기구 설립,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분리, 공무원 급여수준의 향상, 유교 윤리에 입각한 공무원 교육 등이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어서 효과를 보려면 몇 년, 심지어 몇 십 년이라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억압적 정책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이웃나라들의 상황을 참고한 데 있다. 중국과 비슷한 경제개발 정책을 수행한 한국과 타이완에서 선거민주주의의 득세가 뒤따랐고, 최근 홍콩의 민주화운동 때문에 그 물결이 중국에도 닥칠 전망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본토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커녕 논의에조차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지나친 걱정이다. 우선, 동아시아의 작은 정치공동체들은 민주화를 향한 강력한 이념적 압력을 미국으로부터 받아 왔다. 더 중요한 점은 능력주의 이념이 중국에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조사에서나 대다수 사람들은 일반인이 정치에 참여하고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가 절차상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원리보다 유능한 지도자들에게 공공선 실현의 책임을 맡기는 후견인 원리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육이 바뀌면 그런 추세도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 최고의 명문학교 중 하나인 칭화대의 내 제자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민주주의 원리와 능력주의 원리의 득실을 두루 따져본 학생의 대부분은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쪽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론의 자유, 정치의 투명성, 법치주의 등 서양식가치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고, 그 요구는 근대화의 진전에 따라 더욱 커지고 있다. 조심스럽게 구축해 온 능력주의 체제를 무너트릴 위험이 있는 방식의 선거민주주의 도입을 배제하면서 정권의 개방성을 늘릴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방안은 국민투표를 통해 온건한 개혁방법에 대한 인민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확대하지만 최고지도부에 대한 선거나 1당체제에 도전할 정당 결성을 배제하는 개혁방법이다. 인민의 동의를 받아낸다면 정권의 정당성이 강화되는 데 따라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을 걱정할 필요 없이 개방성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비관적인 전망도 가능하다. 경찰과 군대를 발판으로 한 포퓰리스트 독재자가 나타난다면 어찌할 것인가. 톈안먼 방식의 억압으로 비판을 잠재우면서 외부를 향한 군사도발로 지지를 확보하려 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중국의 역사를 보면 가혹한 법가식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적 효과를 기준으로 보면 선택의 방향은 분명하다. 중국이 능력주의 원리를 지키면서 정치체제를 개방할 수 있다면 그 가버넌스 모델은 다시 생명력을 충전할 수 있다. 그 모델의 성공에는 외부세계의 반대가 아닌 협조가 하나의 중요한 조건일 것이다.

 

 

1천하, 2체제를 바라보며

 

내가 희망하는 정치의 세계는 이런 모습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부의 모든 층위 지도자를 선거로 뽑고,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최고 층위 지도자들을 고시로 임용해 수십 년에 걸친 훈련을 통해 키워낸다. 양쪽 체제 모두 자기네 약점을 인정하면서 정부의 할 일을 잘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정부의 할 일이란 당연히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인데, 그 인민은 그 정부의 정책에 영향 받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능력주의의 좋은 점을 배움으로써 민주주의체제를 향상시키고 능력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배합함으로써 능력주의체제를 발전시킨다.

어느 쪽 체제가 우월하다는 주장은 의미를 잃는다. 양쪽 체제는 서로 다른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으면서 상대방 체제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한다. 서방을 이끄는 미국과 동방을 대표하는 미국은 이해관계가 겹치는 영역에서 협력을 위해 노력한다. 가치의 다양성이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각자의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정치체제의 다양성은 세상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희망사항에 그칠 것을 나는 걱정한다. 민주주의체제의 장기적 전망을 나는 걱정스럽게 내다본다. 문화, 역사, 조건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채용할 수 있다고 하는 정치적 다원주의가 중국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학습의 문화를 가진 중국사회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좋은 것을 배워오려는 자세를 지킨다. 지금처럼 경제가 침체되고 억압이 강화되는 암울한 시기에도 시찰을 위해 공무원들을 해외로 파견하고 정부보고서 작성에 외국인의 참여를 환영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반면 민주주의국가들은 자만심에 빠져 장래를 대비하는 자세를 잘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인 정치 변화의 필요가 일어나더라도 내부에서만 해결책을 찾는 감정적이고 편협한 반응만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만약 중국식 능력주의 정치제도가 개선과 개혁을 계속하는 동안 민주주의사회들이 끝끝내 자만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결국 인민의 마음을 잃고 능력주의가 전 세계 정치체제의 지배적 원리가 될 것이다.

시민들이 지도자를 선택할 자기네 권리를 제한하는 데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능력주의 정치체제가 인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민주주의체제보다 나은 실적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혹시 지금부터 1백년 후라면, 정치지도자를 시험으로 뽑은 다음 하위직에서의 실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시키는 원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사람들은 도대체 사회를 이끌 지도자를 11표의 원칙에 따라 뽑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옛사람들이 어떻게 하게 되었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