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부터 동아시아 한자문명권 식자들에게 서세(西勢)의 동점(東漸)이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19세기 들어서면서부터 베트남 등 서남방의 정세 변화가 조공체제를 교란하기 시작했고, 영국, 네덜란드 등의 교역 확장 요구와 함께 아편 밀수입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변화를 억누르려는 청나라의 노력은 아편전쟁(1차 중영전쟁, 1840-42)으로 좌절되고, 2차 중영전쟁(1856-1860)으로 수도 베이징까지 유린당하면서 서양 열강에 대한 중국의 약세가 완전히 확인되었다.

중국인에 비해 자만심이 덜했던 일본인들은 17세기 초에 시작된 네덜란드동인도회사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란가쿠(蘭學)를 통해 서양 사정을 얼마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1852년 페리 제독의 미국 함대가 닥쳤을 때 큰 저항 없이 개항에 동의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서양과의 접촉이 늘어나고 세계정세 변화를 파악함에 따라 1868년 메이지유신 때까지는 서양 열강의 뒤를 따르는 근대화 노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조선인은 1866년에 이르러서야 서양인과의 직접 충돌, 즉 양요(洋擾)를 겪기 시작했다. 그러나 1790년대부터 서학(西學) 문제가 나타나 있고, 특히 1801년 서학도들이 서양 세력의 개입을 청원한 황사영백서 사건을 계기로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제1, 2차 중영전쟁의 충격은 조선에서도 느껴졌다. 한편 서양 열강은 조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도 가벼운 탐색 정도에 그쳤지만, 서양의 문물과 세계관을 도입한 일본은 집요한 노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에 이른다.(1876)

19세기 후반기가 지나가는 동안 동아시아 지역을 향한 서세의 동점은 계속되었다. 서양인의 활동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인 자신이 서양 문물을 점차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가 일어났다. 도입하는 문물의 내용도 처음에는 군사-경제적 가치를 가진 이기(利器)의 선별적 수입으로 시작했으나,(이 단계에서 중국에서는 中體西用”, 일본에서는 和魂洋才의 구호가 유행했다.) 제도와 사상까지 들여오는 서양화의 단계로 나아갔다. 일본에서는 脫亞入歐의 표현까지 나타났다.

서세동점의 흐름을 재촉한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서양 군사력의 우위였다. 19세기 내내 동아시아 군대가 소수의 서양 병력에게 격파당하는 일이 거듭거듭 일어났다. 천하의 주인으로 자만심을 가진 중국의 청 왕조도 제2차 중영전쟁을 겪은 뒤에는 서양에게 배우는 양무(洋務)’ 노선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894년 전쟁에서 더 철저한 서양화의 길을 걸은 일본의 승리는 서양화의 절대적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일본은 중국을 굴복시킨 10년 후, 시베리아를 거쳐 극동에 진출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백인종 국가에 대한 황인종 국가의 첫 승전에 동양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며 환호한 동아시아 식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승자는 동아시아국가가 아니라 일본에 내면화된 서양 제국주의였다. 러일전쟁은 서세동점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진화였다.

 

아편전쟁으로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중국이 겪은 굴욕의 세기를 조선도 함께 겪었다. 그 동안 조선인이 흘린 피는 중국인보다 훨씬 적었지만 사회의 파괴는 그에 못지않았다.

중국인의 희생이 컸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이 19세기 제국주의의 최대 표적이기 때문이었다. 19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도 중국의 경제규모는 유럽 전체와 맞먹는 수준이었고, 유럽의 중산층 형성과 생활수준 향상에 따라 우수한 중국 상품의 수요가 끝없이 커지고 있었다. 유럽 열강들은 중국과의 교역 확대를 오랫동안 추구해 왔는데, 19세기 중엽 대포와 함선의 발달로 대규모 원정전쟁이 가능하게 되자 무력으로 중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처음에는 개방을 강요하는 수준으로 영국 혼자 시작했지만,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다른 나라들이 뒤이어 진출하면서 경쟁이 격화되자 차츰 쪼개먹기[爪分]의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1894-95년 청일전쟁의 패배에 이어 1900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가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진 반면 일본은 군국화의 길에 박차를 가하며 영국의 후원을 받아 1904-05년 러시아를 물리쳤다. 조선과 접경한 두 나라를 물리친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중국은 격심한 혼란 속에 있었고, 조선은 철저한 탄압 아래 있었다. 그 동안 일본은 제국주의 최전선에 나섰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세동점 현상은 내면화단계로 접어들었다. 동아시아국가들 안에 서세의 성격을 가진 움직임이 커지고, 그에 따라 국가의 성격이 바뀌어간 것이다.

