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충류와 포유류 사이의 제일 큰 차이는 기억력이라 한다. 파충류 동물은 먹이가 보이면 덮치고 위험이 느껴지면 피하는 등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당장 주어진 조건에 즉물적(卽物的) 반응만을 보이지만, 포유류 동물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주어진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유류 중에서도 기억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동물이 인류다. 가족관계로부터 출발한 사회조직, 도구사용에서 출발한 기술문명이 모두 기억력 활용에 근거를 둔 것이다. 기억력을 더욱더 확장하기 위해 인류는 언어와 문자를 만들고 제지술과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지금은 전자매체를 이용해 문명의 새로운 단계를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기억은 문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열쇠였고, 과거의 기억을 잘 모으고 정리하는 사람들이 문명초기부터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맡았다. 문자가 없던 시절 주술사(呪術師)들은 부족의 역사를 구연(口演)하는 푸닥거리로 구성원들을 결속시켰고, 문자시대의 통치계급은 역사를 통치의 거울로 삼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민족국가 형성과 사회발전의 원리를 모색하는 학문으로 역사학이 발달했다.

 

역사학이 이처럼 인류의 지적활동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맡아온 것은 문명의 본질인 기억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매체의 등장으로 인류의 기억능력이 또 한 차례 폭발적 확장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역사학자들은 걱정에 싸여 있다. 지난 금요일 역사학과 지식정보사회란 주제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많은 발표자들은 역사학의 위기를 지적했다.

 

세계화로 인한 국가기능의 쇠퇴, 학문적 엄밀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됐지만, 가장 근본적인 위협은 사람들의 관심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현상으로 지적됐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현실경쟁에 유용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역사의 가르침을 실용성이 별로 없는 가르침으로 여기게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전자매체는 정보의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다주고 있다. 그 자유는 인간을 과거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일까. 오히려 인간을 현재에 묶어놓는 구속(拘束)의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기억력의 팽창이 기억력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고 문명의 발달이 문명의 본질을 퇴화시키는 역설(逆說)의 시대를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0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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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