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터진 직후 낙동강변에 피난민들이 몰렸을 때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강을 건널 길은 막막하고 언제 북한군의 추격이 있을지 미군기의 폭격이 있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늙은 어버이와 어린애를 데린 젊은 내외가 있었다. 노소(老少)를 함께 건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내외는 어버이라도 제대로 모시기 위해 이를 악물고 어린애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모두 그 효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당시 이 일을 기록한 한 사람은 한국인이 앞을 내다보기보다 늘 뒤를 돌아보며 사는 민족임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이것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유교(儒敎)와 함께 몸에 밴 습성이라고 해석했다.

 

20세기 들어 서양의 군사력과 경제력 앞에 좌절감을 느낀 동아시아인들은 흔히 유교문화의 지배력에서 동양문명 부진의 원인을 찾곤 했다. 루쉰(魯迅)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부모의 치료를 위해 자식의 몸을 바치는 것과 같은 효()의 덕목이 야만적 식인(食人)풍습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어린이의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초기 선교사들이 주목한 동양의 야만적 현상이었다. 4백년 전 마테오 리치는 중국문명의 장점을 깊이 인식했지만 가난한 중국인들이 어린아이를 죽이는 풍속에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불교의 윤회설(輪廻說) 때문에 능력 없는 부모들이 아이가 좋은 집에 환생하기 바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1870년 텐진(天津)에서 민중과 서양인들 사이에 큰 유혈충돌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수녀들이 길거리의 고아들을 불러모은 자선사업에 있었다. 이 사업의 기독교적-인도주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중국인들은 아이들을 마술(魔術)에 쓰려는 짓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인권에 대한 동서간의 관념 차이는 아직도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은 공식적으로 아시아적 가치를 등지고 루쉰이 동경해 마지않던 사이언스데모크라시를 추구하고 있다. 낙동강변의 비극에 대해서도 오늘날 사람들은 50년 전 사람들처럼 효성에 감탄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수대교, 삼풍에서 씨랜드 화재에 이르기까지 인명경시 풍조가 몰고 오는 재앙들을 보면 우리는 옛 이념을 버렸을 뿐 새 이념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물신(物神)’의 이념을 세운 것일까.

 

어른들만큼 자위능력을 가지지 못한 어린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은 특히 참담하다. 자본주의와 자유경쟁에 내맡길 수 없는,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들이 있다. 199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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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