서세 내면화의 길을 앞서서 걸은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국가를 먼저 근대화하고, 근대국가의 제도를 통해 사회의 모든 부문에 서양화의 길을 열었다. 그 결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일본은 성공한 나라로 보였고, 이웃의 실패한 나라 애국자들은 일본을 본받기를 열망했다.

일본은 이 열망에 대동아(大東亞)의 꿈으로 화답했다. 제국주의 열강에게는 시장 확대를 위한 배후지로서 식민지가 필요한 것인데, 일본의 성공을 찬양하는 지역 분위기가 지리적 인접성과 함께 일본제국의 팽창을 위한 호조건이 되었다. 조선 병탄과 만주국 설립까지 이 분위기가 일본의 군국주의적 발전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본격적 중국 침략을 시작하면서 영국 등 주류 열강과 이해관계가 어긋남에 따라 파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질서는 여러 제국이 복잡하게 어울리던 제국주의체제에서 두 진영이 평면적으로 대립하는 냉전체제로 옮겨갔다. 동아시아 지역은 냉전체제의 변경이 되었다. 핵위협의 교착상태를 발판으로 한 냉전체제 하에서 패권국가는 진영 결속을 위해 제한된 규모의 재래식 전쟁을 때때로 필요로 했고, 동아시아의 변경이 그 무대를 제공했다.

서세동점 상황은 20세기 후반에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진영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근대유럽의 사상이었다. 인간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측면도 가졌지만, 근대유럽의 문화적 특성에 묶인 측면도 가진 이데올로기였다. 무엇보다, 원자론에 입각한 개인주의 세계관을 양쪽 이데올로기가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에 중심을 둔 체제 대립의 부담이 동양에 전가되었다는 점에서 서세동점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 냉전체제 하의 동아시아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사회의 서세 내면화가 깊어짐에 따라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배척의 대상이 되었던 지역문명의 전통이 은연중에 되살아난 것이다.

자본진영 여러 국가에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 양상이 나타났다. 이 말은 메이지시대 일본의 파격적인 근대화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인데, 서양의 자본집약적 발전방식과 대비되는 노동집약적 발전방식을 뜻한다. 1980-90년대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이 지역 신흥산업국(NICs)의 발전에 이 양상으로 이해할 측면이 있다.

한편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1980년대부터 사회주의의 새로운 의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1820년대 유럽에서 사회주의란 말이 나타난 것은 개인주의와 대비되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후 원자론적 세계관이 유럽을 휩쓴 결과 1848년의 공산당선언에서는 원래의 사회주의가 공상적사회주의로 규정되고 공산주의에 이르는 경로로서 과학적사회주의가 제창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도 공산당선언의 사회주의 규정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수십 년의 실행을 통해 동아시아 문명전통과도 부합하는 유기론적 조직원리로서 사회주의를 떠올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체제 해소를 계기로 자본주의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가 드러나는 한편 150년간의 서세동점 기간 동안 동아시아 사회가 키워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세계가 겪어온 변화 중에는 서세동점의 흐름에 말미암은 측면이 컸고, 앞으로의 변화는 그 흐름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그 흐름을 되짚어보려 한다.

 

 

유럽의 등장

 

농업문명 발생 이후 유라시아 대륙 중위도지대가 문명 발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기술 수준이 유치한 단계에 있던 초기 농업에는 자연 식생이 너무 왕성한 아열대 지역도, 태양광이 적은 고위도 지역도 적합하지 않았다. 중위도의 온대 지역을 따라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지형 조건이 적합한 곳에 여러 초기 문명이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문명 간 접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대륙 안에서는 자연의 절대적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교류가 이뤄졌다. 중요한 기술 발전은 얼마간 시차를 두고라도 대륙 전체에 퍼지게 되어 있었다. 문명 발전에 따라 접촉이 늘어나고 기술 전파의 속도도 빨라지게 된다. 역사학계에서 통상 '중세'라 부르는 시대에는 한자권-힌두권-이슬람권-기독교권의 몇 개 문명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같은 문명권 안에서는 지속적 교류가 진행되고 인접한 문명권 사이에는 간헐적 접촉이 이뤄지는 반면 멀리 떨어진 문명권 사이에는 접촉이 거의 없는 상태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문명권 사이의 이 평형 상태가 13세기에 크게 깨어졌다. 이슬람 통치자들이 힌두권의 중심부를 다스리는 델리 술탄국이 자리 잡았고, 몽골인의 정복 사업이 유라시아 대륙의 태반을 휩쓸었다. 한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에서 중세체제를 뛰어넘는 기술 발전이 이뤄진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거대한 정복사업을 통해 문명권 간의 기술 전파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3-14세기의 격동기가 지난 후 한자권과 이슬람권은 명-청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안정된 체제로 돌아갔다. 반면 서쪽 끝의 기독교권은 14-15세기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격감 후 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끝에 산업혁명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빚어진 '근대문명'19세기 이후 세계를 휩쓸게 된 현상을 '서세동점'이라 한다.

