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 11:48

 

며칠 전 건강검진 때는 안경을 챙겨 갔다. 시력검사 차례가 되어 글자판을 바라보니 맨눈으로는 꼭대기 큰 글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끼니 중간어림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안경을 거의 끼는 일 없이 지낸 지 1년이 넘는다. 마음먹고 그런 게 아니라, 책상머리에만 붙어 살다가 어쩌다 외출이라는 게 대개 동네 산보 정도니까 곧잘 잊어먹고 나서게 되었다. 안경 안 끼고는 집밖에 못 나가던 50년의 버릇 때문에 처음에는 "앗차! 안경을 안 끼고 나왔네." 도로 들어갈 생각도 났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서울 나갈 때 안경 생각이 나더라도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안 끼고 나가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생각이 났다. 안경을 안 끼고 돌아다니게 된 데 내 생활 자세의 변화가 투영된 것은 아닐까?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을 나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강박에 오래 얽매여 지냈다는 깨달음이 떠오른 것이다. 처음 끼던 중학생 때 이후 학생 시절에는 수업시간에 판서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군대 가서도 눈치보는 데 시력이 필요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정상적' 시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수시로 있었다. 그러나 내 공부에 전념하며 틀어박혀 지내게 된 이후로는 안경의 필요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이 깨달음이 떠오른 후로는 안경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날 때마다 기분좋은 일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돈 없어서 못하는 일이 종종 있다. 전에는 할 수 있던 일을 지금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나 여러 해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스스로에게 뻔뻔해졌다. 형편 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형편 안 되니까 못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분수'를 알게 된 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패배의식에 빠져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안경이 '분수'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되어주었다. 시력 좋은 사람은 많이 보면서 살라고 해라.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재물에 감각이 무딘 것이 체질 때문인지 성장환경 때문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재물 감각 무딘 것도 시력 나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분수로 받아들인다. 작년에도 두 차례 마음이 크게 흔들린 일이 있었다. 한번은 우리집 전세금의 갑절 넘는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내 집 마련'의 모처럼의 기회였고, 그렇게 했더라도 별로 손가락질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지나가기 전에 꼭 쓰고 싶은 데가 있어서 거기에 썼다. 돈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을 마음으로 때우면서 견디지 못하는 성질 때문이다.

 

또 한번은 좋은 일거리를 만났다. 3년 정도는 생활비 걱정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거리였고 명분도 그럴싸한 일에다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의 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다음 단계로 이어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 일의 뒤를 이어나갈 길을 찾아보려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의 득실을 내가 이만큼 냉정하게 저울질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분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평가와 판단의 기준을 분명히 세울 수 있는 덕분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글 제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릴 때가 많다. 내가 재물에 덩둘한 것을 주변에서 걱정해주는 이들이 있지만, 시력장애자가 흔히 다른 감각에 예민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둔감한 만큼 '보이지 않는 것'예 예민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모처럼 생긴 몫돈을 내 생활에 쓰지 않음으로써 내 사람다움에 떳떳함을 지킬 수 있었고, 누가 봐도 좋은 일거리를 맡는 데 신중함으로써 더 좋은 일거리를 떠올릴 기회를 가졌다. 나중에 나 스스로 어리석음이었다고 반성하게 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이런 '주체적'인 판단에서 얻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안경에 의지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기분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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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