이슬람 선진문명 앞에 수백 년간 위축되어 있던 유럽인이 외부로 활동을 넓히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 이후의 '대항해 시대'였다. 항해술을 포함한 유럽인의 기술은 아직까지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 남부와 아메리카대륙의 기술 수준이 낮은 사회들을 정복하면서 확보한 자원을 발판으로 인도양에 진출, 세계를 일주하는 항로를 확보했다.

16세기 중에 세계 일주 항로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유럽인의 힘이 기존의 다른 문명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 문명권의 주변부에 조그마한 거점들을 만들고 그 사이의 항로를 확보하는 '()과 선()'의 해상 제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무기와 항해술의 집중적 개발이 해상 제국을 겨우 뒷받침해 주었을 뿐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무기와 상품의 대량 생산에 따라 기존 문명권과 정면 대결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19세기 중엽 힌두권이 제일 먼저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한자권과 이슬람권의 공략이 계속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에는 전 세계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나 영향권으로 편성된 결과, 열강들 사이의 상호쟁탈전이 벌어지는 제국주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정복자들의 첫 번째 요구: '개항'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은 근대 문명을 일으킨 유럽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고, 또한 기존 문명권 중 가장 강고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통한 부국강병의 효과가 충분히 자라난 뒤에야 한자권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었다. 한자권의 끄트머리로 유럽인의 활동영역에 제일 가까이 있던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에 프랑스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1859년의 일이었다. 그 밖의 한자권 지역에 대해서는 '개항' 요구 수준의 공략이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개항' 요구는 경제적 공략을 위한 것이었다. 유럽인은 대항해 시대 이래 중국과의 무역 역조에 내내 시달려 왔다. 비단, , 도자기 등 중국의 고급 상품에 대한 유럽인의 수요는 경제발전과 함께 꾸준히 자라난 반면 중국인에게는 유럽 상품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신대륙에서 캐낸 막대한 분량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편전쟁은 이 무역 역조를 줄이려는 영국의 노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두 차례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으로 중국의 개항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유럽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며 중국 시장의 모습을 바꿔 나가는 가운데 가장 앞장선 품목은 전함과 대포 등 군사장비였다. 2차 아편전쟁 후 시작된 양무운동은 '군사 현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비슷한 시기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1868년부터) 일본과 중국 사이에 군사력을 중심으로 근대화 경쟁이 벌어졌고, 일본의 청일전쟁(1894-1895) 승리로 '근대화'가 동아시아지역에서 절대적 과제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의 이웃들보다 자발적으로 근대화에 나선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열강 대열의 끄트머리에 합류하고 제국주의 경쟁에 나섰다. 패자인 중국이 받은 충격은 컸다. 청일전쟁 직후의 변법운동에서 시작해 1900년대의 공화제운동과 191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나아가면서, 전통문명을 부정하고 서양 근대문명을 받드는 분위기가 갈수록 심화되었다. 1920년대에 시작된 공산주의운동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엇갈리는 위치에 있던 조선은 이웃 두 나라 사정을 살피며 간접적으로 개화, 즉 근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되지만 능동적 대응에 실패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하기도 했지만 사회경제적 변화는 일본이 이끄는 방향으로 계속 진행되다가, 러일전쟁(1904-1905) 이후에는 일본의 전면적 통제 아래 들어가고 뒤이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럽인이 이룩한 근대 문명의 본질은 산업혁명의 성과를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확장해 나가는 데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확장은 미개발 자원(인력과 물자)의 편입을 필요로 했다. 산업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은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지역의 미개발 자원을 놓고 경쟁을 벌였고, 이 경쟁이 지구 전체로 확대되면서 경쟁의 구조가 입체화되었다. 착취당하는 입장에서 세계 시장에 편입된 일부 지역이 근대 문명을 내재화하면서 2류 열강의 대열을 형성했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이 미국, 러시아와 함께 이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문명은 산업화와 자본주의 체제 외에도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확장과 서세동점 현상의 추동력은 바로 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원리에 있었다. 이 원리가 근대문명의 다른 요소(민주주의와 인권사상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이것을 근대문명의 가장 본질적 요소로 볼 수 있다.

 

 

'근대화'에도 상류가 있고 하류가 있다

 

2류 열강의 대열에도 들지 못한 사회에서는 주변에 있는 2류 열강의 상대적 성공에 대한 선망이 크게 일어났다. 중국과 한국의 많은 지식인이 일본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추세에 겹쳐진 것이 매판세력의 발흥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은 효율적 착취를 위해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의 근대화를 선전하면서 이에 호응하는 매판세력을 착취 대상 사회 안에서 육성했다. 식민지시대 한국의 친일파가 이런 매판세력이었다.

매판세력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사회의 재편도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2류 열강, 즉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 내재화에 비해 낮은 층위의 것이었다. 일본은 선진 열강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면서도 주변의 저개발 사회에 대해서는 착취하는 입장에 섰는데, 한국의 식민지 자본주의는 철저히 착취당하는 입장이었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착취 대상인 하부구조에 들어가 '개발 없는 성장'에 그친 것이다.

일본은 1904년 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후 '문명화'란 이름으로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의 근대화를 한국에 추진했다. 초기에는 종래 조선(대한제국) 정부의 무능과 혼란에 대비되어 환영받는 면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착취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1919년 식민통치에 대한 거족적 저항이 일어났다. 그 후에는 매판세력 육성 정책이 강화되어 재계에서 학계에 이르기까지 친일파 조선인의 역할이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종료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 식민지인의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각지의 저항 운동은 두 개 방향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민족모순에 치중하여 이민족 지배를 벗어나는 데 주력하는 우익 민족주의 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계급모순에 착안하여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좌익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들어섰다. 주변부의 2류 열강으로 20세기를 시작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1류 열강의 자리로 올라섰고,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소련은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좌익 운동을 규합하여 미국의 패권에 40여 년간 맞섰다.

냉전체제를 흔히 양극체제로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단극체제의 성격이었다. 미국의 패권은 산업혁명 이래 근대 세계의 주축이 된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반면, 공산권에서 소련의 패권은 방어적 성격으로서 그 통제력이 동유럽 공산권을 넘어서지 못했다. 소련의 역할은 미국의 '주적'이라기보다 '스파링 파트너'에 가까운 것이었다.

남한은 식민지를 벗어난 직후 미국의 통제를 엄격하게 받는 나라가 되어 반공을 '국시(國是)'처럼 여기며 냉전시대를 지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받든다는 점에서 세계 어느 사회보다 '서세동점'의 논리에 강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다. 1987'민주화'를 성취하고 곧이어 세계적 냉전이 해소되면서 자본주의 논리가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고 강하게 내재화되어 있는지 전보다도 더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산업문명으로의 흐름

 

인류의 역사에 온갖 굴곡이 있거니와, 선사시대에 채집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의 이행을 가져온 농업혁명과 18세기 이후 농업경제로부터 산업경제로의 이행을 가져온 산업혁명, 두 가지가 가장 큰 변화로 꼽힌다. 이 두 차례 변화는 인류의 존재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큰 변화로 꼽히는 것이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수많은 다른 생물종들과 대략 대등한 상태로 존재했다. 포유류 가운데 적응력이 뛰어난 종이었기 때문에 남극대륙을 제외한 지구상 전 지역으로 서식지를 넓히기는 했지만, 그 확장에는 식량 획득의 조건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이 상태를 이후의 '문명 상태'와 대비해서 인류의 '자연 상태'라 할 수 있다.

농업혁명은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얻어먹던' 단계에서 '찾아먹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량 획득 능력이 늘어나서 서식지를 크게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에 걸친 농업문명 단계에서 인류의 개체 수는 몇 백만 수준에서 시작해 억대까지 늘어났다.

농업문명 초기의 식량 생산력은 잉여생산 없는 자급자족 수준이었다. 늘어나는 생산력은 인구 증가와 서식지 확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다가 서식지 확장이 한계에 접근하면서 제한된 영역 내에서 입체적 사회조직이 시작되었다. 잉여생산을 발판으로 2-3차 산업이 자라나는 분업 현상의 전개에 따라 본격적 문명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농업인구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만큼 잉여생산이 늘어난 후기 농업사회에서는 산업구조와 사회조직의 원리를 교체할 필요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농업인구의 비율 감소는 경제활동에서 2-3차 산업의 비중이 커진다는 뜻이다. 체제 질서의 운용에서도 농업활동보다 상공업활동의 통제가 더 중요해졌다.

후기 농업사회에 닥친 변화의 과제를 한 마디로 '유동성 증가'라 할 수 있다. 중세질서의 핵심은 인간의 관리에 있었다. 그러나 산업의 다각화와 비생산활동의 증가에 따라 효과적 사회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인간 아닌 다른 관리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대상이 ''이었다. 추상적-보편적 가치를 가진 돈은 과밀해진 인구와 다양해진 활동 사이에 효율적으로 관련을 맺음으로써 유동성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과 운영의 기본 도구로 재물을 활용한다는, 넓은 의미의 자본주의는 후기 농업사회의 필연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후기 농업사회의 유동성 증가 과제를, 뻑뻑한 반죽에 물을 넣어 부드럽게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자본이 용매(溶媒)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일어난 자본주의는 반죽에 물을 넣는 것이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격이었다. 대단히 과격한 방법이었다.

유럽의 과격노선과 비교하면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자본주의는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색할 만큼 온건한 것이었다. 변화를 도입하더라도 기본 체제를 흔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점진적이고 온건한 방법을 취했다. 농업문명이 일찍 난숙한 단계에 이르러 있어서 탈중세의 과제도 일찍부터 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유럽의 특이한 변화는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종교개혁을 거치며 힘과 속도를 더해갔다. 식민지경영과 원거리무역이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자라나면서 격화하는 경쟁의 주체로 국민국가가 나타났다. 그 경쟁이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에 이르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큰 길로 들어섰다. 19세기 들어 부국강병을 이룬 유럽국들이 밖으로 나서자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일어났다. 종래 유럽인의 해외활동은 기존 문명권의 외곽에만 머물렀는데, 이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우고 여러 문명권의 중심부를 거침없이 유린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체제가 필요로 한 소유권의 절대화

 

자본주의의 출발점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것은 1776,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막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환상의 파트너였다. 산업혁명이 추구한 대량생산체제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로운 시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실적 운용을 위해서는 시장을 마음껏 키워주는 대량생산체제가 필요했다. 자본주의체제의 탄생은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체제의 특성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나는 소유권의 절대화와 가치의 획일화, 그리고 경쟁의 극대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농업사회는 체제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소유권을 부정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무기 소지를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유권의 행사에 절제가 없을 경우 사람을 해치는 데, 그리고 질서를 교란시키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이 무기와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책임을 지우는 규정을 되새겨보자. 생명은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와 나란히 재산을 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가? 명예, 사랑, 행복 등 인간이 누리는 온갖 가치를 제쳐놓고 재산 하나를 생명과 나란히 놓는 것이 무슨 뜻인가? 재산을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독립적 가치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생명에 종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산이 생명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것은 다른 모든 가치를 재산에게도 종속시키는 관념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된 사회에서는 생명을 제외한 모든 인간적 가치가 돈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가치의 획일화가 자본의 지배력을 보장해 준다. 한국인은 이 사실을 해방공간에서 처절하게 경험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돈의 힘으로 민심에 역행하는 노선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의 '87체제'에서 총칼의 힘을 대신해 돈의 힘이 수구세력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도 또 하나의 사례다. 자본주의체제는 한 번 작동하면 가치의 획일화를 통해 체제의 변동을 가로막는 메커니즘을 가진 것이다.

가치의 획일화는 경쟁 극대화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각자의 특성을 두루 인정해준다면 심한 경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점수'라는 하나의 기준만 내세워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울 때,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한두 점 더 따기 위해 아이들은 밤잠을 설쳐야 하고 부모들은 사교육에 재산을 바치게 된다.

경쟁은 인간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현상의 본질적 요소다. 경쟁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혈압 없는 동물이 죽은 동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혈압에도 적정선이 있지 않은가? 80~120의 범위를 어느 쪽으로 벗어나더라도 건강을 걱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건강을 위한 경쟁의 적정선도 있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총 소득이 손실보다 큰 '플러스섬' 경쟁은 건강한 경쟁이다. 고통과 좌절을 느끼는 패자가 있어도, 보듬어줄 여유가 승자에게 있다. '제로섬', 총 소득이 손실과 같은 수준이 된다면 경쟁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여자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마이너스섬', 총 소득이 손실에 미치지 못하는 경쟁은 사회에 해독이 된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사회를 무너트리는 길로 나아간다.

 

 

자본주의체제의 동력은 '불평등'에서 나온다

 

근대화가 추구한 '근대성'이 어떤 것인지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 보면 근대화정책의 타당성을 논할 수 있는 범위가 결정될 것이다. 넓은 지역에서 긴 시간에 나타난 현상이므로 근대성의 정체를 간단히 밝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근대화'가 지향한 방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몇 가지 지표가 있다.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생산력)은 산업혁명의 직접 산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중심의 정치사회 제도는 산업사회로의 구조 변화에 맞춰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조건은 산업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의 완결은 자본주의체제의 성립을 필요로 했다. 중국에서 1860년대에 서양의 산업기술을 들여오는 '양무운동'을 벌였으나 1890년대에 한계를 드러내고 '변법운동'으로 넘어간 데서 체제 변혁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는 경쟁의 심화를 위해 '불평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 착취하는 강자와 착취당하는 약자가 모두 있어야 성립하는 체제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 격차가 커야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열강의 경쟁에서 훌륭한 시설과 제도를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착취 대상의 확보였다. 그래서 식민지 쟁탈전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의 세계적 구조에는 강자와 약자의 비율에 한계가 있다. 산업화를 먼저 이룩한 국가들이 열강의 자리를 차지해서 정원을 채워놓으면 그 후에 산업화를 시도하는 국가는 강자의 자리에 끼어들기 힘들다. 그럼에도 강자들은 약자들에게 산업화를 권한다. 약자도 산업화를 시도해야 강자 입장에서 착취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원이 많은 식민지라도 항만, 철도, 공장 등이 없다면 착취가 어렵지 않은가. 열강이 식민지에 대해 '문명화'를 내세워 체제 변혁을 유도한 것은 자기네 같은 강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먹잇감이 되라는 뜻이었다.

약자인 후발국 입장에서 한계가 주어진 산업화에 나서는 데는 자해행위의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을 처음에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동안 당하다 보면 현실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의미를 깨우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자해행위를 계속하게 하려면 약자의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Divide and rule"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목적을 위해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손해 속에서 조그만 이익을 얻는 '매판세력'이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이 세력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한국에서 근년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쟁 원리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한국을 불리한 위치로 몰고 가는 것인데, 이를 추진하는 지금의 매판세력이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 과거 매판세력의 입장까지 정당화하려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식민지시대의 매판세력인 친일파가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통해 매판적 역할을 계속해 온 끝에 이제 국제자본에 대한 종속성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과학'을 향한 근대인의 신앙

 

1972년의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 이후 '지속가능성'이 전 세계적 과제로 떠오른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근대문명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자연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 태도의 바탕에는 과학의 '전능(全能)'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과학을 통한 자연의 완전한 정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의 제약에 인간이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을 걱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학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의 전능에 대한 믿음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의 과학에 대한 믿음은 '신앙' 차원이었다. 이런 깊은 믿음은 보편성에 대한 확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신앙의 '교리'라 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가 원자론이었다.

19세기 벽두에 돌턴이 제출한 원자론이 근대문명의 보편적 원리가 되었다. 모든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원자론은 19세기 유럽인에게 과학의 전능, 나아가 인간의 전능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원자를 탐구하면 물질세계의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지(全知)는 전능(全能)을 가져올 것이었다.

19세기에 발생한 사회과학도 원자론 관점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사회까지 확장한 것이었다. 물질이 독립적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사회도 독립적 개인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초창기 사회과학자들은 보았다. 원자의 탐구가 물질세계의 완벽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처럼 개인의 연구가 인간사회의 완벽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그들은 믿었다.

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재편성에도 원자론 관점이 적용되었다. 근대 이전의 국가는 지역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의 중층적-복합적인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모든 구성원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직접 상대하는 근대국가는 산업화와 함께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원자론의 세계관은 심리적으로는 개인주의, 제도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유행시켰다. 자유주의는 한쪽으로 개인의 경쟁을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를, 또 한쪽으로 개인의 권리를 중심에 두는 민주주의를 뒷받침했다. 19세기 말에 서양인이 자랑스러워하고 동양인이 부러워한 '근대문명'은 이 몇 가지 원리를 핵심 요소로 가지고 있었다.

원자론의 영향력이 절정에 올라 있던 19세기 말 과학계에서는 원자론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자기와 방사선 연구를 통해 원자 이하의 물질세계로 창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는 '쪼개지지 않는(a-tom)' 원자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사회를 원자론의 관점으로 보는 학술과 사상과 제도는 힘을 잃지 않았다.

물질세계도 인간사회도 유기체적 특성과 원자론적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직관으로 아는 것이다. 문명 발생 이래 대부분의 사회조직 원리는 두 가지 특성을 함께 감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근대인은 유기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봉건제를 비롯해 모든 문명사회에서 나타났던 현상들을 '야만'으로 경멸했다. 이 극심한 사상의 편향성은 아주 특별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나타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인류사회가 처한 조건이 당시의 조건과 달라진 것으로 인식한다면 이 편향성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말'은 바로 '근대화의 종말'

 

자본주의체제에 주기적으로 위기를 일으키는 모순은 어떤 것인가? 자본주의체제는 착취 대상으로서 저개발 상태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 발전 초기에는 산업화를 이룬 소수의 열강이 나머지 세계 모두를 착취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아무런 절제 없이 자본주의 원리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열강의 국내에도 미개발 노동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내 노동력이 개발과정을 통해 조직력을 키우면서 일방적 착취가 어렵게 되자 해외식민지에 의존하게 되고, 경쟁하는 열강의 수가 늘어나면서 식민지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말의 큰 위기가 제국주의시대와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원리를 완화하는 노력이 널리 일어났다. 유럽의 사회보장 발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노력을 가장 소홀히 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내부자원도 넉넉한 편인데다 냉전체제의 패권 위에 신식민지체제(neo-colonial system)를 통한 외부착취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특수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세계 평균의 5, 다른 선진국의 2배를 넘는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미국 혼자만 절제 없이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과거의 열강이 모두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은 꽤 오래 잠복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로마클럽보고서>가 나오고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또 한 차례 큰 위기가 드러났다. 19세기 말의 위기가 산업화세력들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번 위기는 산업문명과 자연 사이의 충돌을 통해 더 근본적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 모순의 기본 양상은 '불평등'에서 동력을 얻는다는 데 있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열역학의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평형상태로 움직여가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체제 도입 초기에 착취 대상이던 대중은 체제 안정에 따라 중산층을 향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가 자연에 대한 착취를 격화시키는데, 그 한계가 1970년대부터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은 드러난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격화시킴으로써 패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반동적 선택이었다. 신자유주의 노선은 이전보다 더 큰 시장과 더 철저한 착취를 필요로 한다.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는 이 필요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권 붕괴 직후 어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다. 완벽한 해답이 존재한다는(그리고 그 해답이 실현되었다는) 근대적 신앙을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세계적 경제위기의 심화를 볼 때, 그런 신앙고백이 그처럼 힘차게 다시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자본주의체제를 대폭 수정하거나 대안을 마련할 필요를 아직까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노선에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개항기의 개화운동 이래 한국인은 자본주의국가로서 발전할 길을 150년간 찾아 왔다. 이 사다리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위만 바라보며 기어오르는 데 몰두했다. 식민통치자와 독재자들은 한국인이 이 믿음을 떠나지 않도록 독려했다. 이 믿음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한 차례 냉철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쟁이 정치가 된 까닭

 

전쟁의 의미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요즘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전쟁의 원래 목적은 약탈이었다. 재화나 영토를 빼앗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을 포획해 노예로 삼는 것도 인적자원의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카르타고 정벌처럼 화끈한 사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십자군전쟁에서 장미전쟁까지, 모든 전쟁에는 손익계산서가 붙었다.

전쟁에는 파괴가 따르므로 승자의 이득이 패자의 손실보다 작은 것이 정상이다. 중세사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잉글랜드 경우를 보면, 전쟁 때문에 왕권이 흔들리는 일이 많았다. 전쟁 비용을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전리품을 충분히 얻지 못했을 때 왕의 직할지를 떼어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세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왕권 신장이 어려웠던 한 가지 이유다.

그런데 산업혁명기에 전쟁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 나오는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이 변화를 보여준다.

주인 아들이 빵집 유리창을 실수로 깨뜨렸을 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당시 유행했던 모양이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했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고, 유리가게 주인이 번 돈은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으니, 사회 전체에게는 분명한 손실이라는 지적이었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대량생산-대량소비 구조에서는 전쟁의 파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괴로 인한 수요의 증대가 오히려 경제 활성화를 부채질하는 것이 크게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큰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대량생산체제가 확장되는 단계에서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20세기 들어와서야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전쟁이 약탈행위에 그친다면 그 정치적 의미가 제한된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전쟁을 걸고, 자신이 없으면 피할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는 소득이 큰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수단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시대 상황에 따른 전쟁의 의미 변화를 깨달았던 것이다.

요즘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산업혁명기 전쟁의 목표가 단순한 자원 획득을 넘어 자본주의체제 확장을 바라보게 된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그 지속을 위해 시장 확대를 필요로 한다는 세계체제론의 지적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지금 존재하는 자원을 탈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로 끌어들여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목표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함포 외교의 첫 번째 요구가 '개항'이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서세동점의 척후병 동인도회사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는 유럽인의 해상활동이 약탈 단계에 있을 때였다. 특히 영국인의 해상활동은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의 경우에서 보듯, 해적 행위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 부사령관으로 나선 드레이크는 스페인 왕이 거금의 현상금을 걸어놓은 해적이었다.

1588년의 승리를 발판으로 15913척의 영국 선단이 처음으로 동양무역에 나서서 3년 만에 귀항했다. 그러나 1596년 출항한 제2차 선단은 실종되고 말았다. 3차 선단을 준비하기 위해 자본을 모은 상인들은 1599년 이 사업의 독점 보장 등 국왕의 보호를 청원하기로 했다. 이 청원에 따라 1년 후 흠정 헌장이 내려짐으로써 동인도회사(EIC)가 성립되었다.

초기의 동인도회사는 하나의 벤처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의 내전 후 왕정복고 때 동인도회사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1670년경의 5개 법령을 통해 독자적 영토 획득과 그 영토 내의 사법권과 화폐주조권,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군사주권 등을 갖게 된 것이다. 영국의 해외 확장을 위한 '하청(下請)국가'가 만들어진 셈이다.

군대 보유권을 갖고도 동인도회사의 병력은 수십 년 동안 수백 명의 경비병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고, 특히 프랑스와의 7년 전쟁 동안 급증해서 전쟁이 끝난 1763년에는 26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후 미소레 왕국과의 전쟁(1767~69, 1780~84, 1789~92, 1799), 마라타 제국과의 전쟁(1775~82, 1803~05, 1817~18) 등을 통해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확장되는 동안 수십만 대군으로 확대됐다. 동인도회사는 세포이반란(1857) 때까지 인도 지배의 주체였고 중국과의 무역도 독점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이 국가를 조종한다는 지적이 있거니와, 100(1757~1858) 동안 동인도회사는 실제로 국가 노릇을 했던 것이다. 아편전쟁의 원인도 동인도회사의 활동에 있었다.

서세동점의 가장 강력한 주체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가 세포이반란을 계기로 1858년 인도 통치권을 국왕에게 넘기고 1874년 해산에 이르게 된 것은 영국 제국주의가 궤도에 오른 결과였다. 17세기 영국의 해외 활동은 '약탈' 단계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고 본국 정치와 별개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하청업체'가 필요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는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약탈보다 시장 확대를 중시하게 되었고, 식민지 경영도 본국 정치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 간 경쟁의 심화 때문에 국가가 해외 활동에 직접 나설 필요도 있었다. 한편 영국 의회가 넓은 범위의 자본세력을 대표하게 되었으므로 회사와 관계된 좁은 범위의 특권세력이 배제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측면도 있다.

동인도회사의 퇴진으로 본격적인 '대영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 목적은 재화 약탈에서 자원 획득을 거쳐 체제 확장으로 그동안 바뀌어 왔다. 인도는 주변부에서 반 주변부로 접근해 왔고, 그에 따라 대영제국의 국가체제 안에 더 깊이 편입된 것이다. 이 무렵, 19세기 중엽에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여 열강의 해외활동 목적이 자본주의체제 확장에 집중되고,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개항' 요구가 강화되기에 이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